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선샤인

in #bus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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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에 날아가거나 꺽이지 않는 것들.
깊이 뿌리 박은 것,
무거운 것,
부드러운 것,
그리고 나.

2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호랑이 같던 아버지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셨다. 어머니와 자식들은 아랑곳 하지 않아서 담배에 대한 친숙함을 내게 심어 주셨다. 유리 재떨이와 구겨진 담배갑을 장난감 보듯하며 자랐다. 나의 담배에 대한 강한 내성은 그때 생겼을 것이다. 스무살을 지나던 어느 날 짝사랑에 빠져 혼자 담배를 배울 때, 그 연기를 들숨하고 날숨하는 것이 너무 수월해서 자취방을 연기로 가득 채웠었다. 머리가 띠용하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 주신, 술 담배를 멀리 하는 것에 대한 결벽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혼 후에는 베란다가 끽연실이었다. 덕분에 베란다는 나만의 아늑한 공간이 되었지만 한겨울이나 한여름에 넉넉한 시간을 즐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요즘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원시인 소리를 듣는다. 베란다에서 담배 좀 피우지 말아 달라는, 아래 윗 집 이웃사촌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는 방송이 아파트 스피커를 통해 종종 나온다. 이제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집은 2층이라 큰 불편함 없이 들락거릴 수 있다. 다시 돌아온 봄이 반가운 이유는 쾌적한 실외환경 때문이다. 산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는 곳에서 담배 한모금 깊게 들이키러 간다.
끽연가의 설 자리는 넓어지고 있다.
꽃도 피는데 담배는 왜 못펴.

3
검은 천을 집모양, 성당모양, 꽃과 나무모양으로 잘라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양으로 오려서 태양의 반대 방향으로, 각자의 모체 뒤에 가져다 놓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자를 보고 싶다. 미치도록 맑아서 양지와 음지 사이에 서면 예리하게 잘릴 수도 있는 눈부시게 맑은 날을 보고 싶다. 눈부심 안에서 선명해지고 투명해지면 좋겠다. 그러면 뿌연 백태에 둘러 쌓인 내 갑갑함의 실체를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데나 떠나는 여행을 하고 싶다. 아무데나 떠나는 게 익숙한 사람만이 아무데나 여행 할 수 있겠지.
톡 치면 쩍 갈라지는 거울같은 파란 하늘이 미치도록 그립다. 드넓은 몽골 초원을 이곳 하늘에 펼친다.

4
tv 앞에서 리모콘 가지고 꼼지락거리는데 이터널선샤인이 눈에 들어왔다. 스토리 따위 필요없는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이런 영화는 말이 많다. 이건 어때 라든가 무슨 말인지 맞춰봐 하며 귀에 대고 재잘댄다. 게다가 드문드문 본 기억도 나는 오래된 영화. 출시년도가 2015년이니까 절대반지 시리즈 이후인데 왜 오래전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지손가락이 미끄러져 시작 버튼을 눌렀다. 무의식이 나를 이끌었다.
남자가 몬탁행 기차를 타는 첫 장면에서 묘한 이질감이 생긴다. 어쩐 일인지 한동안 목구멍을 막아 놓았던 숨막힘증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뜬금없이 들이대는 여자. 개연성 없는 3류 연애 영화였었나 하며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이상하게도 리모콘은 이미 집어 들 수 없는 사정거리 밖으로 도망가 있었다. 이것도 무의식이 미리 준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30cm만 움직이면 되는 것을 귀차니즘에 빠진 나머지 영화를 끝까지 보고 말았다.
프로도와 헐크와 스파이더맨의 전 여친이 조연급으로 출연한 블록버스터급 캐스팅이 눈에 띈다.
잃어버리기 원했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한 남자의 노력이 내 공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몬탁 해변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치킨을 빼앗긴 남자가 부럽기는 하지만 진부한 설정 아닌가. 심지어 여자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고 남자는 그저 그런 시계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설계도면을 훔쳐와 기억 놀이라는 장치를 더했을 뿐이다. 코미디의 제왕 짐 캐리의 코믹한 표정 한 두 장면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어색했고 케이트 윈슬렛의 머리 색깔은 그다지 튀지 않았다.
영화는, 이렇게 치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잔잔하게 풀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나에게 이야기 했다. 그렇게 강요 당하며 영화를 보았다.
기이한 것은 영화를 본 후, 한동안 나를 짓눌렀던 갑갑증을 벗었다는 것이다. 몸이 가벼워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카타르시스를 간접 경험한 때문인지, 아니면 몬탁에 가고 싶었던 것인지.
배가 고팠던 무의식이 어떤 먹잇감을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터널선샤인이 아니면 안되었을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차피 멀리 날아간 갑갑증에게 물어 볼 수는 없고 무의식의 덧문은 옹골지게 닫혀 있다.

