[Analog RPG] 1. 기꺼이 다시 부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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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036은 경제적으로 독립했을까? 그는 독립에 실패했다.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며 자존심을 포기한 대가로 주어지는 돈의 크기가 너무나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아니다. 사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1036은 사랑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정신 나간 캐릭터였다. 그냥 남들처럼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으면 그의 마음의 소리가 경고음을 달고 시끄럽게 울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내 삶이 아니야.’

그는 적당히 사는 걸 못했다. 그는 감히 일을 사랑하고 싶었다. 일을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일터를 사랑하고 싶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아무리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서로서로 사랑하며 일이 진척되는 과정을 즐기는 그 경험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소수의 특별 캐릭터만 가능해서 1036같이 보잘것없고 능력도 없는 캐릭터는 꿈도 꾸지 못하는 옵션이었다.


어느 날 세상 풍파에 지쳐 돈이 필요했을 때 1036은 자신의 성질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냥 돈만 보기로 했다. 일터에서 사랑 타령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계약 관계다. 나는 피고용인이며 노동자이다. 나는 계약대로 일한다. 돈 주는 만큼 일한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망할 고용인은 계약을 잊었는지 계약서에 없던 권위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그에게 반항하는 1036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힘을 과시하고 싶어 했고 존경을 원했다. 그에게 1036은 부품이자 장난감이었다. 계약자도 못 되었던 것이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 그런 부품은 세상에 널렸으니 원할 때마다 고용주의 만족감을 높여주는 장난감 역할도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1036은 처음으로 첫 회사가 아쉬워졌다. 거기엔 좋은 동료 부품들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부품을 염려해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선배 부품들. 또 거기엔 고용인을 직접 영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장난감 취급을 당할 일이 아주 적었다. 물론 정신적 스트레스를 후배에게 푸는 정신적으로 약해 빠진 고장 난 부품은 어디를 가나 존재했지만, 운이 좋으면 그들이 나가주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고용인은 그 회사에 있는 한 영원했다.

“작은 회사에서 계약서대로만 일 할 방법 없을까? 인간성이 침해당하지 않으면서.”
“바랄 거 바래. 대한민국에 그런데가 어딨냐. 왜 사람들이 좇소기업 좇소기업 하겠어.”
“아직 못 찾아서 그렇지. 있지 않을까?”
“억울하면 네가 사장해야지.”
“그럼, 굶어죽어도 회사따윈 다니지 말아야겠다.”

능력 없는 자가 대한민국에서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No. 1036은 현재 대한민국 시나리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036은 부품의 세계에서 이탈했다.


부품에 속하지 않자 1036의 부모는 매일 1036을 걱정했다. 부모는 철딱서니 없는 1036이 언제 어른이 되나 노심초사했다. 그들은 승자였다. 비교적 평생 고용을 보장해주는 안정적인 직업을 차지한 소시민 승자, IMF에도 정리해고 당하지 않은 덕에 1036에게 엘리트까지는 아니지만,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해올 수 있었다. 다행히 1036의 피붙이는 대기업을 다니고 밥벌이를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문제는 1036이다. 따스한 밥 해 먹이고 열심히 교육시켜 놓았더니 영 엉뚱한 짓만 골라 한다. 돈 되는 일은 할 생각을 안 하고 자기 멋대로만 산다. 어휴, 저 골칫거리. 그러게 엄마가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했지? 태어나 들어본 적도 없는 심리학과를 간다고 했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다.

엄마는 그런 1036이 안스러워 회사를 때려 친 1036에게 다달이 돈을 보낸다. 어디 가서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 덕에 1036은 잔소리만 감당하면 모든 생활이 해결되었다. 엄마 잔소리는 싫지만 엄마 돈은 달콤했다. 굳이 부품 역할을 하지 않아도 모아 놓은 돈을 지키면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1036은 다행히 소유욕이 크게 없었다. 머리도 하지 않고 쇼핑도 하지 않았다. 가끔 책을 사고 가끔 카페에 가고 가끔 영화를 보면 충분했다. 운이 좋아 먹고 사는 데 큰 돈이 들지 않았다. ‘나는 부자다.’ 1036은 생각했다. ‘그래. 이러려고 돈 버는 건데. 지금 이럴 수 있는걸.’

