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여행3

in #busy6 years ago

잊을 수 없는 그 맛
지리산 여행1
지리산 여행2

DOOR3 - 복사본.png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지리산의 풍경을 살펴보자면 노고단 쪽으로 갈수록 둥글둥글한 초록에 가까워지고 천왕봉 쪽으로 갈수록 기암괴석과 함께 점점 뾰족해지는 산세를 확인할 수 있다. 양쪽 모두 그 중후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노고단은 여성적이고 천왕봉은 남성적이라고 구분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배낭은 가벼워지는데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피로는 급속하게 쌓였고 우리는 더 자주 쉬어야 했다. 장터목 산장까지는 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서 슬슬 맥이 풀리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뷰 포인트다 싶으면 배낭을 풀고 땀을 식혔다. 나무, 산, 바위, 무엇이든지, 다듬을 수 없고 길들일 수 없는 원시의 형태 그대로, 점점 대담하게 천왕봉을 향해 달려갔다. 달력 사진에나 나올 법한 이국의 풍경을 한 시간에 12장씩 넘겼다.

세석평전을 한참 지나 천왕봉 가는 길의 고사목 군락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구름이 잔뜩 서려 있던 회백색 능선 주변, 또 다른 무채색을 담고 있는 고사목들은, 성장판을 닫은 채 세월의 흔적을 버린 후에야 더욱 단단해졌다. 눈과 비를 견디어 왔던 나이테, 멈춘 순간부터 얼마나 버리며 살아왔는지, 이십 대의 나는 가늠하지 못했다. 심각하게 우스운 폼으로 사진을 찍던 우리 일행에게 고사목은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다. 벌거벗은 채 무거운 무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길게 늘어진 천왕봉의 턱수염을 잡아당겨 가며 산의 뿌리에 접근해 갔다. 후배 한 명을 장터목 산장에 먼저 보내서 자리를 잡도록 했다. 1차 종주에서는 후배 한 명이 끝까지 함께했다. 축지법을 쓸 줄 아는, 워낙 건강한 녀석이라(우슈와 축구에 능한) 제 임무를 훌륭히 소화했다. 장터목 산장은 말 그대로 장터였다. 산장이건 근처 텐트 자리건 사람들로 빼곡했다. 후배를 먼저 보내지 않았다면 텐트 칠 자리를 새로 만들 뻔했다. 2차 종주에서도 후배 한 명이 있었는데 이 아이는 세석평전에서 하산했다.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하는 놈을 잡을 수가 없어서 가진 거 다 빼앗은 다음 산 밑으로 던져 버렸다. 집안 형편이 좀 되는 녀석이라 끝까지 함께 갔으면 회에 매운탕까지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내 차비를 털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 긷는 일도, 설거지도...

우리는 천왕봉으로 향하는 베이스캠프에서 두 번째 밤을 준비했다. 사람들은 장터목 산장을 베이스캠프 삼아 하룻밤을 보내고 천왕봉 일출에 맞춰 새벽을 산행한다. 새벽이 오자 잠을 깰 수밖에 없었다. 산 공기가 워낙 좋아 일찍 일어나기도 했지만 부스럭거리며 텐트 옆을 지나 천왕봉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인기척 때문에 더는 잘 수 없었다. 우리도 늦을세라 후다닥 일어나 천왕봉으로 향했다.
가파른 길을 올라 통천문 앞에 섰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여서 통천문을 지나갈 때는 끝없이 올라가야 할 것 같은 아찔함을 조금 느꼈다. 시선 너머에서 아득하게 추락할 것을 알고 있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잠깐의 어지럼증을 뒤로하고 우리는 천왕봉 정상에 섰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짙은 구름은 가시지 않았고 비 같은 것을 얼굴에 맞으며 이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운해랄 것도 없이 구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련한 기다림 끝에 결국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야 했다.

천왕봉 일출은 3대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다 할 선을 행하지도 않았으면서 단지 한 번의 산행에 너무 큰 것을 바랐나 보다. 발밑에 깔린 봉우리들의 실루엣이라도 보았다면 좋았으련만 우리는 공덕 찌끄래기 근처에도 가까이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백무동 계곡 반대편, 중산 쪽으로 내려오면서 우리의 1차 지리산 여행은 끝났다.

