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세상

in #stimcity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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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내 안에 어떤 생각이 매일 같이 흘러들어와 고인다. 나는 온종일 생각의 웅덩이에 몸을 담군 채, 코만 내어놓고 겨우 숨을 쉰다.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사실 이런 건 내게 흔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결정적'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다루는 중이다. 아주 강렬한 분노, 아주 강렬한 슬픔, 아주 강렬한 환희 모든 감정이 다 섞여 있다. 이걸 정리하여 무언가를 한 번에 쌓아 올릴 수도, 한 번에 깨부술 수도, 한 번에 나아갈 수도, 한 번에 멈출 수도 있다. 고인 생각들을 그냥 두면 언젠가 말라 없어져 버릴까 봐 조바심도 난다. 그러니 사라지기 전에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글로 옮겨야 한다.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된다. 흩어진 생각들을 그러모아 단단하게 뭉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해를 맞고 더 조급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내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것 같아 몸을 사렸다. 그러니 지금 내 정신이 머무는 이곳은 태풍의 눈이다. 그저 생각의 방 안에 들어앉아 이리저리 튀는 공을 지켜보는 것이다. 고요한 방 안에서 공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핑하고 퐁하고. 똑하고 딱하고.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생각의 결정이 톡 튀어나올 때까지.

며칠 전에는 라다크 친구들하고 정말 오래간만에 통화를 했다. 현명하고 강인한 내 친구들. 델리에서 지내던 초모는 학업을 그만두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 곁에 머물고 있다. 10년 전 초모는 가족을 지킬 사람이 자기뿐이어서 너무 힘들다고 말하며 자주 울었다. 이렇게 똑똑한 애가 산골 오지에 처박혀 가족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 같이 한국에 가자고 홧김에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곤 했다. 그래서 몇 년 뒤 초모가 대학에 가서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델리에서 만나는 늦깎이 대학생 초모는 혼자 나는 독수리처럼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까맣게 어린 동기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나는 델리에 갈 때마다 초모의 기숙사 방에서 지냈다. 초모 혼자 지내는 방도 아니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도 그 방이 정말 좋았다. 코딱지만 한 방 한쪽에 놓인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가 얼마나 안락했는지, 한여름에 힘겹게 돌아가던 천장의 선풍기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방 안에 차린 살림살이로 소꿉놀이하듯 끓여낸 밀크티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라다크에서는 담배도 술도 오빠 몰래 하느라 늘 전전긍긍하던 초모가 기숙사 방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모습을 보면 영 생경하기도, 멋지기도 했다. 초모는 그럼에도 가족 걱정을 놓지 못했다. 여전히 가족들은 초모에게 의지했고, 초모를 필요로 했다. 강인하고 지혜로운 초모는 엄마와 오빠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고. 그리고 결국엔 자기가 가진 지혜와 힘을 가족을 위해 쓰기로 하고 라다크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어째서인지 초모의 귀향은 포기나 희생이 아닌 혁명처럼 느껴진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초모의 표정이 밝고 편안했다. 초모가 말했다. "돌아와.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 그 말에 대답했다.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

어제는 아침부터 거실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와있는 조카가 <겨울왕국 2>를 보는 중이었다. 엘사가 바다를 가르며 파도 위를 달리는 장면만 겨우 기억난다. 역시 후속작은 전작만 못하다. 숨겨진 세상, 숨겨진 세상. 분명 별 감흥 없었던 애니메이션인데 잠결에 그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곱씹다 보니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내가 써야 할 글의 제목이 '숨겨진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숨겨진 세상. The Unknown.

노마드에게, 어드밴쳐러에게, 숨겨진 세상은 경험해보지 않은 모든 것이다. 그건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아직 밟지 않은 땅이다. 숨겨져 있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 준비된 세상이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을 뿐이다. 그것만이 시간의 역할이다. 그러니 발을 움직여야 한다. 혁명가 초모처럼. 여왕 엘사처럼. 주저앉아 울지만 말고 튀어 나가는 것이다. 내디딘 발걸음이 옥토에 닿든, 꽃밭 위에 놓이든, 진흙탕에 빠지든, 불구덩이에 녹아 없어지든 개의치 말고, 계속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숨겨진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가보겠다고,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고,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고, 죽어도 좋다고, 두렵지만 외쳐보는 것이다. 그건 사는 모양을 바꾸는 선택이다. 그렇게 사는 모양을 한 번씩 바꿀 때마다 백 년씩 더 살게 된다고 어렸을 때 일기에 자주 적었다. 가진 도구를 하나씩 꺼내 사용하면서 다양한 모양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도사님은 내가 여러 가지 도구를 가졌고 운도 좋으니 그저 마음껏 살라고 했다. 그 말에 더 용기를 내고 숨겨진 세상으로 언제라도 겁 없이 뛰쳐나갈 수 있었다.

노마드 라이프와 어드밴쳐 라이프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면 나에게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미는 더 없다. 배설조차도 아닌 디지털 쓰레기를 매일 성실하게 쌓으며 이자 놀음이나 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존재 이유는 아닐 테니. 그런데 혼자서는 이 도구를 쓸 수가 없다. 여기 스팀잇에서 몇 년 동안 지지고 볶고 있는 건 동지들을 찾아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곳이 우리의 해방구임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노마드의 해방구, 모험가의 해방구, 창작자의 해방구.

모여서 얼굴을 맞대고 어깨를 부딪칠 때, 그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지 지난 계절을 거치며 확인했으니 이제 필요한 건 숨겨진 세상에 지을 집, 그리고 함께 저 바깥으로 뛰쳐나갈 누군가이다. 숨겨진 세상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갈 사람. 준비된 낙원과 일촉즉발의 전쟁터가 같은 길에 놓여있어도 머뭇거리지 않을 사람. 찾아올 기쁨을 누리는 만큼 갈등과 상처를 감당할 준비 역시 된 사람. 설득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사람. 그러니 이제 나의 제안은 '나랑 놀자'가 아닌 '나랑 살자' 혹은 '나랑 죽자'다. 숨겨진 세상에 더는 놀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은 I am in 아니면 I am out. 인과 아웃의 경계에는 낭떠러지뿐이다. 중간이 없으니 가진 것을 전부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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