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납량특집 - 산사람 4

in #bus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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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무런 실체도 보여주지 않는 어떤 존재와의 싸움이었다. 어쩌면 존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존재는 지한 자신이었으니까. 지한 자신이 둘일 수는 없으므로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욕망과 의지의 싸움이라고 손쉽게 정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정의하자니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돼버렸다. 실존을 넘어서는 의지를 보여준 인물은 석가, 예수, 피타고라스 빼고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욕망과 의지의 싸움이라고 해도 문제는 있었다. 실존하는 어떤 것이 자신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지한은 보이지 않는 실체, 점점 확연해지는 욕망에 맞서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한은 선지를 사기 위해 외출할 때를 빼고는 몇 달째 두문불출하는 중이었다. 노주를 한 번 만나기는 했다. 다행스럽게 이별을 통보해 주어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외출할 필요가 없어졌다.
갈증의 주기는 너무 빨리 찾아왔다. 갈증은 목구멍에 꽂는 바늘과 같았다. 갈증이 심해질수록 바늘의 개수도 증가했다. 지한은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죽음을 선택한다는 건 아직 인간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지만, 인간의 외피만 둘렀을 뿐 지한 자신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죽기 위해 갈증을 참았다. 목구멍에 꽂힌 바늘이 빈틈없이 촘촘해져도 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다 보면 죽을 줄 알았다. 끝이 보이는 터널에 들어섰다. 터널 끝의 빛에 도착하면 고통은 끝나고 빛 속에 부서질 것이다. 지한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터널의 끝으로 숨차게 뛰어가고 있었다. 샤워기를 틀어 정수리에 찬물을 쏟아부었다. 고통에 찬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노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환영이라도 보고 싶어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하얀 피부에 진홍색 눈빛을 가진 괴물이 지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지한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선지를 담아두었던 플라스틱병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실체를 마주했다. 그러나 지한은 자신의 내면에 들어앉은 그 흉측한 얼굴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던 그 실체였다. 막강한 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오합지졸처럼 물러서기만을 반복하게 했던 그 실체였다. 지한은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고개를 푹 숙인 지한은 현장감식 나온 범죄자의 모습이었다. 플랫폼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그를 무의식적으로 피했고 그것은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과 그를 가르는 투명한 벽이 냄새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지한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고유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었고 그들의 고유한 냄새는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냄새만으로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도 있었다. 감정의 색깔은 즉각 땀구멍과 숨구멍으로 배출되어 지한의 후각에 사로잡혔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그 모든 냄새는 지한을 역겹게 만들었다. 오직 두려움의 냄새만이 달콤했다. 두려움이 심해질수록 황홀할 정도로 달콤한 향을 토해냈다.
무작정 나선 길이었지만 지한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속삭임도 아니었고 그를 끌어당기는 페로몬도 아니었고 편두통을 일으키는 머릿속의 나침반도 아니었다. 모든 감각이 버무려진 더듬이 같은 것이었다. 지한은 회귀 어류의 귀향길처럼 발 끝에 몸을 맡겼다. 자석 같은 끌림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느슨하게나마 그를 묶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기로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끌림의 정체를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지한은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의 달콤한 냄새를 참지 못해 그 냄새의 근원을 쏘아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문득 놀라 차창 밖으로 여러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초여름을 지나는 태양 아래 소름 끼치도록 푸른 들녘이 생명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지한이 탄 기차는 지리산 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전화할 땐 더럽게 안 받더니.

할 말이 있어서.

뭔데? 그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오랜만에 술 한잔해야지.

아니야, 그냥 전화로 얘기할게.

왜 그래! 나한테 삐졌냐? 얼마 있으면 한동안 너 볼 일도 없어. 노주 씨랑 깨가 쏟아지나 봐. 친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나 시골 가서 살려고. 너한테는 얘기해야 할 거 같아서.

시골? 어디, 너희 본가?

아니, 지리산.

지리산? 도 닦으러?

도는 무슨. 거기 살만한 집이 있어.

농사도 안 지어본 놈이 산에 가서 뭐 하려고? 노주씨는 알아?

가서 살다 보면 뭐든 되겠지. 노주랑은 헤어졌어.

헤어졌어? 그러고 나한테 연락도 안 한 거야? 네가 친구냐!

미안해. 그렇게 됐어.

언제 내려가는데.

내일.

내가 쇠귀에 대고 경을 읽는 게 오히려 속 편하겠다. 차는.

없어. 팔았잖아. 기차 타고 가려고.

나쁜 새끼. 낼 월차 낼 테니까 내 차 타고 가자.

아니야. 그냥 안부 인사나 하려고 전화 한거야.

시끄럽고. 영영 안 보려면 몰래 가든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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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숨는군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네요

넘 억지 춘향 아닌지 몰겠네요..ㅎㅎ

ㅎㅎ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화이팅!!

그 어떤 존재는 제가 아니었는데...지한과 터널을 함께 걷는 심정으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ㅎㅎㅎ

ㅋㅋ 어쩐지 쓰면서도 낯익다 했슴다.

으아~ 대략 몇 회 분량인지 알 수 있을까요?
완결되면 한 번에 쭉 읽으려고 대기중입니다.ㅎㅎ

앗, 고맙습니다. 1부는 5회면(다음편) 끝나는데요.. 시점이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일단 정리부터 할려구요.ㅎㅎ
2부는 지금 초반 쓰는 중이라 잘 모르겠어요. 대충 1부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벤트 참여 감사합니다ㅎㅎ
보팅 꾹 누르구 가용~^^

고맙습니다. 수고하셔용...

왜 뱀파이어가 되었는지는 2부에서 나오려나 보네요.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담편에 1부 끝나고 2부에 그 얘기가 들어갑니다.

지한이 변하게 한 곳이 지리산 이니 다시 지리산으로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언제까지나 선지만 먹고 살수가 없을 것 같은데
지리산 동물들 잡아서 먹을수도 있을듯~

지한이 지리산에서 변한 건 아니지만 그곳에 중요한 단서가 있긴 합니다.

속세(피냄새)와 담을 쌓으러 지리산으로 숨는 건가요?
청학동이 위험하겠는데요......

헉,,, 청학동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요... 대피하라고 알려야겠네요...

아...김봉곤 훈장님....ㅠㅠ

머리 나쁜 저같은 사람을 위해
연재 앞부분에
간단히 한두 줄로 줄거리를 넣어주심이 ㅎ

시점이 넘 왔다갔다 하다보니 제가 봐도 쉽게 알아 듣지 못할거 같아요.
엎질러진 물이니 여기서 최대한 부드럽게 마무리해야죠..ㅠㅠ

헐..
뱀파가 지리산 가서..
어케살라고...ㅋㅋㅋㅋ

너무 막 죽여대면 호러물이 될 듯하여..ㅋㅋ

지한 지리산 영험한 산신령께 병다고처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요 지한 ~~~~^^

믿을 건 산신령 뿐이겠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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