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맑음 소년 마법사

in #stimcity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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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빗방울이 비치기 시작했다. 우산을 사야 하나 생각하고, 비가 오니 지하철을 탈까 생각하고, 그냥 버스 정류장으로 걷는다. 답답한 지하철보다 창밖 풍경을 볼 수 있는 버스를 타는 게 좋다. 나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니까.



버스가 바로 오지 않으면 비를 맞고 서 있어야 할 텐데. 아직 비치는 수준이지만 곧 빗줄기가 굵어질 것 같다. 늘 기다리게 만드는 버스가 바로 올지 의문이다. 그런데 버스가 바로 왔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가 바로 오는 확률은 드물지만, 비를 맞지 않을 확률은 매우 높다. 소년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니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한다. 우산을 펼쳐 드는 사람들,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버스 안에서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 이 비가 언제 그칠지 나는 안다. 마법사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니까.



그랬다. 나의 날씨는 언제나 맑았다. 그것은 어떤 징크스 같은 거다. 특히 여행 중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의 여행 사진에는 비 오는 풍경이 거의 없다.



"희한하네. 비가 안 온단 말이야. 오다가도 그치고."

"그러니까. 내 별명이 '비사이로막가' 라니까. 하하하"



그 별명은 정확한 별명이 아니다. 비가 와야 비 사이로 막 가지. 비가 오지를 않으니. 정확한 별명은 100% 맑음 소년 마법사다. 오던 비도 그치게 만드는.





2,

동경에서 나도 러브호텔에서 자본 적이 있다. 누구랑 잤냐고? 마법사가 누구랑 잤겠어? 마녀랑? 미녀랑? 그랬으면 좋겠다. 소년 마법사 역시 호기로운 친구들이랑 러브호텔에서 잤다. 떼로 몰려서. 갈 곳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그때에는 그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게 러브호텔인지도 몰랐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눈치 안 보고 여럿이 자도 좋겠다 좋아라했다. 어? 숙박비도 엄청 싸네? 침대도 넓고 핑크핑크 러블리 하네. 그런데 왜 욕실 유리가 투명하지? 다 보이게. 그렇게 몰려 들어가 배낭에서 쌀과 김치를 꺼내고 밥을 지어 먹었다. 러브호텔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했으니까. 그래도 좋았으니까. 서로 사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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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호텔인 줄 알았는데 누가 자꾸 노크를 했다. 우리가 방을 들락날락 할 때마다 센서가 작동하나 보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계속 초인종을 눌렀다. 스미마셍. 여기는 한 번 들어오면 한 번밖에 나갈 수 없는 곳인가요? 몰랐어요. 러브호텔은 그런 곳이군요. 들어오면 나갈 수만 있는 사랑.





3,

이웃 나라에서는 유독 노숙을 많이 했다. 청춘의 여행이란 그런 맛이지. 여행자는 언제나 청춘이니까. 아무 교회나 찾아가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해변에서 침낭을 깔고 떼로 누워 자다 동네 아이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며 몰려들기도 했다. 사람 자는 거 처음 보니?



살인적인 동경의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는 더욱 그랬다. 자느니 놀자며 클럽에서 밤을 새우고는, 아직 열지 않은 스타벅스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와 파파이스, 서점들을 오락가락했다. 테이블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싸우는 소리에 벌떡 깨어나고, 누군가 엎어버린 콜라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스타벅스가 오픈하자마자 편안한 소파 자리를 차지하고는 길고 긴 낮잠을 잤다. 그러나 행복했다. 여기는 동경이니까. 우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소년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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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군가의 기적이 되어주는 거야.
누군가에게 또 누군가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적이 되어주는 거야.
그러다 그러다 보면
내 삶에도
기적이 기적이 일어나겠지.
내 고단하고 거친 삶에도
평생 못 잊을 기적이 기적이 일어날 거야.

_ <그림 없는 그림책> 빈센트



언제나 맑음인 소년의 인생은 맑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소년의 인생에 언제쯤 쨍하고 해 뜰 날이 찾아올까 기다리다 지친 어느 날, 소년은 기다리지 말고 만들어 보자 결심한다. 나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면 누군가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게 하자. 그렇게 하다하다 보면 언젠가 나의 삶에도 기적이 기적이 일어나겠지. 돌아돌아 언젠가는 나의 삶에도 기적이 기적이 찾아오겠지.



