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무게 2 - 화학 선생님

in #bus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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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에 적성검사라는 게 있었다. 학생들이 진로를 결정할 때 자신이 어느 쪽에 적합한 뇌 구조를 가졌는지 알려주는 검사였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서 점수로 보여주는 것이라 요즘처럼 복잡하거나 세밀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고2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배우는 과목도 달라지고 대학에 지원할 학과도 달라졌다.

나는 거의 비슷한 점수를 받은 특이한 경우였는데 양쪽 모두 높은 점수였다면 모를까 그냥 고만고만한 낮은 점수였다. 머리 안에 저밀도의 뉴런 조직이 나름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적성검사 점수가 불과 2점 높아서 이과를 선택했다. 비루한 이유를 덧붙이자면 영어가 싫어서였지만, 그 당시 대입 시험에서는 이과나 문과나 영어 점수의 비중이 똑같았다. 암기 수면증이 암기 과목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단지 영어가 한 몫을 거든 것뿐이었다. 그때 불이님만 알았어도...

중1 때 예쁜 지리 선생님을 만나서 1년 내내 지리 과목을 거의 100점 수준으로 받아본 이후로 암기 과목은 지리멸렬해졌다. 이과를 선택하고 고2에 올라와 암기에서 해방되나 싶었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교과서를 받고 보니 생물, 지구과학, 화학, 전부 해롱해롱한 암기 과목이었다. 그때부터는 수학조차도 암기 과목의 반열에 올라서서 심신을 어지럽혔다.

화학을 담당하신 젊은 여자 선생님을 설명하자면 그 다양한 특성을 나열해야겠지만,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어디 가서 '잘 생겼네' '예쁘네(괜한 오해 살까 봐 요즘은 안 한다)' 말은 해도 이런말은 잘 안 하는데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는 없고, 죄송스럽지만, 정말 못 생기셨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나는 이 분 덕에 화학을 좋아할 수 있었다. 열정적이면서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셨고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다. 원소기호 20번까지를 각자 아는 노래에 맞춰 가사 대신 부르게 하셨는데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제대로 부를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너희가 영어권에 사는 사람이라면 번호만 외우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영문 기호와 번호를 함께 외워야 한다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그분은 화학이 재미있는 과목임을 알게 해 준 선생님이셨다. 화학 시간은 교과목 중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겨우 1, 2주였을까. 학기 시작 후 내 기억으로 적어도 한 달을 넘기지 않는다. 선생님은 일본으로 훌쩍 유학 가셨다.

후임으로 오신 분은 착한 선생님이었지만 화학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했다. 그 선생님의 설명은 1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한 시간이 길고 지루했다. 그래서 그 선생님 시간에는 고개를 숙이고 혼자 화학을 공부했고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전체 과목 1등이 아니라 화학만 1등이다. 다른 과목은 말할 수 없으니 이해해 주시길... 고3 대입 원서를 작성하던 날 담임 선생님은 어느 학교에 지원하고 싶냐고 물어서 나는 화학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 이 학교가라.
네.

대입 시즌이 다가오면 높은 진학률을 원하는 선생님과 더 좋은 대학을 원하는 학생(학부모)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원만하게 합의되지 않는 경우 격하게 대립하기도 하고 결과는 학생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이은 상담과 실랑이로 피곤해 진 선생님께 나는 쉴 시간을 드렸다. 그리고 무사히 화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단 한 번도 화학 관련 일에 종사해 본 적 없었어도 그 대학에서 나는 삶의 지표를 다시 쓸 수 있었다. 내 심장의 펌프질은 나침반처럼 여전히 한 곳만을 향하고 있다.
인연의 무게를 재는 저울에 평형이란 있을 수 없다.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내 인생을 바꾼 화학 선생님에게 나는 깃털보다 가벼운 존재이지만 그 선생님은 한없이 깊은 발자국을 내게 남겨 주셨다.
인연을 더듬다 보면 그것이 운명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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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선생님이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한듯 하네요^^ 저는 재미없는 수학선생님때문에 지금도 숫자에는 영 자신이 없는거 같습니다.

학생시절은 백지장이라 뭘 그리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특화된 부분이 있긴 하겠지만...
제대로 그림을 그려주는 선생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생의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이시네요.
길은 열었는데, 다른 길로 가신 듯하지만...

