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소한 생각] <#57> 정직이 정책보다 우위이다
개인주의가 대립된 집단주의에 반감을 가질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획이나 제도를 집단 그 자체나 목적으로 볼 필요까지는 없다.
이기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개인주의가 반드시 이타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듯이 반제도적일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다만 칸트의 지적대로 정직이 정책보다는 분명히 질서의 상위 개념이지만 정책의 영역에서는 정직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지식의 한계로 정책은 언제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은 항상 정직하여야 하나?
혁명을 위한 아지프로(선전선동)는 정당성을 갖는가?
개체가 모인 총합이라는 전체와 형태로서의 전체는 구분하여야 한다.
지식은 필연적으로 선택적이고 개별적이다.
단편으로 전체를 말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여러 국면 전체에서의 정책의 계획과 통제는 형태로서의 전체로 혼동된다.
이 또한 어떤 양상으로의 개별적 선택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전체에 관한 계획은 언제나 선택적 양상이 된다.
이 선택적 양상은 역사적으로 어느 한 시기 또는 일정한 문화나 환경에서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넘어서는 일반적인 보편타당성이 부족하다.
미래라는 불확정적인 과정인 역사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전선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예측된 탐미적이고 전체적 계획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목적을 설정한다.
목적을 위한 계획은 통제와 권위에 의한 강력한 독재를 불러온다.
실현을 위한 수단과 개혁의 계획을 요구하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정된 이론적 구성물인 닫힌 체계의 모형은 역사주의적 전체론(Holism)으로 이해되며 전체적 계획과 통제로 연결된다.
유토피아를 향한 선구적 혁명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일지라도 정당화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외부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궁극적 목적의 닫힌 패러다임이며 한계이다.
미래는 불확정적이므로 불확실한 목적이 행위의 수단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유토피아적인 요구는 결과로서의 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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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자생적 질서의 해결책에 맡겨라
<#52> 시장의 선택은 배려하는마음이다
흥미로운 것은 18세기의 사상가들에 의해 역사 연구가 역사학으로 완전히 인정된 이유는 역사철학, 즉 일어난 일들의 연구가 아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는 패턴의 이론화 가능성 때문이었죠. 헤겔을 정치에 접목시키면 극과 극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정반합의 시각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망원경(?)인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뒤집어서 정신의 자리에 유물론을 넣었죠.
이미 중세 후기에 르네상스의 도래로 플라톤의 시대는 끝났었죠.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종말론적인 플라톤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듯합니다.
역사론적 유물사관은 미래의 불확정성으로 인하여 자체 오류를 내포합니다.
프레임의 틀에 갖혀 단편으로 전체를 보는 귀납의 오류도 갖고 있지요.
빅히스토리의 추세는 보되 불확실한 예측은 경계해야 합니다.
스팀잇의 보석같은 제이미님의 댓글이 반갑습니다.
'원리'를 도출해내고 싶은 게 인간 본성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유물사관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있는데요, 전체 그림에 대한 오만도 그렇지만 단계별로 일이 진행되는 그림을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많은 폭력을 수반할 수 밖에 없지요.
인간의 깊숙한 곳에 녹아 있는 종말론적인 본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전선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도 하지요.
제이미님 사진 실력은 좀 늘고 있나요?
저는 30여년전 사진에 미쳐서 돌아다닌 적이 있죠.
이제 다시 시작하려니 익숙하지가 않네요.
음 사실 사진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늘 수 있는 실력이라 할 게 없네요. 다음엔 카메라를 좀 고려해서 폰을 바꿔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합니다. ㅎㅎㅎ
키우는 건 싫지만 고양이는 무척 좋아합니다.
그놈의 도도한 자태는 어디서 나오는건지.
클로즈업에서 순간의 표정을 캐치해 보세요.
제가 좋아하는 고양이 사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