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그들은 너무 지쳤습니다

in stimcity •  2 months ago




그들은 너무 지쳤습니다

+ Marseille, Provence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설의 유적지들이 있습니다. 막달라마리아의 유적들이 그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이자 신부인 막달라마리아는 그의 형제 마르다, 나사로와 함께 박해를 피해 배를 타고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일대의 한 지역에 피신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정착해서 선교활동을 하다, 한 동굴에 은거하며 남은 시간을 수도생활로 보냈다고 합니다. 막달라마리아 일행이 내린 항구 생트마리드라메르(Saintes-Maries-de-la-Mer)에서는 매년 5월이 되면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지금도 열립니다.

 


성배의 전설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데, 성배가 그리스도의 피를 담은 잔으로 신비한 능력을 가진 보물이라는 설과, 실은 막달라마리아가 예수의 아내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어. 뭐 유명한 ‘다빈치 코드’식 해석에 의하면, 예수의 혈통을 낳은 막달라마리아가 이곳 프로방스 지방으로 피신을 왔다는 거야. 그리고 여기에 정착해서 예수의 후손들이 프랑스의 ‘메로빙거’왕조를 세웠다는 이야기이지.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신화 같은 일종의 프랑스 건국신화야.

 
기독교 세계에서 예수의 직계 혈통이 세운 왕조라고 하면 매우 강력한 정통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야 권력의 혈통이란 것이 큰 의미가 없으나, (현대에도 북한 사회나 독재정권, 아버지의 권력이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식의 후진적 권력 사회에서는 여전히 위력적이긴 합니다만) 당시 기독교 중심의 유럽 사회에서 예수의 후손이 정말 존재했다면, 막강한 정통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프랑스는 막달라마리아의 딸이자 예수의 자녀라고 주장되는 사라를 국조로 삼고, 자신들이 예수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바티칸은 막달라마리아의 위상을 창녀로 깎아내리고, 그 자리에 성모마리아를 내세움으로써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와 바티칸 사이에는 ‘카놋사의 굴욕’, ‘아비뇽 유수’ 같은 대립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파리의 중심가에는 막달라마리아를 기념하는 마들렌(막달라마리아의 프랑스식 이름)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막달라마리아의 결혼식이 가나의 혼인잔치였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헤게모니 싸움에서, 예수의 남성 제자들에게 견제를 당한 막달라마리아 일행이 견제를 피해 프로방스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어차피 전설이니까 뭐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다만 무엇이 사람들을 이러한 전설로 이끌고 믿음으로 승화시켰는지 동기가 중요하지.

 
예수의 남성 제자들에 의해서든, 교권을 강화하려는 바티칸의 견제였든, 예수의 결혼은 철저히 부정되고 거부되었습니다. 예수는 완전한 독고다이 솔로 초식남이어야 했고, 그 이미지를 등에 업은 교회 지도자와 사제들 또한 독신이어야 했습니다. 이는 예수와 막달라마리아의 결혼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기독교적 질서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 종교 내부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 제우스와 헤라, 석가모니와 관음보살, 힌두교의 삼주신(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의 배우자 여신 트리데비(사라스와티, 락슈미, 파르바티) 등과 같이, 대부분의 종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을 위해 남신과 여신이 존재하고, 종교에 따라서 이들이 합일을 이루는 과정을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해 왔지.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서는 여성성을 상실한 남성성만이 폭주함으로 균형을 잃고 억압적인 종교가 되어갔어. 이 배경에 성배의 전설이 등장하는 거야. 오랜 시간 기독교에서 배제되어 온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이, 끊임없이 실재하는 현실과 갈등을 빚어오다가 출구를 찾게 된 거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에서 성부는 남성성을, 성령은 여성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위치가 불완전합니다. 성자의 남성성과 균형을 이룰 여성성이, 균형감을 찾으려는 신자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계속 요구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음과 양, 어둠과 빛의 대립되는 성질의 것들이 균형을 이루며, 끊임없이 생성과 명멸을 반복하고, 이러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자의 남성성과 균형을 이루는 여성성에 대한 본능적 요구가, 교회의 권력자들에게 지속적인 고민거리가 되어 온 것입니다.

 


교회의 여성성 배제는 정신, 영혼을 선으로 보고 육체, 물질을 악으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비롯되었어. 물질적인 요소는 모두 악한 것이고, 육체의 정욕을 통제하려니, 엄격한 금욕주의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지. 특히 성욕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사제에게는 독신주의로, 신도들에게는 통제된 성생활로 강화되었지. 그러니 예수가 성행위를 했을 리 없고, 후손도 당연히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지. 또한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은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할 테니 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과, 죄 많은 세상에 아이를 낳아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라는 인식이 함께 있었어. 어쨌거나 성(性)과 여성은 만(萬) 악의 근본처럼 여겨졌지.