술 마시느라 포스팅을 하루 건너 뛰었더니 죄 지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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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터널 션샤인 봤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참 영화볼 때는 재밌게 본 것 같은데 꼭 끝나면 남는게 없어요 ㅜ

꼭 1일 1포 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ㅋㅋ

쉬어가면서 하는 거죠 ㅎㅎ

넵, 쉬어 가면서..ㅎ
이 영화가 볼 때는 그저 그런데 이상하게 보고 나니까 뭔가 남아요...참

저도 보긴 했는데 내용이 잘 기억에 안나네요 ㅎㅎ 그만큼 진부했었다는 이야기 이겠죠.

얘기는 그저 그랬는데 의외로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포스팅 이렇게 해 놓고 돌 맞을지도...

아버지 때문에 담배에 익숙하셨군요. 저는 엄청 골초엿던 할머니때문에 담배에 익숙했었지요. 지금이야 담배를 완전히 다 끊었지만요.

왠만한 의지로 담배 끊는 거 잘 안되던데요...
담배 끊는 분들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끊게 되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이렁..
금연을 안하셨군요
저는 옛날에 밤샘 설계작업 땜에
담배,커피 골초였는대 금연 성공 했습니다 으쓱~~^^*

금연 성공하신 분 여기도 계시네요.. 존경합니다..
노하우라도 있으면 포스팅으로 올려주세요...ㅎㅎ
그리고 "이렁" <--이거 유행어로 미는 거죠??

4번에서 몽땅 기억해서 외우고 싶을만한 시를 쓰셨네요^^

미치도록 맑아서 양지와 음지 사이에 서면 예리하게 잘릴 수도 있는 눈부시게 맑은 날을 보고 싶다. 눈부심 안에서 선명해지고 투명해지면 좋겠다. 그러면 뿌연 백태에 둘러 쌓인 내 갑갑함의 실체를 알 수 있을 텐데

이터널 선샤인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지요. 사람마다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니 그 감상 또한 다를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들은 것은, 우리가 사랑한 모든 기억을 지운다 해도, 내 안의 감성과 인간됨을 다시 리셋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그것들애게 매료되고 다시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단순히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ㄱ오래오래 울림이 있는 그런 영화였어요.

이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오잉 뭐지? 하시겠네요.
삐딱하게 보였던 것은 당시 내 감정이 삐딱했던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보고 나서는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되었던 이유가, 이 영화가 가지는 힘일지도 모르겠네요. 북키퍼님은 울림을,,, 저는 상쾌함을,,, 이 영화를 이렇게 나눠 가졌네요..ㅎㅎ그런데 왜 상쾌해졌는지는 진심 모르겠어요..

어떠한 이유에서든 갑갑함이 좀 줄었들었다면 잘된 것 같습니다.
의외로 의도치 않은 것에서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이번주는 하늘이 진짜 쨍 했으면 좋겠네요

맞는 말씀인거 같아요. 한 곳에 집중하다 보면 더 안 풀리고 어쩌다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를 붙잡기도 하니까요.. 신기한 경험이긴 한데 그냥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야겠죠..

새드님 이터널선샤인이라니... ㅋㅋ
50축하드립니다 ㅋㅋㅋㅋ

엇 액타님도 50...
축하 감사히 받을게요...ㅎㅎ

이 포스팅 정말 마음에 든다...
오늘 숫자 일기 올리려고 했는데 유피님때문에 포기합니다. ㅎㅎㅎ 대신 리스팀으로!!!

팬클럽 달고 다니시는 에빵님이 리스팀까지...
저는 에빵님 숫자 일기가 보고 싶은데요..ㅎㅎ 어여 보여주세용..

여러가지로 공감 많이 하고 갑니다.^^ 팔로잉 할게요~

고맙습니다. 맞팔 완료 했어요..
자주 뵈어요..ㅎㅎ

네~^^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첫 아이 갖기 전에 술 담배를 모두 끊었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어떻게 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사람이란 게 정말 웃긴 거 같습니다. ^^

술까지 끊으셨다구요??
저는 술 담배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러는데요..
가끔 담배는 진짜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언제가 될지는...^^

술은 끊을려고 끊은 건 아닌데... 안 먹다보니 잘 못먹겠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잘 마셨는데... 이제는 소주 몇 잔만 먹어도 헤롱헤롱 하네요...ㅋ
완전히 내성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소통의 가치 이벤트 #13] 정답을 맞추셨네요! 풀보팅 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쉽고 재미있는 스팀잇 가즈앗!

보팅할 데가 없어서 여기다 하고 갈께용...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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