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이즘] 채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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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mcity.net의 [Human Library]를 채우기 위해 위즈덤 러너들의 포스팅을 채굴 중이다. 이제 절반 정도 한 것 같다.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써 내려 간 글들을 마주하는 건 한편으로는 숭고하고 한편으로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다들 어찌나 열정이 가득했던지. 이런 일을 일생에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으로 몰려나온 가슴들이 이러했을까? 그건 한바탕 놀고 사라지는 이벤트였지만, 인류의 미래를 놓고 이렇게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재설정하고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일을 우리의 인생에 또 만날 수 있을까? 결과와 상관없이 지난 3~4년간의 역동은 정말 가슴 벅찬 감정을 준다. 누구도 소외되는 일이 없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모든 이들의 변화와 혁신 그리고 혁명의 가능성. 그만큼 타올랐고 모든 이들이 능동적으로 동참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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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나 보다. 포스팅을 읽어 올라가며 활활 타오르던 열정이 소통과 불일치의 장벽에 하나둘 사그러들고 점점 냉소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스산해진다. 차라리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으면 낫을까? 시도된 감정은 좌절되었을 때 더더욱 날카로워지고 우울해진다. 마치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한 가운데서 왜 자신들을 이리로 몰고 왔냐고 원망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 중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우리는 모두 사막을 떠돌게 될까? 그래도 다음 세대들은 이만큼 진전된 인식을 바탕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플랫폼에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스팀시티] 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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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한 만큼 많이들 우울해졌다. 활동을 멈춘 계정들은 대부분 그렇다. 우울해져서 활동을 그만두었을까? 활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현실에 우울해졌을까? 갑자기 나가봐야 시베리아라는 말이 떠오른다. 돌아와라. 눈꼽보상이라도 여기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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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 특성상 자신의 포스팅도 검색, 정렬하기가 어렵다. 덕분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 포스팅을 해나갔다. 덕분에,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이해하기가 용이했다. 미리 계획되고, 잘 정리된 절차와 계열에 따라 작성된 글들이 아니라 순간순간 대응하고 떠오른 그대로가 드러난 글들이라 맨몸 그대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부끄럽지만 진실되다.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편집되고 수정된 다른 SNS의 그것이 아니라 좋았다. 검색과 정렬이 어렵다는 스팀잇의 불편함은 오히려 가식과 위선을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언제나 지금, 바로 이 감정을, 어제의 글과 상관없이 그러나 온전히 '나'라는 개성을 바탕으로 기록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순기능이지만, 덕분에 모두의 가슴에 직접 다가설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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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모두들 시시콜콜했다. 덕분에,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알기 어려운 개인사를 꽤나 낱낱이 접할 수 있었다. 익명성이 가져다주는 진솔함이라고 할까? 이런 얘기를 같은 회사에 다닌다고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한다고 알 수 있을까? 매우 친밀한 가족과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알지 못할 얘기들을 모두들 여기에 적었고 마법사는 그것을 읽었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던 누군가는 지금쯤 취업에 성공했을까? 누군가는 잊지 못하는 이별을 얘기했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했고 또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jsquare님의 화순 부모님 댁에는 불이 났다고 하는데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전원일기에나 나올, 이제는 사라진 이런 이웃의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돌려받게 되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느새 이웃의 숟가락 갯수를 셀 수 있게 되었다. 공동체가 다 무너졌다는 데 이런 식의 복원이라면 우리는 축복 받은 이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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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발견한 톰아저씨의 이야기는 정말 마법사의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가슴을 울린 건, 누군가 여기서 만난 어떤 스티미언이 쓸쓸하기 짝이 없었을 이역만리의 장례식장에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삶에 이렇게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마지막 마음을 나누어주었던 톰아저씨도, 그런 이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었던 그 누군가도 모두 이 공간이 그렇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다. 마법사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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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젠가 본 단편영화가 기억이 난다. 루저처럼 골방에 처박혀 살다가 갑자기 죽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저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하며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다는 고백을 늘어놓는 걸 보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 다른 이해를 가지게 된 아들. 그들은 사실 어떤 게임의 길드 조직원이었고 아버지는 그들을 이끌던 길드의 리더였다는 이야기.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아들이 아버지가 살던 골방문을 열자 창문에 누군가 서 있다. 빛나는 갑옷과 검을 든 길드의 리더, 게임 속 그 캐릭터의 모습으로 서 있는 아버지.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아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씨익 웃으며 날개를 활짝 펴고 상공으로 날아가던 그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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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아저씨의 이야기는 마법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절하게 고립되어 있던 마법사가 어쩌다 우연히 만난 곳이 여기였고 외로운 마법사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이들이 여러분들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써온 마법사에게 잘 읽었다 댓글을 달아주고 게다가 돈을 주고 글을 퍼 날라 주고. 누구라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내친김에 이대로 도시가 되어보자고 시작했던 [스팀시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믿는다. 이 진심의 가치를. 한없이 고립되어 있던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 연결의 소중함. 그것은 스팀만배보다 귀하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 시간들을 모두 함께 지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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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와 비난만 남은 듯하지만, 모든 시작하는 것들은 광야를,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야 한다. 먼저 의지와 진심을 시험받는 것이다. 390여 번의 사망선고를 받고도 2배가 넘게 뛰어올라 버린 비트코인의 역전극은 그래서 더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한사람이 꾸면 꿈이지만 모두가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말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망상에 불과하다는 가상화폐가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를 바탕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그게 인류의 힘이다. 연대하는 인류는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자라났다. 그것에는 상상하는 힘. 그 상상에 참여하는 힘.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꿈꾸고 연대하고 상호작용하기를 멈추지 않는 힘. 그것으로 천적을 넘어서고 자연을 극복해 왔다. 그사이에 상상하는 이와 상상하지 않는 이,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연대하는 이와 연결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 도태와 진화의 갈림길에서 갈라졌다. 살아남은 모든 이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상상하고 믿고 연대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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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떤 성공은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룬 것 같아 보인다. 실상은 누군가의 연대와 조력, 희생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마치 저 혼자 잘나서 된 듯 포장되는 성공이 가짓수를 마구 늘려가고 있다. 그것은 바이러스다. 인류에게서 진화의 동력을 앗아가는 고립의 바이러스다. 연대를 멈춘 인간이 고립될 때, 진화는 멈추고 고양이의 집사로 개집의 매니저로 전락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코로나19는 인간을 고립시켰다. 살자면 고립되어야 하지만 고립된 상태에서도 연대를 잃어선 안 된다. 연대를 멈추고 저 혼자 살겠다고 날뛰다간 우리는 영원히 이 바이러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스팀잇의 현재를 들여다본다. 우리는 연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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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일기를 이렇게 길게 쓰는 게 아닌데 긴글충 마법사는 오늘도 주절거린다. 한마디만 더하자.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말이다. 연대하는 인류 말이다. 연결이 아니면 존립이 불가능한 이 블록체인 말이다. 연대가 끊어지면 시스템이 망가지는 이 블록체인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화폐, 암호화폐 말이다. 그것을 여는 그 암호가 뭐겠는가? 인류의 진화를 여는 그 암호, 스팀만배를 실현시킬 그 암호 말이다.
Password : 연결,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