 

12세기 유럽 사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아마 여성에 대한 인식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급진적인 변화는 프로방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곳의 관습은 다른 중세 세계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그 당시 중세적 분위기는 여자에 대한 혐오가 강했는데, 이는 교회 교부들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근거로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감독들의 글들, 특히 5세기 힙포의 성 어거스틴(354-430)과 제롬(342-420)의 글을 보면, 여자는 도덕적, 영적 측면에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심지어 후대의 신학자들은 여자가 영혼이 있는가라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여자와 성, 인간의 육체는 모든 세속적인 쾌락처럼 남자를 꾀어내어 숭고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혼란과 유혹으로 간주되었다.
 
대부분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여자에 대한 믿음은 근본적으로 이원적이었다. 물질세계, 육체, 악마,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악의 근원으로 치부되었다. 영혼이 자유롭게 성령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악들을 부정하고 극복해야만 했다. 육체에 대한 갈망은 가능한 멸시하고 무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_ 마가렛 스타버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中

 
욕구를 통제하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입니다. 욕구를 죄와 일치시키면 사람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욕구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초기 기독교의 권력구도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부가 배제됨으로, 기독교의 여성성은 설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균형을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은, 신도들로 하여금 여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갈망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프로방스 일대의 막달라마리아 숭배는 점점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바티칸은 성모 숭배를 대안으로 내어놓음으로써 기독교의 여성성을 부활시켰습니다. 반쪽짜리였지만 말입니다.

 

예수의 결혼과 흔히 말하는 혈통의 소문이 회자되자, 위험을 인식한 로마교회는 13세기에 예수의 아내가 아닌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숭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발 빠르고 단호한 시도들을 시작했다. 그 결과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어머니를 경배했고, 그녀의 수호 안에서 위안을 찾았다.
 
_ 마가렛 스타버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中

 


교권자들이 성모를 교회 내 여성성의 상징으로 내세움으로, 성모는 막달라마리아 숭배를 빠르게 제압하는 듯했어. 그러나 성욕에 대한 통제를 거둘 수 없는 교권자들은 성모를 동정녀이자 원죄 없는 신적 존재로 격상시킬 수밖에 없었어. 그러므로 성모는 성자의 남성성에 대응하는 여성성으로의 지위가 아닌, 그렇다고 성부의 남성성에 대응하는 여성성의 위치도 아닌 어정쩡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 이는 결국 종교개혁의 불씨로 남게 돼.

 
남성성에 대응하는 여성성으로서 성자의 남성성은 그의 신부를 찾아야 합니다. 우주의 질서가 조화와 균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정한 3위로는 끊임없는 불안과 갈등만이 세계를 혼돈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를 융은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를 포함한 ‘4위일체’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음양의 조화와 우주 질서의 회복. 서방 세계의 정신적 바탕을 이룬 기독교 세계관의 ‘3위 일체’는 끊임없이 4위를 요구받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4위를 통제함으로써 신도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야곱을 결혼을 미끼로 통제하였던 삼촌 라반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어머니를(성모 마리아) 신부로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한 신탁은 어머니를 신부로 맞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처럼, 인류의식 속에서 가부장적 종교를 제거함으로써 어머니를 신부로 맞이하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성성은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 직관을 상징하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인류는 급속도로 여성성을 회복하게 돼. 서구 기독교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2번의 세계대전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빠르게 연결되고 소통되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인류의식의 해방은, 더 이상 신성한 ‘4위 일체’의 거룩한 하나 됨을 방치하지 않았어. 결국 ‘3위 일체’의 가부장적 종교는 빠르게 영향력을 상실하고 고루한 구세대의 종교로 퇴색되게 된 거야.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워져야 해. 빛과 어두움을 통합하는 온전한 종교로 거듭나야 해. 그리고 그것은 이미 2천 년 전에 선포 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 속에 모두 들어있지.

 

신의 남성적인 이미지만을 숭배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위험한 일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원리에 따르면 남성 편향과 남성 지배 구조는 꼭대기에 모인 힘이 아래의 감금된 대중을 착취하는 ‘남성’ 중심 모델 위에 사회제도가 구현되게 한다. 이것은 명령과 억압을 위한 모델이다.
 
_ 마가렛 스타버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中

 
그러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신의 4위로서의 여성성의 회복은, 멀린의 말처럼 온전한 신부로서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 어머니로 대체된 듯합니다. 회복 되어져야 할 구세주, 메시아로서의 여성성은, 억압과 착취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존적 여성들로 하여금, 구태가 되어버린 ‘3위 일체’종교로의 회귀를 방조하고 있습니다. 주체적인 삶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남성의 지배하에 놓였던 시절의 안방 권력자의 지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고, 결혼시장의 상품가치로만 자신과 남성들을 평가하는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그들의 나머지 반쪽인 남성성과 결합하기 보다 그녀들의 성자(아들이든 딸이든)와 결합하기를 더 선호하며, 아울러 그들의 성모로서, 성부를 등에 업은 수렴청정의 지위만을 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자들에게,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가부장적 권위 체계 속으로 진입하기를 요구하며 학원 뺑뺑이를 돌려대고 있습니다. 여성성으로 진입한 세계질서는 깡그리 무시한 채, 여성성의 상징인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 직관력의 개발을 원천봉쇄함으로써, 가부장적 성부 시스템에 종속된 부속품으로, 수렴청정하는 성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성자로, 수많은 성자들(아들과 딸들)을 십자가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도대체 어느 때니? 중세야? 조선시대야? 얘들이 섹스하면 목사님이 애들 데려다 화형대에 묶어놓고 불지른 대? 얘들이 게임하면 모니터에서 악마가 튀어나와 애들 영혼을 잡아먹는 대? 학원 성수(주일성수에 빗대어) 안 하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옥에라도 간대? 미련한 처녀들 같으니라구. 지들이 게을러서 기름을 준비 안 해 놓구서는 애들만 잡는 꼴이란.. 그러니 혼인잔치에서 밀려나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 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_마태복음 25장 1~13절

