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 6 혼란 속 평온

셋째 날 아침, 해가 밝았다.
밤새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다행히 바람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서 조금 늦게 잠이 들긴 했지만, 잠을 설치진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바다와 하늘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파도에 휩쓸려가진 않았고, 이렇게 무사히 눈을 떴다. 회색빛 하늘에도 바다는 흔히들 말하는 그 에메랄드 빛이었다. 마치 에메랄드가 회색을 머금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 날의 목표는 날씨가 허락하는 만큼의 오전과 낮 시간을 보내고, 얼른 나하 시내로 내려가 호텔에 일찍 들어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셋째 날 밤은 태풍 콩레이가 가장 강하게 영향권에 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혼비백산 후의 당황
오키나와의 카페들은 오전 10시 이전에 문을 여는 곳이 드물었는데, 태풍까지 휘몰아치니 아침 먹을만한 곳을 찾는 것이 더욱 쉽지 않았다. 이곳은 유일하게 오전 7시에 문을 여는 팬케이크집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가는데, 비도 바람도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차가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팬케이크집 앞에 도착했다. 비바람이 너무 세서 얼른 주차하고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건물 옆에 차 두 대가 세워진 작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문을 여는데, 우산이 뒤집혀졌고 똑바로 서있기가 힘들었다. 바람 소리가 너무나도 강하고 묵직하게 들려왔다. 순간 너무 놀라서 그 옆에 펜스를 잡았다. 공연장에서도 잡아본 적 없는 그 펜스를.. 짧은 순간에도 비를 홀딱 맞았고, 그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을 잊을 수 없다.
웃기다고 해야할까 어이가 없다고 해야할까. 이른 시간임에도 자리가 3분의 2이상 채워져 있었고, 발랄하고 오래된 포크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여러 국적의 손님들은 이런 날씨를 모른다는 듯 너무나 평온하고 일상적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지극히 아메리칸 빈티지 감성을 내뿜는 공간도 순간 묘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 안은 저 밖과는 너무나도 딴 세상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다들 괜찮은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잠깐 젖은 물기도 금새 마르기 시작했다.
그래. 아침을 먹자.
주문한 팬케이크가 나왔다.
사실 이걸 먹기까지는 약간의 혼란이 더 있었다. 물기를 털고 자리에 앉는 순간, 직원용 주차장에 차를 댔으니 다시 주차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뒤로하고 겨우 들어왔는데, 다시 나가야 한다니 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고객용 주차장은 건물을 빙 돌아 아래쪽이었으니 차를 대고 걸어 올라와야 했다. 그리 멀진 않았지만, 날씨 상황에 미루어봤을 땐 멀게만 느껴졌다. 그냥 좀 먹게 해달라고 할까하다 제자리에 주차를 하는게 맘이 편할 것 같아서 차를 다시 댔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은 순간, 뭐가 잘못됐는지 차를 다시 대달라는 요청. 흰 선도 제대로 없는 모래 바닥 주차장에 다른 차들과 똑같이 일렬로 세워놨는데, 이 날씨에 해도해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시 나갔다 왔다. 항의를 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내 표정을 보고 모두 다 알았을 거다. 내가 욱했다는 것을.
아침 한 번 먹기 어렵네.
비는 잠시 소강상태였다. 완전히 그친 것은 아니었지만, 안심할 만큼 사그라들었다. 팬케이크집 앞에서의 시간이 아마도 비바람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었다.
나하 시내를 향해 차츰차츰 남쪽으로 향했다.
정갈하고 소박한 한상차림
이런 날엔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미술관 전시를 보는 것도 무리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한 번 더 먹는 것일 뿐이었다. 날이 날인지라, 문을 닫았다면 바로 나하 시내로 가리라는 마음을 먹고 찾아갔다. 어쩌다가 찾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밥집.
누군가의 집이었거나, 카페였을지도 모르는 단층 건물. 소박하고 자연스러웠지만, 충분히 감각적인 풍경이었다.
