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전쟁사 포럼

in #steempress5 years ago (edited)

 

지난 3월 22일 전쟁사 포럼이 첫 연구발표회를 진행했다. 이 모임은 학계, 법조계, 언론계, 영화계, 군출신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전쟁사 연구와 관련된 발표와 토의를 통해 학제간 교류 및 해당 직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영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했다. 전쟁사 포럼은 결월로 개최되며 이번 포스트는 3월 22일 개최된 제1차 전쟁사 포럼의 발표내용을 요약했다.

일소전쟁 개설-정밀(靜謐)확보의 종착점, 최종호 변호사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관동주(關東州)와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손에 넣었다. 이와 같은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육군의 부대가 관동군이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관동군은 요동반도의 여순에 사령부를 두고 2년 교대로 본토에서 파견되는 주차(駐箚) 사단 1개와 독립수비대 6개 대대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였다. 

  1928. 6. 4. 봉천군벌 장작림을 만철선과 경봉선(京奉線)의 교차점 황고툰에서 암살한 관동군은 1931. 9. 18. 만주사변을 통하여 장작림의 후계자 장학량을 몰아내고 만주 전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에 1932. 3. 1. 청나라의 폐제 부의가 집정에 취임하면서 만주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같은 해 9. 15. 일본과 만주국 사이에 일만의정서가 체결되어 만주국의 방위를 위한 관동군 주둔이 승인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가상적은 러시아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러시아는 사라지고, 소련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에 1923. 2. 28. 개정된 제국국방방침은 소련을 가상적국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소련은 1928년부터 10년간의 경재개발계획을 통해 중공업을 육성했고, 국가 전체가 안정화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극동의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1936년 말 일본군과 극동소련군의 군사력의 비율은 1:3으로 평가되었다. 

 1935년 이후 일본과 소련간에는 사소한 국경분쟁이 빈발했다. 1938. 7. 29.부터 8. 11.에 걸쳐 만주국 동남부의 장고봉 부근에서 소련군의 공격으로 전투가 발발했다. 이를 장고봉사건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 임한 일본군 제19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나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1938. 5. 11.부터 9. 16.에 걸쳐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 사이에서 발생한 노몬한 사건은 최대의 국경분쟁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제23사단이 사실상 전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고, 결국 일본군의 실질적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일본군은 12,220명, 소련군은 25,655명의 손실을 낸 것으로 파악된다. 

 노몬한 사건 이후 일본과 소련은 표면적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사건 이후 관동군사령관에 취임한 우메즈 요시지로는 1944. 7. 18. 참모총장으로 전임되기까지 5년 간 재임하면서, 대소정밀확보(對蘇靜謐確保)의 기치를 내 걸었고 양국 간에는 특별한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1941. 4. 13. 일본과 소련은 5년의 유효기간으로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1941. 6. 22.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다. 동맹국 독일에 호응하여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관동군특종연습(關東軍特種演習), 약칭 관특연이다. 이에 따라 평시 28만의 관동군은 74만 이상으로 증강되었고, 1941. 8. 29. 개전하여 10월 말 작전을 완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1941. 7. 28. 일본의 남부베트남 진주를 통하여 촉발된 미국과의 관계 약화로 인하여 소련을 상대로 개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1942년 이후에도 극동소련군의 병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에 따라 관동군 역시 만선(滿鮮)에 사단 16개, 전차사단 2개 등 병력 약 65만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극동소련군은 21개 저격사단을 기간으로 약 70만의 병력으로 양국의 지상병력은 호각의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1943년 이후 남방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격이 본격화되었고, 이에 관동군에서의 병력 추출이 본격화되었다. 1945년까지 관동군에서는 정예 사단 16개가 남방으로 이동했다. 1945년 8월 시점에서 관동군은 24개 사단의 병력 70만이었지만, 이는 과거의 사단 전력으로 환산하면 약 8개 반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의 패전 이후 유럽에 배치된 소련군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수송되었고, 1945년 8월 시점의 극동 소련군은 약 130만, 항공기 5,400기, 전차 3,000량 정도로 평가되었다. 

 일소중립조약이 유효한 1945. 8. 9. 소련군은 만주국을 침공했다. 소련군은 북만(北滿)의 제2전선군이 관동군을 구속하면서, 동만(東滿)의 제1전선군과 서만(西滿)의 자바이칼전선군이 양익포위를 통하여 관동군을 거대한 포위망 속에서 섬멸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관동군의 방어계획은 경원선(京圖線) 이남과 연경선(連京線) 이동의 지역을 확보하여 지구전으로 이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량과 병력을 앞세운 극동소련군 앞에 관동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국지적으로 진지를 고수하는 등의 활약은 있었으나, 전반적 정세에서 관동군의 불리는 명확했다. 소련군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1945. 8. 14. 이후에도 진격을 계속했다. 1945. 8. 19. 관동군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는 소련군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고, 본격적인 정전과 무장해제가 개시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1945. 9. 2. 일본의 항복문서에 대한 조인도 무시한 형태로 진격을 계속했고, 결국 소련군이 만주, 한반도 북부, 사할린, 쿠릴열도 및 일본의 북방 4도에 대해 완전한 점령을 달성한 1945. 9. 5.에야 이르러 모든 공격을 종료했다. 

