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납량특집 - 산사람 3

in #busy6 years ago

DOOR2.png

3년 전 지한을 지리산의 깊은 산 중으로 인도한 건 알 수 없는 끌림이었다. 수백 년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었을 법한 처녀림 속에 이런 고택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햇살이라고는 좁쌀만큼도 들지 않는, 산 중턱의 움푹 들어간 곳이었다. 가파른 계곡물이 돌에 부딪혀 아우성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등산로는 먼 곳에 있었다.

처음 찾아가는 길, 맹수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곳을 오르면서 지한의 의식은 의심의 질곡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의심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손으로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다 보면 깊어지고 있는 갈증의 원류를 찾을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찾게 될 거라고 지한은 확신하고 있었다.
지한이 무엇인가에 끌려 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산을 넘은 후였다.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떼어 낸 소박한 인간의 영역을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앞마당과 뒤뜰에는 키 작은 잡풀이 듬성듬성할 뿐이었다. 불을 피운 흔적은 없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 같았다. 얇게 앉은 먼지만 털어내면 당장이라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집주인이 곧 쳐들어온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지한은 소파에 덮어놓은 비닐을 쓸어 내리고 피곤한 몸을 뉘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었는지 늦은 아침에야 눈을 떴다. 오랜만에 가져본 단잠이었다. 마당으로 나온 지한은 상쾌한 산바람을 한입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폐부에 켜켜이 쌓인 삶의 묵은 때를 토해냈다. 맑은 날이었지만 집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거미나 온갖 축축한 벌레의 거처로 사용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날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낮은 담을 두른 앞마당 구석에 나무로 만든 보잘것없는 작은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소래옥? 이상한 이름이네.

지한은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인간의 사회와 어울릴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던 때였다. 소래옥은 지한에게 딱 맞는 껍질 같았다. 이제 서울로 가서 그의 피부에 새긴 온갖 인연의 상처들을 허물처럼 벗어던지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속삭임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이미 알고 있던 길처럼 숲을 가로질러 소래옥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행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만이 지친 몸을 쉬어 가는 듯 시골 간이역에는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안도와 혼란, 어느 것도 놓지 못한 채 기차에 올랐다.

음식의 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잃어간다기보다 썩은 내와 비린내가 점점 심해져서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일이 고역이 되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심해지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던 그 날이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음식물을 섭취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후각은 민감해져 갔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어서 수액을 투여하는 것 외에는 어떤 처방도 내리지 못했다. 단이의 위로만이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도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해장국 집 앞을 지나던 어느 날 지한은 식당 안쪽의 냉장고에서 풍기는 생 선지의 냄새를 맡았다. 지한은 해장국 집으로 들어가서 다짜고짜 생 선지를 사겠다고 했다. 플라스틱병에 선지를 담아주던 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집에서 해 먹는 거보다 여기서 먹는 게 더 맛있다고 설레발을 쳐댔다. 지한은 실험에 쓸 거라며 점잖게 핑계까지 대야 했다. 집에 돌아오는 도중 가방속 선지는 지한의 코를 끊임없이 벌름거리게 했다. 의식과는 무관하게 지한의 세포는 피를 원하고 있었다. 본능은 의식을 내팽개치게 마련이다. 지한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플라스틱병을 열고 찐득한 진홍빛 액체를 들이켰다.
피를 마시고 나면 한동안 약간의 식사가 가능했다. 그러다 갈증은 깊어지고 온갖 냄새에 진저리칠 때쯤 해장국 집에 들러 생 선지를 샀다. 처음에는 열흘이었다가 점점 줄어서 어느 날부터는 이틀에 한 병씩 마셔야 했다. 그때쯤부터 지한은 인간의 냄새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단이와의 연락을 끊은 채 지한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노주가 보낸 수많은 메시지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지한은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더는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선지를 처음 마신 날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포까지도 피의 기운에 전율했었다. 지한은 단지 배고픔과 갈증에 의한 몸의 착각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피였던 이유는 철분 같은,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가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결핍과 욕구가 원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몸 안에서 무엇인가 재정립되고 있었고 그것은 지한의 의식을 향해 더 많은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인간의 신진대사와는 달랐다. 희로애락의 감정도 무뎌지고 있었다.

Sort:  

불행의 시작은 단이가 아닌가여
신들린 지한을 보면 지금까지 잘살앗노라고. 어깨을 토닥토닥 ^^
인생에 반전은 최악에 상황에서 오는것이니 실망하지마 지한 ㅎㅎ

지한아 기운내~~~

지한 더 비기닝. ㅋ
오늘의 소제목 입니다. ^^

정확하십니다!! 비기닝 중 비기닝도 있어요..ㅎㅎ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몇 편까지 있어요? ㅎㅎ

아 이게요. 쓰는 중이라 잘 몰겠어요. 단편이니까 오래가진 않을거 같아요.

헐..
의학에..
뱀파의 생리까지...

이거 보통지식 가지고는 글 몬 쓰겠는데요?...ㅎㅎㅎ
날씨도 더운대...서서히 오싹 해질라고 하네요 ㅎㅎㅎ

대충 영화같은데서도 비슷하잖아요. 약간의 상상만 보탠거에요..ㅎㅎ
뱀파가 실제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제 맘대로...ㅋㅋ

지한 더 비기닝 맞네요.
잘 읽고 갑니다.
4편도 두구두구둥~~~

재미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ㅎㅎ

과연 어떻게 뱀파이어가 됐을지.....

가장 원초적 질문!!
불행의 시작은 어디였을지...

소래옥 에서 무엇을 잘못 먹었거나 아님 무엇에 물렸을까..
변화를 가지게 된 계기가 너무 궁굼해요...
그러게 지리산 자락에 입산금지 표말은
괜히 붙어 있는게 아니라니까...^^!

입산금지는 절대 어기지 않는걸로....

오! 뱀파이어? 기대되는군요 ㅎ

몇편 안 남았어요.. 단편이라...

지한이 끝까지 산 사람이기를 바라봅니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처음부터 정주행 해야할 듯요

넵,, 정주행은 과학입니다..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13
JST 0.027
BTC 60309.45
ETH 2701.35
USDT 1.00
SBD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