 
워~워, 멀린 너무 흥분하십니다. 다들 사정이 있겠지요. 하지만 반바지 입었다고 화형 당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탱크탑에 배꼽티까지 입고 다니면서 뭐가 두려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4위 일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호주제도 사라지고 더 이상 여성에게 영혼이 있느니 없느니 토론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진정한 여성성의 회복은 아직도 먼 이야기 같습니다. 지금은 그냥 공석 상태? 자리는 만들어졌으나 본인들이 거부하고 있는 상황인 듯도 싶습니다.

 

만일 신부가 잊혀지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여성은 남성 신의 동등한 파트너였을 것이다. 여성성은 세기를 거치면서 동등하게 숭상되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통합은 가족과 공동체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파트너와 친구로서의 여성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황홀경을 빼앗고, 남녀 관계를 동산에 있는 원형적인 커플이 나누는 기쁨의 왜곡된 그림자로 전락하게 했다. 종종 제멋대로이고, 깊이 좌절하고, 상처 입은 남성은 오직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의 잃어버린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잘못된 장소들 (폭력, 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적인 쾌감의 추구)에서 배회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가장 슬픈 현실 가운데 하나는 상처 입은 남성의 지배권이 감정적으로 고갈됐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 남자는 그의 상대, 그의 ‘다른 반쪽’과 어떠한 진정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 파트너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남자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에 쏟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에, 동등한 상대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남성은 감정적으로 고갈되고 마는 것이다. “항상 태양이 비추는 아래에는 사막이 있다.” 숲은 시들고 강은 말라 없어지며 땅은 갈라진다. 그 뒤를 황무지가 따른다.
 
_ 마가렛 스타버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中

 


우리는 막달라마리아가 30년 동안 은거하며 기도했다던 생트봄므(la Sainte Baume)산의 그로트 생트 마리 마들렌 (Grotte Sainte Marie Madeleine) 동굴을 찾아 올라갔어. 매우 신비롭고 슬픈 동굴이었어. 그곳에서 마들렌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잃어버린 신랑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눈물로 기도를 올렸을 거야. 신비로운 ‘성聖 4위 일체’의 회복을 위해 말이야. 그러나 3위와 떨어져 단절된 상태를 견디려면 매일같이 눈물로 날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래서인지 동굴 안에는 샘이 넘쳐흐르고 있더군. 그리고 그 곁에서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두 명의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고 있었어. 그들도 마들렌의 눈물을 알았을까?
 
나는 언제나 사랑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고 있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 또한 사랑의 마법임을 알고 있지. 빛과 어두움, 선과 악 같이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하나 될 때, 핵융합이 일어나고 그 에너지는 세상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모든 힘은 남성과 여성의 내부에 잠들어 있지. 성자는 버려졌어. 그리고 그 성자의 후손인 우리 남성들은 모두 버려진 아들들이지. 그들은 성모에 의해 버려졌지만 그들의 남은 반쪽, 신부에 의해 되찾아져야 해. 고아를 돌보는 것은 과부의 몫이 아니라 신부의 몫이지.

 
멀린은 마들렌의 동굴 앞에 놓인 조각 앞에 섰습니다. 유명한 피에타 상에 여인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주검이 되어버린 아들을 안고 있는 성모와 그 아들의 신부 마들렌.. 성모와 신부는 4위 안에서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모와 신부는 하나로 통합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반쪽인 성자와 버려진 아들들을 치유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너무 지쳤습니다.

 

카를 융의 작품을 해석한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Marie-Louis von Franz)는 여신이 숭배받는 원인은 의식 세계 속에 있는 남성적인 방식이 지쳤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상 그것은 정신 또는 ‘로고스’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마침내 소진된 것이다. 결국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남성은 여성, 그늘, 밤 안에서 안식과 도피처를 찾게 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책, ‘연금술’에서 가부장적 문명의 끝에 ‘enantiodromia’가 온다고 말한다. 즉 ‘소진된’ 남성의 힘이 ‘여신’에게 전해지면 결과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문화적 방향을 세우는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_ 마가렛 스타버드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中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그들은 너무 지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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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동굴 안에는 샘이 넘쳐흐르고 있더군. 그리고 그 곁에서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두 명의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고 있었어.

인상적이어서 그대로 베껴 봤네요.

지치는걸로 끝나지 않고
반발하고 반박함으로써 어떻게든지 유지되어지는걸 보노라면
인간은 끊임없이 갈구하는 무언가가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