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오덴세에는 안데르센이 있었지

in stimcity •  26 days ago




오덴세에는 안데르센이 있었지

+ Odense, Denmark



7~8시간씩 이동을 해야 했어. 멀기도 멀더만. 기름값도 비싸고, 통행료도 비싸고, 물가도 비싸고.. 처음부터 스칸디나비아는 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직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베를린에서 돌아내려갔으면 좋았으련만.. 스위스에서 직관이 그랬잖아. ‘계속 가라’고 말이야. 그런데 이게 뭐냐고? 별게 없는 거야. 이렇게 돌아 볼 곳은 아니었던 거야.

 
멀린은 짜증이 났습니다. 코펜하겐-스톡홀름-오슬로를 일주일에 걸쳐 돌아오면서 ‘이게 뭔가?’ 싶었던 겁니다. 뭘 하자고 이렇게 무리해서 스칸디나비아를 돌아야 했던가, 마음에 의구심이 계속 들었습니다. 일주일에 돌아 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로라를 본 것도, 피오르드와 북극권을 탐방했던 것도 아닙니다. 자연환경을 볼 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올 곳은 아니었다는 불편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툴툴거려 보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직관이 시켰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스칸디나비아를 크게 한 바퀴를 돌고는 이제 다시 내려갑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가야 하는데 도저히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어디서든 하루 묵어가야겠습니다.

 


기왕이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독일에서 1박을 하고 싶었어. 독일이 물가가 싸거든.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계산을 해봐도 동선이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덴마크 오덴세에서 1박을 할 수밖에 없었지.

 
오슬로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여정의 딱 중간 정도에 오덴세가 위치해 있습니다. 코펜하겐 가는 길에 지나만 갔었는데, 이번에는 어쨌든 1박을 해야겠습니다. 가능하면 한 번 지나간 도시는 다시 들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동선을 짰는데, 어쩔 수 없이 오덴세에서 1박을 해야겠습니다.

 


매우 불편한 마음이었는데 도시가 괜찮더라구. 딱 들어서는데 집들이 아기자기하고, 거리 분위기도 한적하니 좋았어. 동화 속에 나오는 동네처럼 말이야. 숙소도 괜찮았고..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어. 그동안 캠핑장이 대부분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서 동네 산책을 하기가 마땅치 않았었는데, 오덴세의 숙소는 도심에 있어서 동네 산책을 할 수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다음 날 알게 된 거야. 여기가 정말 동화 속 마을이었다는 걸 말이야.

 
오덴세에서 멀린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스웨덴(스톡홀름)이 좀 까칠하고, 노르웨이(오슬로)가 도도하다면, 덴마크는 서글서글하고 편안한 인상입니다. 그래서 한스와 잭도 북유럽에 다시 온다면 어디를 오겠냐고 물었을 때, 모두 덴마크를 꼽았습니다. 멀린은 ‘덴마크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려, 바쁜 일정이지만 다음날 오전에 오덴세를 좀 둘러보고 가야겠다 생각합니다. 아침을 동네 빵집에서 편안하게 먹으면서 오덴세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앗! 그런데 오덴세는 안데르센의 마을이었군요.

 


모처럼 한적하고 편안한 아침식사였어. 크로와상과 커피 한 잔의 단출한 식사였지만, 야외 테이블에서 바라보는 오덴세 도심의 정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더라구. 가끔 어떤 도시는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쾌적하게 착 달라붙는 기분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오덴세가 딱 그랬어. 다시 와서 한 달쯤 살아보고 싶은.. 그런데 오덴세에 대해서 정보를 검색하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한 거야. 안데르센 말이야. 안데르센이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작품 활동을 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동네가 동화처럼 아기자기하구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안데르센의 동화집 중에 <그림 없는 그림책>이 있었던 거야. <그림 없는 그림책!> 아.. 이런 우연이 있을까?

 
멀린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 없는 그림책>은 안데르센의 동화집이기도 하지만, 멀린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붙인 연재 글의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20대의 멀린은 교회 주보에 처음으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나 개인적인 글들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첫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광수생각’이라는 만화 칼럼이 유명했었습니다. 멀린도 그런 형식으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으니, 컷은 만화책처럼 칸을 나누되, 그림이 없이 글로만 된 칼럼을 썼던 겁니다. 그래서 타이틀이 <그림 없는 그림책>이 되었습니다. 몇 년간 교회 주보에 연재를 하고서, 멀린은 이후로도 <그림 없는 그림책>이란 타이틀로 계속 시詩 아닌 시詩를 써서 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책을 내게 되면 꼭 <그림 없는 그림책>이란 타이틀로 책을 내야지 하고 생각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안데르센의 작품 중에 같은 제목이 있을 줄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 왜냐하면 그런 제목이 또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거든. 아.. 그런데 기억이 나. <그림 없는 그림책>을 연재할 때, 누군가 이런 제목의 책이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막 우겼었어. 그럴 리가 없다구. 이건 내가 생각해 낸 제목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안데르센이라면…

 
안데르센, 그림 없는 그림책.. 전 세계인의 유년시절을 가꾸어 준 그의 작품집이었다니요. 멀린은 이것은 오마주라고 생각해도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그저 동화작가라고만 알고 있던 안데르센의 생애를 알고 나니 더욱더 말입니다.

 


안데르센은 원래 배우가 되려고 했었는데 번번이 오디션에서 떨어졌대. 그래서 낙심하고 있었는데 마법사가 나타난 거야. 마법사는 안데르센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그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으니 좀 더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지. 그의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한 안데르센은 그 뒤로 명작을 쏟아 놓기 시작해.

