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여행

in #busy6 years ago (edited)

잊을 수 없는 그 맛먼저 보시면 아무래도 도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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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를 지나친 건 실수였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린 후 곧장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로에 들어섰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절간, 들여다봐야 그저 그런 석탑과 부처님밖에 더 있으랴. 아침나절에 인파도 많아서 발길에 치이며 절 구경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2박 3일 일정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제때 하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후 지금까지 화엄사에 가본 적 없으니, 잠시 머무르기라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등반 중 최고의 난코스였다. 계곡 밑에서 정상까지 일직선으로 오르는 길이니 어련하겠냐만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길은 내 숨도 가파르게 만들었다. 오기가 생기게끔 디자인된 길이다.
한동안은 나무에 가려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어오르다 보니 한 두 번 씩 수다스러운 산 밑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노고단에 가까워지자 이제 정 뗄 때가 되었다는 듯 마을의 조감도를 실컷 보여주었다. 하늘에 가까이 가는 것을 체감할 정도로 우리는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산의 끝자락은 볼 때마다 뒤로 물러나 있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어느 바위 밑으로 숨어들어서 나뭇잎 부비는 바람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남았을 때 정상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즈음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쭈쭈바와 차가운 물을 파는 아저씨 옆을 지나쳤다.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고 좁은 등산로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피해가야 했다. 매우 가파른 길을 오른 직후였다.

의문 1.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곳에서 팔아야 잘 팔릴 텐데 왜 여기 선 채로 장사를 하는 걸까. 저것을 사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보면 관성에 젖은 발걸음은 이미 한참을 지나 있을 텐데 말이다.
의문 2. 저 무거운 것을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왔을까. 언뜻 보니 얼음까지 채워져 있는 것 같은데.
의문 3. 설마 이 길을 매일 오르는 걸까.
의문의 이 사나이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당시 '내일은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젊은이들 사이에 무척 유행했다. 그중에 등산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몇 시간을 올라가 정상에 섰지만, 자동차가 휙 지나가는 장면이 연기자들의 표정과 어우러져 허무한 웃음을 선사한 내용이다.
우리가 그랬다. 노고단을 차로 오를 수 있다는 얘기는 어렴풋하게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면전에 대고 지나갈지는 몰랐다. 아스팔트가 가파른 등산로를 갑자기 끊었다. 굴 밖으로 나오는 두더지처럼 고개를 빼꼼히 내밀면 눈높이에서 자동차 바퀴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내일은 사랑의 한 장면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그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혼성그룹이고 우리는 팀웍 좋은 단일팀이라는 것.

쭈쭈바와 물을 팔던 아저씨는 분명 여기부터 내려갔을 것이다. 아주 가파른 경사를 아이스박스를 들고 올라갔다는 주장보다는 내려가지 않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그리고 도로부터 그곳까지의 거리는 올라오는 거리보다 훨씬 짧았다.

우리는, 다시 온다면 반드시 노고단까지는 차를 타고 오르리라 다짐했고 이듬해 다시 왔다. 그래서 두 번째 종주는 약간 여유 있는 2박 3일 일정이었다. 1차와 2차 멤버가 바뀌긴 했어도 송어 은어를 함께 먹은 나와 두 선배는 붙박이였다.

지리산 여행을 포스팅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참 동안 기억을 정리해 보니 난감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첫째는 1차와 2차 종주의 기억이 뒤죽박죽이라는 것.
둘째는 몇 가지 잔상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
그래서 할 수 없었다. 막 섞어서 쓰고 한 번의 여행인 척하는 수 밖에. 꼭 필요해서 확연하게 구분이 가능한 경우만 1차와 2차를 나누기로 했다. 또 한가지, 터무니없이 적은 양은 상상력을 조금 동원하기로 했다. 같은 사실이라면 그때의 나, 지금의 나, 그다지 다른 느낌은 아니리라. 사실적인 부분은 그대로 사실을 적시하고 그 느낌과 감상은 조금 덧붙일 수도 있다.

이제 노고단까지 남은 길은 산책로와 다름없었다. 포장길 따라가는 것이라 오히려 지루했다.
노고단 정상에서 반야봉과 천왕봉 쪽을 보았다. 내 작은 한 걸음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저기 도착할 수 있을까. 까마득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이제는 능선일 뿐이다. 계곡 밑에서부터 올라와야 하는 수고는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착각이었지만.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로 발을 옮겨 우리는 고즈넉한 오솔길에 들어섰다. 오솔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갔다. 바위를 넘어가거나 푹 패인 골짝을 지나갈 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산길이 아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하며 지나갔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인사가 처음에는 얼떨떨했어도 산 사람들의 친근함이려니 생각했다. 이내 우리도 먼저 인사를 건네며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그랬다면 곱지 않은 시선에 꽤 시달렸을 것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 중 가장 편한 코스를 걸으며 우리는 지리산을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능선이라고 해서 평탄한 길이 아니고 수많은 봉우리를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 봉우리들이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반대쪽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평온할 수 없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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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종주 3편 다봤습니다.

요즘은 님처럼 글잘쓰시는 분이 제일 부럽습니다 ㅋ

잘봤습니다.