결심한 소년은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적은 마음을 주는 일이니까. 뜻과 정성을 다하면 되는 일이니까. 사람들은 돈은 벌어 봤어도, 시험에 합격은 해봤어도. 누군가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것은 기적으로 다가온다. 마음과 뜻과 정성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



소년은 가지고 있던 CD 플레이어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누군가에게 주었다. 나도 평생 처음 가져본 건데, 너도 평생 처음 받아보는 것일 테지. 그러면 이것은 기적인 거야. 그렇게 그렇게. 내게는 더이상 기적이, 처음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적인, 처음인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내게도 그런 일이 생겨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내리는 비를 멈추게 했다. 그렇게 소년은 마법사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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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누군가의 비행기가 되어 주는 것.
콜라와 짜장면을 사 주는 것.
외로운 어깨를 망설이지 않고 안아주는 것.
평생 한 번 행복한 생일을 만들어 주는 것.
신세 지지 않으려는 누군가에게 못된 버릇이라고 혼내주는 것.
그리고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그리고 정말 떠나지 않는 것.

_ <그림 없는 그림책> 빈센트



하지만 지구는 둥글고 매일 자전을 한다. 소년에게서 떠나간 기적은 자전을 하는지 공전을 하는지 소년에게 돌아올 줄을 모르고. 기적이 일어난 많은 이들의 마음은 맑아졌는데 소년의 가슴에는 비가 그치지 않는다. 이 비를 멎게 해주렴. 하늘아 하늘아.





5,

그러나 소년의 마음에 비가 멎게 하려고 100% 맑음 소녀를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적이 소년과 소녀의 희생과 결심이 만들어낸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그저 이 지긋지긋한 비가 그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소녀의 가슴에 비가 멎자 세상에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끝도 없는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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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혼자 온 거니? 맑음 소녀는 어디 가고?"

"그 아이는 이제 맑음 소녀가 아니에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이사하셨네요. 전엔 고풍스러운 집이었는데."

"그 동네는 완전히 물에 잠겼어."

"죄송합니다."

"왜 학생이 사과를 해? 알고 있니? 도쿄 부근은 원래 바다였어. 2백 년 정도 전까지 말이야. 옛날엔 도쿄가 작은 만이었다지. 그걸 인간과 날씨가 조금씩 바꿔 온 거야. 그러니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야. 그런 생각도 든단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인간과 날씨가 만들어낸 세상이 2백 년 만에 다시 순환한 것이다. 이제 소녀의 삶에도 기적이 일어날까?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해주던 소녀의 삶에도 기적이 일어날까? 그리고 마법사의 삶에도.



"히나, 같이 돌아가자."

"하지만 내가 돌아가면 또다시 날씨가.."

"상관없어! 이젠 괜찮아.
넌 더 이상 '맑음 소녀'가 아니야!
두 번 다시 맑지 않아도 괜찮아.
푸른 하늘보다 히나 네가 좋아.
날씨 따위,
계속 미쳐 있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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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균형을 위해 누군가 미쳐 있어야 한다면 그건 이제 사람이기보다 날씨인 것이 낫지 않을까? 화창하기만 한 날씨 속에서는 같은 우산을 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비를 맞고 서 있는 누군가에게 우산을 내밀어 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방울쯤 맞아도 좋다. 우리가 함께 라면.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수 있다면.





6,

러브호텔에는 한 번 들어올 수 있고 한 번 나갈 수 있다. 그게 사랑이다. 들락날락 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의 들락날락에 지친 하늘이 비를 내리고 있다. 사람들의 들락날락에 지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호스를 대고 방에다 물을 뿌리고 있나 보다. 멈추지 않는 비를. 우리는 가만히 맞고 서서 울고 있지만. 누군가 이 비를 멈추고 잠시 맑게 하기 위해 자신을 잃어야 한다면 그것도 공평한 것이 아니다. 우주는 공평하니까. 우리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이 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간 우리 때문에 희생한 그 소년과 소녀를 위해.



마법사의 마음에도 비가 그쳐가고 있다.
그대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미쳐가겠지.
그래도 우리는 함께 비를 맞자.
잡은 손을 놓을 순 없으니까.
외롭고 쓸쓸한 푸른 하늘보다
함께 우산을 쓸 수 있는
따뜻한 그대들이 더 좋으니까.



버스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그쳤다. 그러나 마법사는, 아니 소년은 우산을 사러 간다. 너와 함께 써야 하니까. 이제는 비가 내려도 좋으니까. 우리는 [스팀시티]의 러브호텔에 가야 하니까.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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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레이스 + Movie100] 011. 날씨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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