 
안데르센은 가난한 양화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시는 바람에 혈혈단신이 된 채로, 15세의 나이에 배우가 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떠납니다. 피나는 노력에도 배우가 되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절망이 깊어져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던 안데르센에게 마법사가 나타납니다. 그는 ‘요나스 콜린’이라는 정치인으로, 안데르센의 글 쓰는 재능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글쓰기를 위한 공부를 계속할 것을 제안하며 학비를 지원해 줍니다. 안데르센은 대학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대학생활도 순탄치는 않았어. 교장과 갈등이 많았는데, 교장은 안데르센의 창작활동을 하찮게 여기고 방해했어. 헤어지는 순간까지 악담을 내뱉었던 교장은, 60세가 넘어서까지 안데르센의 악몽에 나타날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대. 하지만 안데르센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명작 <미운 오리 새끼>를 쓰게 돼. <미운 오리 새끼>는 마법사로서 나의 인생의 메인 테마이기도 하지.

 
멀린은 <미운 오리 새끼>의 주제의식을 자신의 사명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미운 오리들에게 ‘너는 백조’라고, 너는 날게 될 거라고 말해주는 것이, 자신의 마법사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화는 늘 멀린의 마음속에 중요한 텍스트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미운 오리 새끼>의 작가는 안데르센이 아닙니까? 너무 어린 시절의 텍스트라 막연하게 남아있던 기억 속에서, 작가 안데르센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안데르센의 자전적 동화였다니.. 그 또한 마법사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 <눈의 여왕>, <백조 왕자>,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엄지공주>, <인어공주>, <외다리 병정>… 그의 작품들을 생각해 보니 그 영향력을 가늠할 수가 없어. 생각해 봐! 전 세계 어린이 중에 그의 작품을 보고 자라지 않은 어린이들이 얼마나 되겠어? 그의 작품세계는 곧 인류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기둥이 되어 있는 거야. 이렇게 강력한 영향력이 또 어디에 있겠어? 이건 정말 어메이징 한 일이야.

 
그는 서른 살에 <동화집>이라는 동화책을 처음 발표하고 동화작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후 모두 130여 편의 동화를 창작하게 되는데,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안데르센 동화집>은 당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 필수 목록이 되었습니다. 그는 창작동화의 개척자로 민담이나 전설을 재구성한 수준을 넘어서, 직접 창작한 이야기로 동화를 구성하였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생의 대부분을 해외여행으로 보내며, 세계 각지에서 얻은 영감들로 동화를 창작해 나갔습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혁신적이야. ‘얀테의 법칙’을 생각해 봐. ‘남보다 튀지 마라’는 덴마크와 북유럽인의 기본적인 정신구조였어. 그런 사회문화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말이 되냐구? 너는 백조라구, 너는 특별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얀테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말이야.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매우 독립적이야. 왕자님이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구. 언제나 여성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남성을 구원해 내는 이야기들로 구성이 되어 있어. 청순가련 민폐 캐릭터의 여주인공들이 아니라구.

 
안데르센의 동화 속 여주인공들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입니다.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해내고 (인어공주), 눈의 여왕에게 잡혀 간 소년을 찾아 모험을 떠납니다 (눈의 여왕). 심지어 마법에 걸린 오빠들을 구해내기 위해, 화형대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마법을 풀어 줄 쐐기 옷 짓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백조 왕자). 어쩌면 이러한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여성상은 모두 안데르센이 꿈꾸던 구원의 여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안데르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멈추지 않았어. 그는 늘 사랑을 갈구하고 프로포즈를 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일찍 재혼을 했으니, 어머니의 사랑도 충분히 받지 못했을 거야. 평생에 걸친 거절감과 결핍은 그의 동화에 여기저기에서 묻어나지.
 
버려진 아들들.. 그도 그렇게 버려진 아들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을 구원해 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자신들을 마법에서 풀어 줄 대지의 어머니를 말이야.

 
미운 오리들을 마법에서 깨어나게 해 줄 손길을, 안데르센도, 멀린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눈의 여왕과 맞서 자신의 아이들을 구원해 낼 대지의 어머니임을 깨닫지 못한 채, 저주받은 마녀 흉내를 내고 있는 세상의 여인들에게, 이제 ‘겨울 왕국’에서 걸어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지의 어머니를 부르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영화관에서, 브라운 관 앞에서, 박차고 일어서서 목청 높여 이렇게 주문을 외웠지.
 
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
I'm free!
Let it go, Let it go..
 
_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 OST ‘Let it go’ 中

 
벌거벗은 임금님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마법에 걸린 백조 왕자들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외다리 병정처럼, 불타는 난로에 집어 던져질지 모릅니다. 이들을 구원하려면, 물거품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어공주와, 눈의 여왕에 맞선 소녀의 용기를 가진 블랙스완, 엘리제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녀들이 성냥을 팔다가 환상 속에 잠들지 않도록, 마법사 멀린은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안데르센처럼 <그림 없는 그림책>을 기록해 가야겠다고 마음에 되새깁니다. 그러려고 스칸디나비아를 돌아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으면 절대 들리지 못했을 오덴세에서, 안데르센을 만난 멀린은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마법사의 검을 사용해야 할 곳이 어딘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오덴세에는 안데르센이 있었지

이전글 | 글목록 | 다음글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