순간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길고 좁은 창문과 나무 창틀도, 작은 조명도,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화분들도. 무엇하나 이질적인 것이 없었다. 우리의 상가 거리에는 이렇게 화분들이 나와있지 않은데, 일본은 거리에 화분이 가득하다. 집 근처만 봐도 동네에 오래된 약국이나 꽃집이 아니면 화분을 보기 어려운데, 너무나 잘 닦인 도로와 번쩍이는 유리문 앞에 화분은 왠지 공간을 차지하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유독 일본 거리가 정취있다고 느끼는 것에 많은 부분은 화분 덕이 아닐까 싶다.
안에도 역시 단정한 분위기를 은근하게 풍기고 있었고, 무엇하나 과함이 없었다. 내부는 두 구획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나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앉을만한 자리를 탐색했다. 손님은 한 팀이 착석해있었고, 우리가 두 번째 손님이었다. 어디를 앉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직원이 다가왔다. 이 모든 자리는 풀 예약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문 앞쪽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문 앞 자리도 괜찮아서 앉기는 했지만, 이 조용한 자리에 이 날씨에 도대체 누가누가 이 공간을 미리 예약했다는 걸까. 다 먹고 이 공간을 나설 때 까지 두 팀의 손님 외에 예약된 자리의 손님들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지역이라 이들에겐 오늘이 그저 일상의 여러 날 중 하나일 뿐인걸까. 그저 조금 날씨가 궂은 날.
에피타이저가 나오고, 다 먹은 후에 연이어 정식이 나왔다. 화려한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족하지 않을 수 있을 법하게 건강한 가정식의 느낌이었다. 나는 미각마저도 이 정갈함에 도취되었다.
후식으로 떡과 차가 나왔다.
모찌의 한 종류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 집이 떡 맛집인가 싶었다. 원래 떡은 밀도가 높은 것에 반해 소화를 잘 못시키는 편이라 선호하지 않는데, 이 떡은 쫄깃하면서 젤리처럼 금방 씹혀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곳을 마지막으로 나하 시내로 돌아갔다.
밖에 있을 땐 태풍을 정통으로 맞는 듯 했고, 안에선 태풍의 눈 안에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풍이 일상인 섬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과 감정으로 살아갈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내 생활 반경이 익숙한 것 처럼 이들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겠지.
감정의 여정, 오키나와에서
시작에 앞서
1 설렘과 불안 사이
2 비워냄과 채움
3 호기심이 압도감으로
4 스며드는 빈티지함
5 서서히 밀려오는 엄습감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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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생한 지진과 태풍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연재해가 흔한 나라에 사는 사람 모습이란 어떨까 궁금했는데 역시 일상적인걸까요. 펜스를 잡았을 때 가슴이 철컹하셨을 것 같아요. 처음이란 생각보다 더 두려운 법이니깐요. 날씨가 좋아져서 다행이네요
뭐랄까 emotionalp님의 오키나와 여행 시리즈는 여행은 배경이고 감정의 흐름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일기 같아서 더 몰입하게 되요 :D !!
의도를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ㅎㅎ 여행의 일정보다는 거기서 느꼈던 부분들을 쓰고 싶었어요.:)
여행 아침부터 우여곡절이 많으셨네요ㅜ 그래도 가게 안에서는 태풍의 피해가 닿지않아서 다행입니다. 남은 여행기에서는 무탈한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여행은 다행히도 무탈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 같았으면 욱해서 그냥 나왔을지도.. ㅠ
-_-;
ㅎㅎ저도 너무 욱했는데, 갈 곳이 없었어요.ㅋㅋㅋㅋ
테이블 옆에 저 큰 그릇을 뭘까요 ㅎㅎㅎ손 씻는 물일까요 그냥 인테리어 소품일까요 ㅎㅎㅎㅎㅎ
큼직한 주먹밥을 보니 영화 카모메 식당이 생각나네요.
도자기이고 인테리어 용인듯 했어요.ㅎㅎㅎ 카모메 다시보고싶네요.ㅎㅎ
중간 도로사진 뭔가 시선을 확 잡아 끄네요...
잠시 비가 그쳤을 때 찍었는데, 나무가 울창해서인지 숲을 지나는 느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