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납량특집 - 산사람 2

in #bus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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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이는 그를 흘깃 훑어보았다. 예전에도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산 생활의 영향이라고 단정했다. 지한의 손은 물컵 앞에서 떨고 있었고 이마의 식은땀이 식탁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한은 악몽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얼떨결에 대답했다.

으응, 그래.

그러나 콩 비린내를 코앞에서 들이마시자 지한은 견딜 수 없었다. 콩국수 그릇 한가운데서 갑자기 붉은 물결이 일었다. 곧이어 국물 전체가 진홍색으로 물들었고 칼날에 갓 베인 상처처럼 유백색 면발이 떠다녔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지한이 붙잡은 마지막 의지였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이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지한은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국수 한 젓가락을 뜨던 단이는 지한의 눈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밀쳤다.

너,너,왜그래!

지한의 눈에서 붉은 물결이 일더니 이내 흰자위를 진홍색으로 물들였다. 눈동자는 짙은 어둠을 모아 놓은 듯한 깊은 검정빛이었다. 그 눈빛은 두려움을 원하고 있었다. 원초적 두려움이 무엇인지 일깨우는 눈빛이었다.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고 새파란 입술 사이에서는 피부보다 하얀 이가 뾰족하게 올라왔다. 지한은 괴로운 듯 식탁을 긁었다. 순식간에 자라난 강인한 손톱이 끼익 거리며 식탁을 지나갔다. 빙하가 지나간 자리처럼 식탁에는 다섯 개의 선명한 계곡이 만들어졌다. 단이 뿐 아니라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지한을 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원초적인 공포와 대면한 그들은 포식자 앞에서 생을 포기한 먹이사슬의 하위 그룹이었다.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세한 떨림조차 포식자는 알아챌 것만 같았다.
고통이 멈춘 지한은 황홀한 두려움의 냄새를 깊이 들이켰다. 인간의 두려움이 풍기는 냄새는 그에게 가장 달콤한 에피타이저다. 토할 것 같던 역겨움은 갈증보다 참기 힘든 식욕으로 바뀌었다. 단이는 지한의 변신을 보고서도 도망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눈을 부릅뜬 채, 이륙하는 경비행기처럼 덜덜 떨리는 무릎을 가녀린 손으로 꽉 붙잡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지한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단이의 눈을 보았다. 놀라움과 헤아리기 어려운 두려움이 단이를 점령하고 있었다. 지한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을 훌쩍 뛰어넘어 단이의 목을 덮쳤다. 지한의 이빨은 펄떡거리는 단이의 경동맥을 정확히 찔렀다.

노주의 실루엣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끌며 앞에 보이는 귀신의 집으로 가자고 재촉한다. 둘은 작은 놀이동산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의 1인칭 시점에 비치는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만, 얼굴은 지우개로 지운 듯 뿌옇다. 그렇다고 그녀를 못 알아보지는 않는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을 겪었던 그 날 이전으로, 그러니까 온전한 인간이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슬픔이 꿈에서도 그를 괴롭힌다. 노주의 웃음소리가 옅어질수록 그의 슬픔은 커진다. 꿈속의 지한은 이것이 꿈임을 알고 있다. 꿈을 꿀 때마다 노주와 함께했던 장소들이 소환되지만, 그녀의 모습은 조금씩 흐릿해진다. 지한은 꿈에서라도 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길 바란다.
귀신의 집으로 들어간 지한은 노주를 잃어버리고 혼자서 미로를 헤매고 있다. 두려움과 갈증이 걸음을 재촉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어둠을 헤쳐가다가 멀리 하얀 빛을 발견한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있는 힘을 다해 빛을 향해 뛰어간다. 그 하얀 빛도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빛은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있을 때쯤 불쑥 지한 앞으로 다가온다. 빛 덩이 안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든다. 하얗고 긴 머리카락 사이로 새하얗게 변한 노주가 그에게 미소짓고 있다.

지한은 노주에게서 도망치다가 잠에서 깼다. 식은땀은 꿈에서와 똑같이 지한의 이마를 흐르고 있었다. 인간의 의식을 잃을 때마다 여친이었던 노주의 꿈을 꾸었다. 한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었고 그녀의 취향에 맞는 영화만 보았다. 함께 했던 시간보다 함께 할 시간이 더 길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지한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눈에 후회와 자책이 스쳤다. 유일한 친구였던 단이를 잃었다. 아니 그의 손으로 죽였다. 그러나 두려움에 중독된 인간의 피는 언제나 강렬한 경험을 선사했다. 피를 마시자 갈증이 단숨에 해소되었다.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콩국수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리라. 날 듯이 돌아와 잠이 들었으리라.
피를 마시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지한의 인간으로서의 성질도 사라졌다. 노주의 흔적이 흐릿해지다가 영영 부서져 없어지고 창백한 얼굴에 눈빛이 형형한 그녀의 영혼만이 꿈속의 그를 쫓아 오게 되는 날, 그는 더는 인간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지한은 갈증이 찾아올 때마다 피를 마셔야 했다. 갈증이 극심한 고통처럼 깊어지면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피를 더 자주 마시게 되면서 후회와 자책의 시간은 그만큼 짧아졌다.
인간의 피는 뱀파이어에게 최고의 환각제이다. 지한은 주체할 수 없는 쾌락에 빠져 천장을 몽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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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물냉과 콩국수를 맛있게 먹었는데ㅋㅋ 뱀파이어였군요... 흐흐흐 다음 편 기대합니다.ㅋㅋ

미리 드셔서 다행입니다.ㅎㅎ
대기순번 1번이네요.. 2번은 없어요..ㅠㅠ

헐..
그럼 지한이 뱀파이어...?
세상에...ㅎㅎㅎ

어느날 갑자기 피를 빨게 됐다는..

1편의 궁금중을 2편에서 해결하나요?
선 댓글 .....2편 감상문은 3편에^^

ㅋㅋ 이것도 신선해요. 댓글을 킵하는 느낌..

무서운 거 맞는 것 같은데요..?!
ㅠㅠ
유니콘님 댓글 믿고 밤 중에 봤잖아요!

전 아무리 봐도 안무서워서...
담편부턴 진짜 안 무셔요...

헉.
뱀파이어? 단이는...ㅠㅠ

단이는.... 엑스트라였다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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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탄식...ㅠ

뱀파이어???

단이가 불쌍해~~~ㅎㅎㅎ

하나도 안 불쌍한 표정인데요...ㅎㅎㅎ

지한이가 뱀파이어였군요
시원하게 콩국수 먹으려던 사람들까지 모두다 ㄷㄷ

시원하게 다 영면하셨습니다..

이거 저는 슬슬 재미저요 ㅋㅋ
와 지한이 뱀파이어 멋저부려 괜찬아요 ㅎㅎㅎ

고맙습니당.. 쓰는 스타일이 좀 눅눅해서 걱정이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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