6⋅25전쟁 군사사 연구의 선결조건 구축, 김상규 박사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6⋅25전쟁 관련 기밀문서들이 대량으로 공개되면서 적군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국에서도 중국 특유의 방식으로 공산권의 최고지도부들 간에 오고갔던 電文을 공개하고, 참전한 지휘관들의 회고록 등을 발간했으나 문서 공개에 있어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중국은 실제 6⋅25전쟁의 참전국으로서 당시 전쟁의 단계별 전략임무를 명령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와 관련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동일한 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작전과 전술을 어떻게 판단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는지를 중국인민지원군 관점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6⋅25전쟁을 보다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발표는 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중국인민지원군 문서들과 정전협정 이후 그들이 전쟁에서 경험한 바를 정리하여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편찬한 전사를 소개함으로써 6⋅25전쟁 군사사연구에 일조하기 위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산하의 연합국통역번역국을 중심으로 한 미군 수집부대들은 한반도 全域에서 적군자료를 노획했다. 이러한 문서들은 현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RG242문서군의 일명 ‘북한노획문서’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 당시 작성하거나 휴대했던 문서들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는 2000년도에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 500건을 영인해 『한국전쟁기 중공군문서』(전4권)을 발간하여 실제 모습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마이크로필름 복사형태로 영인 출판했기 때문에 글자 식별에 상당한 제약이 있어 현재까지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를 활용한 연구가 진행된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북한노획문서’(40만 5천 8백여 면)를 일일이 확인한 결과, 약 1,500건에 달하는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이미지파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문서 유형을 보면, 각종 작전문서(명령서와 보고서), 상황도, 진지편성도, 전술연구교재, 외국어(조선어⋅영어)교재, 통계표, 개인메모장, 신문, 편지 등으로 다양한데, 이러한 1차 사료는 6⋅25전쟁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몇 건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中國人民志願軍 第60軍 命令(1951.3.17)」를 통해 제60군 예하부대가 安東(現, 丹東)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伊川까지의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데, 제대 이동 시 연대간의 거리를 5里, 대대간의 거리를 2里, 중대간의 거리를 250m로 각각 규정했다. 「中國人民志願軍 第567團 命令(1951.11.2)」은 경기도 연천의 馬良山, 高旺山 일대에 대한 반격작전계획을 작성했는데, 한국군 전사와 교차 분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주둔한 고지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어 전사자 유해 발굴에 일조할 수 있다. 「‘四組一隊’戰術硏究」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중⋅소대급 전술로서 당시 전장에 운용된 전술을 분석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군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한국군과 유엔군 포로로부터 군사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20여 종의 외국어(조선어⋅영어)교재를 편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軍內에서의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이후 6⋅25전쟁에서 경험한 바를 정리하여 이를 간부교육과 부대훈련에 활용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60여 명의 간부를 선발하여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전쟁적경험총결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1년(1954년 8월~1955년 8월) 간의 편찬작업과 다시 1년 간의 감수정리작업을 진행하여 1956년 10월 『抗美援朝戰爭的經驗總結』을 편찬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최초의 6⋅25전쟁사이다. 총4권으로 구성된 책자는 제1권에서 전쟁개관(簡史), 제2권은 전술(戰術), 제3권(上⋅下)은 병단에서부터 소대까지의 전례(戰例), 제4권은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분석(對敵軍硏究)이 기술되어 있다. 내용의 중요성이 국내에서 인식되어 육군사관학교(제2권)와 육군군사연구소(제1⋅3⋅4권)에서 번역되었다. 

  본 서는 사료적 측면에서 볼 때 정전협정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전사서이며, 여러 작전과 주요 전투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제대별 계획과 경과를 구분하여 기술함으로써 작전과 전술적 측면에서의 분석이 가능하다. 특히, 다른 전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224장의 대형 상황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장진호지역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전투 상황도를 예로 들어 확인해보면 「軍首長決心圖(1950.11.24.)」, 「敵軍狀況圖(1950.11.27.)」, 「攻擊戰鬪經過圖(1950.11.27.~12.4)」 등으로 구분하여 전장을 가시화했고, 작전계획과 경과를 비교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상술한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와 『抗美援朝戰爭的經驗總結』의 기록이 실제 사실과 상이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군 전사기록과의 교차 분석작업은 필수불가결하며, 이를 기반으로 6⋅25전쟁 당시 전투상황을 보다 객관적이고 상세하게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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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역사책보다 더 정확한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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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자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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