잘 봐 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ㅎㅎ

노고단을 수도 없이 올랐던 대학시절이 기억납니다. 차로 오를 수 있었어도 한 번도 차로 가본적이 없네요. 내일은 사랑... 이라는 드라마는 기억이 나는데 전혀 기억이 안나서 찾아보니 이병헌 고소영이 나왔던 드라마군요. 안 본듯ㅋㅋ 저도 등산을 아주 좋아하는데 이곳에 오니 등산을 못하는게 아쉬워요. 왕왕 어디어디를 가신다는 분들이 계시긴 한데 더워서 엄두도 안나네여. 그 쭈쭈바 파는 분께 다음에는 직접 물어봐 주세요 어떻게ㅜ오르시는지 그리고 매일 오르시는지... 저도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ㅎㅎ

북키퍼님 성격으로는 노고단을 차타고 오를려면 왜 가니,, 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네요..제가 등산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데 지리산은 저 같은 사람도 반할 정도니 등산 좋아하시는 분들은 거의 성지가 아닐까 해요..ㅎㅎ
필리핀에도 산은 있을텐데,,,, 혹시 반군 땜시?? 지금은 두테루테 형님이 거의 판정리 한 것 같기도... 물론 그 동네 산을 오른다고 해서 노고단의 운해 만큼의 감동은 없겠죠?? 지금이야 다시 가라고 하면 못 간다고 하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세상을 배워가며 내가 가장 빛날 수 있었던 시기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ㅎㅎ

산은 많은데 너무 더워요ㅜㅜ

화대종주는 딱 1번 해봤습니다. 2년전제 몸상태가 최상이었을 땝니다. sadmt님 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합니다. 미소도 지어집니다. 2부 기다립니다.

2년 전이면 바로 얼마 전 이네요.. 기억에 왜곡이 생겨 엄한 얘기 하면 클나겠는데요..ㅎㅎ
그래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그다지 다르지 않을거에요.. 지리산 종주는 좀 감동이 있죠..

대학생 시절 절친 한 명과 노고단에서 일출을 보던 때가 생각나네요. 운해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는데, 제가 갔을 때는 그 운해를 보지 못해서 섭섭했던 것도 떠오릅니다^^

노고단 운해가 지리산 8경 중 하나라네요.. 노고단에서 천왕봉 쪽을 보면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죠..

지리산 종주 경험이 재미있어 보이네요.
전 지리산 몇 번 가보긴 했지만, 아직 지리산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어서 더 흥미롭네요 ㅎ
언젠가는 하는 날이 오겠죠;;

지리산은 너무 넓어서 아무 쪽으로나 올라도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계곡은 또 좀 깊습니까.. 꼭 올라야 맛인가요.. 재미있게 놀면 그게 장땡이죠..ㅎㅎ

지리산 종주를 꿈꾸어 보기는 했지만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죠. 앞으로도 계획이 없구요. 지리산을 몇번 가보긴 했지만 너무 힘들어 종주는 언감생심 ..이제는 편안히 단풍놀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가끔갔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아집니다. 1부가 끝나면 중간광고라도 하나 있어야 제격이죠..

중간광고..ㅋㅋㅋ 광고하면 아무도 안볼텐데요...ㅎㅎㅎㅎ
저도 지금 그런식으로 가라고 하면 단연코 안 갑니다. 죽을 일 있습니까...ㅋ
계곡에 발이나 담그거나 못 봤던 화엄사님께 인사나 드려야죠...

지리산 종주를 여름에 2번 겨울에 1번 했었는데, 이제 저도 뒤죽박죽인 기억뿐입니다. 정리를 하라고 해도 못 하겠고, 지명이 무엇인지도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하산 할 때에 화엄사를 들린 기억이 얼핏 납니다. 화엄사에 가까워지니 넓직한 돌들로 만든 계단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이제 다시 하라고 하면 미친짓 같아서...

2부 기다립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미친 짓 맞습니다...ㅎㅎ
저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하셨네요.. 천왕봉이 높으니까, 사실은 천왕봉에서 화엄사 방향으로 오는 게 맞죠...ㅎ
그런데 저는 두번 모두 화엄사 방향에서 출발했습니다. 이유는 관성의 법칙???
저도 두 번이면 많이 한건데 세 번이나 하셨다니,, 그것도 겨울에도 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ㅎㅎ 지리산이 그 정도로 멋진 산이긴 합니다.

어릴 때 부모님따라서 여기저기 엄청 다녀서 노고단도 분명히 갔었는데 머리속에 '저기가 노고단이다!' 떠오르지 않네요. ㅎㅎㅎ
'헉 여기서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팔지?'를 생각했던 기억은 노고단인지 모르겠지만 남아있네요. ㅎㅎ
나중에 저녁식사 맛있게 하시고 이번 주도 화이팅하셔요!

벌써 수요일 밤이네요..ㅋ 씬님도 남은 한 주 화이팅 하십시오..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나 심지어 막걸리와 소주까지, 산 꼭대기에서 파는 사람들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어느 산인가 정상에서 막걸리를 천막을 쳐놓고 대량으로 팔길래 구름 낀 산 정상 바위위에서 신선처럼 몇 잔 걸친적이 있습니다. 한 잔에 천원!!! 그래도 운치 있더군요...ㅎㅎ

그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혼성그룹이고 우리는 팀웍 좋은 단일팀이라는 것.

이부분... 왜이리 씁쓸해보일까요?;

아 바로님!!! 꼭 그런거만 보셔야겠습니꽈!!!
사실 바로님 보시라고 그렇게 쓴겁니다. 물론 사실이지만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죄송해요.... 이상하게 제눈에는 이런것만 ㅠㅠ

이 글보다가 생각났다
노고단 깔딱고개 ㅋ

요즘은 등짐꾼 보기가 어렵겠지요?
아마도 드론으로 나르지 않을까.

노고단 깔딱고개면 그 포장도로 나오기 직전을 얘기하는 건가요??
잘 모르겠지만 지리산 뿐 아니라 유명세 좀 탄다 하는 산에는 항상 등짐꾼이 있었죠...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들!!! 셀파라고나 할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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