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여행2

in #busy6 years ago

잊을 수 없는 그 맛
지리산 여행1
DOOR3 - 복사본.png

등산을 즐겨 하지는 않는다. 정상에서 느끼는, 벅차게 치밀어 오르는 호연지기를 싫어하지 않지만, 주동적으로 산행을 밀어붙일 정도는 아니다. 설악산, 태백산, 내장산, 속리산 등등 들어만 봐도 아는 산들의 정상에 내가 꽂은 깃발은 없다. 계곡 끝자락 어디쯤에서 발 냄새나 풍겨 보았을 뿐이다.
아무 데서나 잘 잔다. 그러나 텐트 치고 야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잠이 문제가 아니라 꼼지락거리며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것을 싫어한다. 야영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각종 소도구도 걸리적거릴뿐더러 텐트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일의 그 부산스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리산을 두 번이나 찾은 이유는,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풍경이 각기 다른 독특한 울림과 색깔을 보여주고, 그것 하나하나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고귀한 형용사들의 진열장이었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길을 가다 보면 어느새 개활지 같은 곳을 지나고 있었고 이것은 다시 숲길로 이어졌다. 지리산은 제 너른 품을 잠깐 보여주었다가 바위투성이 길로 인도하기도 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 방향을 보면 능선이 활시위처럼 휘어져 있고 그 안에 바다가 있다. 높낮이가 다른 봉우리들이 파도친다. 파도에서 부서진 하얀 거품은 흩어질 줄 모르고 초록색 수묵화 위에 여백을 만든다. 지리산 어느 이름 모를 봉우리들의 꼭대기에서는 이런 산의 바다를 곧잘 볼 수 있다.

지리산의 키워드는 "느닷없이"이다. 코스요리로 준비되어 있어 하나씩 맛보지만 다음 순서를 예측할 수 없다. 나 자신 산의 바다를 완성하는 아주 작은 퍼즐이었다가 눈을 뜨면 소나무와 상수리 가득한 길을 걷고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잇길에는 낭떠러지가 곳곳에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게 중에는 발을 헛디디면 황천행 에어버스를 티켓도 없이 무료로 탑승할 수 있는 게이트웨이가 간간이 있다. 형제 바위의 뒤편 경사진 곳이 그런 게이트웨이 중 하나였다. 형제 바위는 이름 그대로 크고 작은 두 개의 우뚝 솟은 바위이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면 큰 바위의 뒤편을 돌아서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 그 뒤편은 대패로 깎아 놓은 듯 반듯하고 평평한 경사면이다. 경사면을 가로질러 가서 돌 틈 사이 홈을 한두 번 밟고 오르면 바위의 정상이다. 만약 경사면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면 그 끝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의 머리채를 꼭 붙잡아야 한다. 그 날 바위 위에는 희뿌연 구름만 지나갈 뿐이었다.

거의 수직으로 뻗어 있어 이것이 등산로인지 긴가민가했던 뱀사골 능선을 지나 형제 바위를 오른 후 세석평전에 도착한 것 같다. '틀리면 말고' 식이지만 순서의 착각일 뿐이니 틀리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큰 나무들이 사라지고 대관령 구릉처럼 생긴 산등성이를 키작은 철쭉이 점령하고 있었다. 반지의 제왕을 본 다음이었다면 호빗의 마을이 이렇게 생겼을 것으로 생각했을 테지만 그 당시 마법의 세계는 자본과 CG의 부름을 아직 받지 못했다. 철 지난 철쭉의 진분홍은 여전히 들을 메우고 있었다. 햇볕은 세석평전 전체를 비추었고 깡똥한 그림자들이 철쭉 사이마다 들어찼다. 개선장군의 기분으로 철쭉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 보는 평탄한 길에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 것 같다.

세석평전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흐려졌다. 높고 깊은 산일수록 날씨의 변덕은 일상이다. 스코틀랜드의 한 장면을 옮겨 놓아서 을씨년스러운 언덕길을 오르는데 때마침 구름까지 침입하여 우리는 하이랜더가 되었다. 산에서 만나는 구름은 안개와는 다르다. 구름 속 빗방울들은 정지해 있고 짙은 구름일수록 머리카락에도 짙은 물방울이 생긴다. 구름의 결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어느 길에서는 쉼 없이 산을 타고 넘는 구름 뭉치를 볼 수 있었다. 구름이 산을 넘어와 흩어지는 모습은 담배 연기를 물레방아 하는 것과 비슷하다.