그러나 때로 엄마의 잔소리 공격을 받으면 1036은 모든 전력을 상실했다. ‘역시 난 쓰레기인가, 세상에 필요 없나.’ 그러다가 다시 부품 라이프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숨이 덜컥 막혔다. 원하는 게 뭔지 몰라도 싫은 건 확실해. 부품은 절대 사절이야. 그렇게 살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평화로운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1036은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방안을 골몰하고 있었다. 지출 통제와 계획, 그건 부품 생활을 청산한 이후로 쭉 외면해 온 문제였다. 1036은 가계부 쓰는 걸 좋아했다. 부품 라이프를 버티게 해 준 건 통장에 쌓이는 돈이었다. 그 돈은 자유였다. 어딘가로 훌쩍 떠날 자유, 엄마의 잔소리 공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자유,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해주는 자유. 언젠간 그 생활을 끝내게 해 줄 자유.

지금 자신과 동반자의 자산을 계산하고 지출을 계산하고 미래 들어올 수입에 따라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며 깨달았다. 이러다간 평생 엄마 잔소리를 듣고 살고 만다. 경제적 자유 따윈 없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1036은 이 생각을 10년 전에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후회는 그의 주력 분야가 아니다. 시간을 당길 방법 없을까? 순간 머리가 반짝였다.

‘암호 화폐 시장의 한 달은 1년과 같다.’

‘스팀이다. 스팀에 투자금을 더 집어넣어야겠어. 나는 스팀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했으니 스스로 투자자가 되는 거다. 스팀에 투자하는 건 나에게 투자하는 거다. 나보다 세상에 믿을 게 있나? 적어도 후회는 없겠지. 파도에 몸을 맡기자!’

‘어?! 그런데 이젠 남은 현금이 별로 없다. 동반자 L군은 가상화폐와 스팀에 대한 신뢰도 믿음도 전혀 없었다. 그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내가 사는 방식을 응원해주지만, 모험을 하지 않는 안전제일주의자이다. …..현금이 없으면 현금을 채굴하면 되잖아. 현금을 채굴하자!’


‘스팀을 위해 현금을 채굴하시겠습니까?’
‘Yes’
딸각


‘스팀을 위해 잠시 부품이 되겠습니까?’
‘Yes’
딸각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현금을 채굴하러 가자. 이건 다른 마음이야. 누군가가 날 부품으로 사용해준다면 너무나 기쁠 것이다. 비록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 모든 행위와 보잘 것 없는 시급은 나를 부자로 만들고 내게 경제적 자유를 선사할 씨앗이 될 테니 말이다. 화가 나도 힘들어도 인격 모독을 해도 기꺼이 버틸 수 있다. 스팀을 사기 위해서라면.’

의욕 게이지가 가득 찬 1036은 불 꺼진 소파에 누워 6년 만에 알바몬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굶어 죽어도 다신 부품이 될 수 없다고 큰소리 뻥뻥 쳤던 1036은 3년 만에 자신의 입장을 전면 철회하고 ‘어디 부품으로 써줄 감사한 곳 없나?’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도 행복과 풍요에 부풀어서 말이다. 이래서 이 게임이 재밌는 것이다. 어느 하나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니까.

과연 1036은 현금 채굴 퀘스트를 달성하게 될까?
to be continued...


프롤로그 – No.1036은 독립했다.


-2021년 6월 2일, by 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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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질문이요...

이거 소설이에요? ^^

네 아마도 소설입니다 :D

아하~~~ 정주행 할게요~~~

 3 years ago (edited)

저 프롤로그 놓치고 오늘에서야 2편 연달아봤어요! 너무 재밌어서 2편 시급합니다!!

우어 재밌다니 ㅠ 넘나 행복해요 젠님을 위해서라도 계속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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