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32. 국제도시에 산다는 것

in #manamine6 years ago (edited)


1. 만남, 그리고 헤어짐

추수감사절이 되기 며칠 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와 아침 운동을 나갔는데, 할 말이 있다던 친구는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고, 친구는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예상치 않았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고, 그저 친구를 위로하기 바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그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몇 달간 매일같이 함께 운동하고, 아랍어 수업을 듣고, 장을 보러 다니고, 가끔은 가족이 다 함께 식사를 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떠난다니.

이사를 다니다 보면 유독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쉬운 도시들이 있다. 그 도시들의 특징은 모두 타 지역 사람의 유입이 잦다는 것이다. 나에겐 대학생 때의 서울, 싱가포르가 그랬고, 지금의 아부다비가 그렇다.

서울과 싱가포르에서 만난 친구들은 같은 주제로 공부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늦은 밤과 주말까지 모여서 과제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아부다비에 온 후에는 어디서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주 발행되는 무료 잡지에서 커피 모임을 하나 발견했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곳에 사람들이 오긴 할까 싶어서 몇 주를 고민하다 결국 방문한 그곳엔 내 염려와는 달리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들 중에는 몇 년째 그 모임에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나와 같이 처음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부다비에 살고 오전에 시간을 낼 수 있으며 친구를 찾는 여성’, 그뿐이었다. 나이도, 국적도, 취미도 다른 가지각색의 사람들이지만 계속되는 모임을 통해 가까워졌다. 커피 모임이 오전에 여유로운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라면, 이와는 달리 저녁에만 만나는 모임도 있다. 대부분이 전업주부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오전의 모임과는 반대로 풀타임으로 일하는 싱글 여성의 수가 압도적인 그 모임 역시 저녁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 이곳은 친구를 사귀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쉽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도시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졸업 후에도 수도권에 머물게 되는 서울에서의 만남과는 달리, 타국에서 온 사람이 많은 싱가포르와 아부다비에서는 헤어짐도 잦았다. 싱가포르에서의 경우, 4년간 대학을 다니기 위해 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몇 달간 어학연수로 온 사람 또는 1~2학기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도 많았기에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고, 어느 순간엔 나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고 보면 아부다비에서도 벌써 다섯 번째 헤어짐이다. 모두가 일자리를 위해 오게 된 도시인 만큼,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이곳을 떠난다.

서로 의지할 데 없는 타국에서 만난 친구여서일까? 싱가포르에서 알게 된 친구들 중에는 헤어진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연락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싱가포르를 떠난 이후에 다시 봤던 이들도 꽤 있는데, 그들이 한국으로 온 적도 있고, 내가 여행 간 적도 있으며, 심지어 아부다비로 여행 온 친구도 있다. 이번에 떠나는 친구 또한 내가 미국으로 놀러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더니, 그다음엔 추수감사절을, 그리고 이제는 호박과 사과를 따고 핼러윈을 체험할 수 있는 10월이 가장 좋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다른 친구들과 그랬던 것처럼 꼭 내년 가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미국에서, 한국에서, 또는 또 다른 국가에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별은 아쉽다. 이삿짐이 모두 빠진 친구 집을 방문하니 헤어짐이 더욱 실감 난다. 친구는 미국에 가져가봤자 이사비만 더 든다며 소형 가전, 식기류, 식자재를 선물로 줬다. 아무래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친구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2. 아랍어 수업