저도 암기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수학 쪽으로 했습니다. 제가 배우던 당시에는 이과생도 문과 과목을 2과목 시험을 쳤네요. 수학 물리 화학 지구과학만 잘 했습니다. 다른 과목은 마찬가지 안 물어도 됩니다. ^^

제대로 다른 길을 갔죠..ㅎㅎ 그런 선생님께 오래 배우지 못한 것이 좀 아쉽네요..
그 때는 문과과목 조금하고 과학 과목도 학력고사에서는 2가지만 선택했었죠. 말린사과님은 물리, 화학 하셨을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했어요. 스팀잇 하는만큼만 공부했으면 서울대학을....ㅋ

저는 이과 과목 네 과목 다 치렀습니다. 거기다가 문과 과목 2 과목에 제 2외국어 까지...원서 쓴 대학교에서 논술도 친 기억인데 가물합니다. 이렇게 시험 치른게 마지막 일겁니다. 아마 @sadmt님 보다 제가 2,3년 먼저 학력고사 친 것 같아요.불쌍했죠. ㅋㅋ

증말 불쌍하셨네요..ㅎㅎ 과학 네과목을 전부 다...ㅋ 그땐 그랬나 보네요.. 생물,, 암기의 끝판왕이었는데요.. 제2외국어 독일어였는데,,, 역시 언어는.... 꽝이었습니다.ㅋ

생물은 일찍 포기였죠. 제가 그래서인지 작은놈이 생명과학을 참 못하네요. Ich liebe dich. das des dem das. ㅋㅋ

중성 관사를 기억하시네요.. 독일어 하나도 기억안나는데 관사만 생각나요..ㅎㅎ

맞아요..
학교때 과목을 좋아 하는 계기는 샘의 역할이 커요..ㅎ
저도 화학 쌤이 예쁜 여자분이었는대 ㅎㅎㅎㅎ

그럼 화학 잘 하셨겠네요..ㅎㅎ
왜 저도 공부를 머리로 안하고 눈으로 했을까요...ㅋㅋ

좋은선생님이네요
그래도 나쁜선생님보다 좋은선생님이 더 많겠죠 ~

그렇겠죠.. 사실 나쁜 선생님은 거의 보지를 못했어요.. 단지 존경스럽지 않았던 것 뿐이었죠..

인생은 정말 계획한데로 안되는거 같습니다^^

우리가 암호화폐에 이렇게 몰두하게 될 지 예상이나 했을까요? ㅎ

암호화폐에 몰두하다가 저는 스팀에 요즘 몰두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암호화폐는 오히려 잘 안보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될 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ㅋㅋ

스팀잇은 정말 좋아요~^^
저는 요샌 스팀헌트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선생님 때문에 특정 과목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거 보면 참 희안해요.
공부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하는 것인지..ㅋ
저는 이과였는데, 일본어를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도 했고요, 대학은 철학과를 다녔네요^^

그러네요. 감정이 앞서지 않으면 머리도 따라가지를 못하는 거 같네요..
이과 나와서 문과 쪽 시험 보던 사람 별로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철학과를.. 일본어에다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으셨었나 봅니다.. 생각만해도 머리가 지끈...

ㅋㅋㅋㅋㅋ
학창시절에는 다 비슷 한가바요^^*

뭐 예쁜 선생님 만나면 저절로 공부가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하죠..ㅎㅎ

칼카나마알아철니주납.....열개뿐이 기억이 안나네요. 저희학교에는 제물포 선생님이 계서서 물리를 포기하는 것에 큰 자책감이 없었습니다. ㅎㅎㅎ이과 첫 모의고사에서 사탐 1등급이...ㅎㅎ물론 다른 등급은 처참했죠.

돌이켜 보면 깊어지는 발자국들이 있는 것 같아요. 상대는 모르지만 놓쳐지지 않는 인연의 끈도 있는 것 같구요.

과목 편식이 저처럼 심하셨네요..ㅎㅎ
저에게 깊은 자국을 남긴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나와 관계를 맺었는지는 모르지만 가볍든 무겁든 진심이 담겨 있으면 상대방은 감동하게 마련인 듯 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는 싶은데 안 되는 이유는 진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목소리가 볼품없어서 라고 생각해 봅니다.ㅎㅎ

선생님에게 나는 깃털보다 가벼운 존재이지만 그 선생님은 한없이 깊은 발자국을 내게 남겨 주셨다.
인연을 더듬다 보면 그것이 운명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된다.

아니요. 기억하일겁니다. 열심히 공부해줬던 멋진 학생으로요^^

몇 안 되는 좋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인데 너무 짧았던 것이 아쉽습니다.

적성검사 결과를 받아보며 당시에는 아무런 필터가 없다보니 '아~ 이걸 선택해야 하나보다~'라고 순수하게(?) 믿었던 적이 있었죠. ㅎㅎ

그나저나 왜 저희 학교에는 예쁜 선생님이 안계셨던 걸까요.. -ㅅ-;;
저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네요. ㅋㅋ

울아이 학교에서 무슨 검사했다고 가져왔는데 무려 4페이지 짜리 팜플렛이더군요. 그때는 달랑 한 장이었던 거 같은데요..ㅎ
선택의 폭이 좁으니 쉽게 결정해 버린듯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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