1차 종주에서의 1박은 뱀사골이었고 2차 종주에서는 벽소령까지 가서 1박을 하였다. 벽소령을 1박 장소로 정한 이유는 벽소명월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8경 중 하나로 불리며 달 뜨는 밤에 그 속살을 보여준다. 우리는 무리하게 행군하여서 해가 지고 나서야 벽소령에 도착했다. 그곳은 양쪽 두 개의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어 만든 아늑한 공간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가벼운 소주 한잔하는데 산의 바다에는 이미 달이 떠 있었다. 산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명징한 산줄기들이 달빛 아래 몇 겹이나 겹쳐 있었다. 야간 산행하는 사람의 걸음 소리가 멀리서도 들리는 밤이었다. 산과 같은 모양새로 앉아서 달구경을 하였다. 감청빛 하늘에 더 짙은 색으로 그어진 선이 있고 그 아래를 흐르고 있는 산줄기에는 달빛이 실려 있었다.

2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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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3부도 있는거여요? 얏호! ㅎㅎㅎ
개활지라는 단어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진짜 어휘력이 풍부함을 느낍니다. 저는 점점 한국어가 딸려서 ㅠㅠ 위험천만함을 즐기시는 유피님은 아마도 어벤져스의 기질이 있나 봅니다.
이부분은 훔쳐가고 싶을만큼 갖고 싶네요. 아! 진짜 훔치고 싶다 ㅋㅋㅋㅋㅋ

철 지난 철쭉의 진분홍은 여전히 들을 메우고 있었다. 햇볕은 세석평전 전체를 비추었고 깡똥한 그림자들이 철쭉 사이마다 들어찼다. 개선장군의 기분으로 철쭉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 보는 평탄한 길에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 것 같다.
세석평전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흐려졌다. 높고 깊은 산일수록 날씨의 변덕은 일상이다. 스코틀랜드의 한 장면을 옮겨 놓아서 을씨년스러운 언덕길을 오르는데 때마침 구름까지 침입하여 우리는 하이랜더가 되었다.

아,, 지금은 절대, 절대로 위험한 짓 안하구요,, 돌다리 세 번 이상 두드리고 건넙니다.ㅋ
혹 필요하시면 가져가셔도 완전 무방합니다만, 전 제시카님 글이 주는 친근함과 심리상태의 구체적인 묘사가 더 탐납니다요...ㅎㅎ

키약, 벽소령에서 달 보며 한잔하고 싶네요. 3부 기다립니다..

지금이야 많이 변했겠지만 그때는 참 고즈넉했습니다..

형제 바위, 뱀사골 이야기는 들었는데, 길이 많이 험한가봐요
저도 지리산 경험이 있으면 좋았을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뱀사골 능선에서 천왕봉 쪽으로 가는 봉우리는 밧줄없이 못 올라가는 길입니다...
넘 힘들....

ㅎㄷㄷ 저는 아빠가 지리산 다녀온 얘기만.. 제 어릴 적 기억은 추성 마을에서 백숙 먹은 기억 밖에 없네요. ㅋ

지리산 가보고 싶네요.
잠은 어떻게 주무실까요?
침낭에서만?

텐트에서 침낭 안에 들어가 잤습니다.
지리산,, 가 볼만한 산임에 분명합니다.

지리산 꼭 가보렵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라 머리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어찌 상상하실지 궁금하네요..ㅎㅎ
그림으로 보여주세요..^^


유니콘님...마지막 문단이 참 좋아요
몇 번이나 읽었답니다
군대이야기는 이제 잊혀지려 해요ㅎㅎ

헉 군대이야기를 아직...ㅋ.. 아 우리 웹툰하기로 했었죠..ㅋ
재미나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도라님 밖에 없습니다...ㅎㅎ

글을 읽다보니 너무나 절경이었을 지리산이 그리워집니다.
@sadmt님~~ 사진 없습니까? 사진도 투척해주세요~~
너무 보고 싶어요, 지리산의 모습이..^^

사진이 있더라구요.. 혹시나해서 앨범을 들췄더니 그 당시 사진이 똭... 하다못해 송어, 은어 먹던 사진도 똭...
지리산 풍경은 없고 인물만 있다는 게 함정입니다.. 혹시 모르니 핸폰으로 다시 찍어서 함 올려볼까 생각도 해보고 있습니다.

기다려봐야겠네요^^

와..
대단합니다
지리산 산행을 직접 걸어보신 추억이 멋지군요..
젊었을때 멋진 추억 같습니다
표현도 정말 좋습니다^^*

저에게는 참 멋지고 소중한 추억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안 할겁니다..ㅎㅎ

지리산은 말이 필요없는 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올라가볼 만한 산 ㅋ

그렇죠.. 말이 필요없는 산이 맞습니다..
가서 봐야 그 진실을 체험할 수 있죠..ㅎ

표현을 참으로 맛깔나게 해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벽소명월에서 보셨을 밝은 달빛이 다가오는 것 같아요.

사실 그때는 보면서도 그냥 달빛이 좋구나 했는데요... 지나고 나서는 지리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달빛이 정말 고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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