이제까지 들었던 영어수업은 모두 한국어 또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모국어가 한국이고, 배우려는 언어가 영어이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듣고 있는 아랍어 수업은 내 모국어도 아니고 아랍어도 아닌 영어로 진행되고 있다. 모국어가 아랍어인 요르단, 이집트, 팔레스타인 출신 선생님과, 한국, 미국, 인도, 중국,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 이를 어우르는 방법이 영어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며, 선생님 또한 발음을 영어 알파벳으로 표현하려 해보지만, 학생들이 제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발음을 받아쓸 때 사용하는 문자도 다양하다. 그래서 내가 놓친 발음을 따라 적고자 옆을 바라보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러시아 문자나 한자가 보여 혼란스러울 때가 있고, 내 노트 또한 한국어와 영어 알파벳, 그리고 속칭 번데기 발음, 돼지꼬리 발음 같은 발음기호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하나는 한글이 발음을 표현하는데 꽤 유용하다는 점이다. 물론 한글에 없는 발음은 알파벳이나 발음기호로 대체하긴 했지만, 적어도 한글로 써 놓은 것은 잘못 읽을 가능성이 없다. 반대로 모든 발음을 알파벳으로 쓰고 있는 미국인 친구는, 적은 것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예를 들면 Good은 아랍어로 ‘줴이옛’ 정도로 발음할 수 있는데, 이렇게 써 놓은 나와는 달리 ‘Jaiyed'라고 적어놓은 친구는 이후에 이것이 '줴이옛'인지, '자이옛'인지 '자이예드'인지 혼란스러워했다. "I don’t understand.”는 “Ana mesh fahmeh.”라고 선생님이 소개했지만, 실제 발음인 “아나 미슈(슈와 쓔의 중간 정도이긴 하다.) fㅏ흐메ㅎ” 중 mesh를 메쉬라고 읽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듣는 수업은 선생님의 모국어가 아랍어이긴 하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벨기에에서 온 친구가 듣는 수업은 독일인 선생님이 영어로 아랍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들의 대화에는 더 많은 번역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 학당에서는 어떤 언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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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님 사진 너무 멋져요~ 아랍어 수업을 아랍어로 안하고 영어로 하다니 신기하네요...전 일본에서는 일본어, 미국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배워서요.. ㅎ 제가 알기론 한국어 학당은 한국어로 하는걸로 알고있어요. :-)

오호 그렇군요! 제가 워낙 기초반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역시 한국어학당이나 일본어 수업을 영어로 배우는건 이상하긴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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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그리운 이는 언젠가 꼭 만나게 됨을 믿어!
아랍어 수업 이야기를 들으니...
내 머릿 속에 혼돈의 장이 연상되는데?!ㅎㅎㅎ
난 영어 배워야 하는ㄷㅔ...ㅎㅎㅎ

응 어떻게든 만나긴 하더라. 근데 한 번 보는데 몇 년씩 걸리더라고 :( 언젠가는 보겠지만, 아무래도 SNS로 좋아요를 자주 누르는 사이가 아니라면 근황을 모르니까 단순한 채팅으로 대화를 이어가는건 힘들더라. 근데 또 신기하게도 만나면 마치 며칠 전에 만난 사람마냥 잘 지내. ㅋ

이별은 참 많이 아쉬운 것 같아요.
그리고 적응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인 것 같고....
한국어의 위대함이 다시한번 입증되는 군요^^

네. 표현 못하는 발음이 있지만, 적어도 읽을 때 혼돈을 일으키진 않는다는 점에선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image.png

이 표기법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져 왔다면
좀 더 정확한 영어발음을 한국어로 표기할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ㅋㅋㅋ

ㅎㅎ 그러게요. 저 글자들이 살아있었던 당시의 한국어 발음은 또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지도 궁금해요.

국제도시에 산다는 것은 그리움이 쌓여가는 것이군요 ^^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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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친구를 사귀기 쉬운만큼 헤어짐도 많아서, 어떻게 보면 그래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게 더 쉬운 곳인 것 같아요.

바벨탑이 이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대략 그 동네에 있었다죠..ㅎㅎ

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이동네 아니라고 말씀드리려 보니 이곳만큼 가까운 나라도 몇 군데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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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남들이 안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계시는군요.

네. 새로운 사람과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일은 신나면서도 친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이 많아서 그럴때 마다 알게 모르게 우울해져요.

공감 많이 되네요.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그저 누군가 또 가는구나 오는구나.

나름 선진국이라는 데서는 내가 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 있는 곳에서는 가만 있으면 사람들이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고. 근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만났든 전부 소중해지네요. :)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다가오다니. 그런 환경은 또 생각지도 못했어요.

사람들이 오고 가는건 익숙해지는 듯 하면서도, 또 많이 가까웠던 사람이 간다고 하니까 기분이 다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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