2차 산행은 총 5명이 시작하였다. 그중 한 명은 선배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노고단까지 함께 차를 타고 오른 후 그 형은 뱀사골까지만 함께했다. 그곳에서 개인적인 일을 핑계 삼아 내려가셨다. 뱀사골 능선의 악명을 익히 들었나 보다. 지리산을 잘 아는 형이다. 세석평전에서 굴러떨어진 후배를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산행 이틀째 무사히 장터목에 도착했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고 배낭에 남아있던 팩 소주들을 모두 풀어헤쳤다. 가지고 내려갈 수는 없었으니까. 맑은 공기와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남김없이 먹고 새벽 산행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단지, 조금 늦게 잠들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사람들의 인기척에 잠이 깼다. 셋 모두 잠에서는 깼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서로 "올라갈까?", "너라도 가", "형은 안 가요?", "가 봐야 일출도 못 볼 텐데." "천천히 올라가지 뭐" 등등의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오전 9시가 지나서였다. 땀이 흐를 정도로 더워서 더 잘 수 없었다.
텐트를 열고 나오자 소나무 잎사귀 사이로 구슬처럼 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하산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엿들었다. "일출 진짜 장난 아니다." "이런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류의 대화들이었다.
우리는 천왕봉에 오르지도 않았다. 숙취는 평소보다 덜 해도 기운 빠지는 것까지 산신령이 도와주지는 못했다. 공덕은 역시 1년 만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선배가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보자"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의 하산은 백무동 계곡 쪽으로 정해졌다.

완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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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쯤 다시한번 도전해 보시죠^^ 이 글 쓴 공덕으로 가을쯤에는 천왕봉 일출을 맞을지도 모르죠^^

지금 올라가면 아마 살아서는 못 내려올 듯...
저질체력이 돼 버려서요..ㅠㅠ

어쩐지 느낌있는 끝맺음입니다!
완전 끝
이라고 쓰여 있으니 좀 서운한 느낌도 들고요...ㅎㅎ

쓸거리를 또 찾아야 하니 저도 좀 서운합니다..^^;;

천왕봉에서 일출은 결국 못 보셨네요.
3대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니 한 번 보고 싶은데요 ㅎ

저도 보고싶었습니다..ㅠㅠ
술이 웬수...ㅋ

이렇게 글을 완성했으니 공덕을 제대로 쌓으셨네요.

다음에 가면 일출을 볼 수 있을 듯ㅎ

햐,, 공덕 쌓은 건가요..
근데 이제 힘들어서 못 올라감..ㅠㅠ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멋진 일출을 바로 코앞에서 늦잠자느라(?) 못 보시다니...
공덕이 아니라 원한이 쌓이는 이야긴 걸요??^^

ㅋㅋ원한이 쌓였을 수도....
그때 못봤고 앞으로도 볼 계획은 없으니 안타깝긴 합니다.
젊음의 실수죠...ㅎㅎ

글 잘보고 갑니다.

주말에 다시 보고싶네요

고맙습니다.
어디 숨겨 놓지는 안을게요..ㅎㅎ

지리산 등반을 한적이없어서.. 한번쯤해보고 싶네요.

기회가 되신다면 적극 추천합니다..ㅎㅎ

나만 스클롤바가 잘 안 움직이나...
노트북 스크롤바가 잘 안움직여요...ㅠ

결국 술이..천왕봉 일출을 먹었군요..ㅋㅋㅋㅋ

네 그렇습니다. ㅋㅋ
술만 아니었어도 볼 수 있었는데...

겨울에 지리산 종주를 할 때에 장터목에서 잠을 자고 천왕봉 일출 보러 간다고 갔다가 다 가지도 못하고 일출 본 기억이 있네요. 참 멋졌는데...

통천문도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통천문에서 찍은 사진이 아직도 어디에 있을텐데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간만에 기억이 새록새록 입니다.

그래도 일출을 보셨군요.. 역시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ㅎㅎ
말린사과님의 기억을 소환시키다니 기분인 좋네요...

운이 좋았죠. 기억에 벌겋게 올라온 것 같지는 않고, 구름에 가린채 보기는 본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ㅋㅋ

역시 잠은 늦잠을 자야 맛이죠.^^

늦잠이 큰 기회를 날렸지만 그것도 젊음의 특권 아니겠습니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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