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인생템 #4 "뉴에이지"

in #kr5 years ago (edited)


뉴에이지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가사를 온전히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 딱 하나 있다면 김원중이 부른 "바위섬" 정도. 그렇게 오랫동안 노래 한 곡 딱 알고 있다는 것도 신기할 뿐이다. 심지어 구운몽의 저자와 이름이 똑같다는게 신기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의 이름이 김만중이 아니라 김원중이었다는 걸 안지도 실은 몇 년 되질 않는다.

지독한 암기치는 일상에 많은 불편함을 겪게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노래가사를 암기하지 못한다는 건 그 노래를 몇 번이고 불러서 내 노래를 만들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안그래도 나이많은 분들과 어울리며 불러대던 트로트가 입에 착착 감기던 차에 내 감성을 건드리는 노래들은 정작 부를줄 아는게 없다보니 동세대와는 다르게 좀 독특한 노래들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갖고 있던 카세트는 일본제 아이와였는데, 지금 애플과 삼성폰 유저들 사이에서 작은 경쟁이 이는 것 처럼, 소니와 아이와는 카세트계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랄까. 여튼 1등은 소니였던듯 한데, 아이와도 만만치 않았다. 10만원이 넘는 그 카셋트는 서울도 아닌 부산에선 돈이 있다고 해도 그냥 나가서 사올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일본에 여행가는 길에 나는 아마도 전재산이었을 15만여를 맡겼고, 다행이 사춘기가 막 오기 시작한 12살 소년을 은근히 삥뜯던 여느 어른들과 달리 그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약속을 지킨 그 사람은 전혀 기억에 없고, 주기적으로 코묻은 돈을 삥뜯던 몇몇 어른들은 여전히 선명하다. 나쁜짓을 해야 기억에 남는걸까.

그걸 제법 썼던 것 같은데, 해바라기, 주병선, 신효범, 심수봉 요렇게 4개의 테이프는 냉동실에 넣어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만큼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걸 왠지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네 모서리에 있는 나사못을 다 풀어내고 어린 내 손감각으로는 도저히 다시 돌려 말 수 없는 늘어진 그 테이프들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방에 굴러다녔을 것이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언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주병선과 신효범 테이프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칠갑산 특유의 목소리가 좋아서 그냥 들었고, 신효범은 왠지 슬픔을 세련되게(그 때 느낌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당시 세련이란 말을 가장 자주 썼다. 왠지 그말이 되게 좋은 말인 것 같아서다. 해바라기는 당시 내가 짝사랑했던 한참 누나 - 한 스무살이 훌쩍 많은 - 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리고 40대 초반의 젊은 어른이 맨날 불러서 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심수봉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얼마나 명곡들을 많이 불렀는지를 듣고 나서 구한 것들이었다. 그 나이의 남자어른은 내게 뭔가 우상이었다. 괜히 그의 말투, 몸짓 하나까지도 다 멋있어 보였고, 그가 하느 짓, 하는 말은 다 따라했다. 아마 내 몸짓엔 아직도 30년 전 그의 몸짓이나 말투가 들어있지 않을까.

내가 짝사랑했던 누나는 그 때 서른 여섯이라고 했다. 이제 40을 갓넘긴 내가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누나는 이제 60을 넘겼을 것이다. 너무 많아서 누구나 개띠인줄 딱 아는 58년생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내 마음을 흔든 건 노래라기 보단 CD란 새로운 물건이었다. 내 방앞 아저씨는 어디서 카세트 테이프 데크위에 씨디가 얹혀있는 카세트를 구해왔고, 그도 역시 테이프 세대인지라 그에게 있던 CD는 배호와 한경애 딱 두장 뿐이었다. 눈치로 봐선 그나마 그 두 장도 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아마 그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아침에 그가 일어나고 나면 그방을 치워주곤 했었는데 그 때 그가 돌아오기 전에 난 항상 그 신통한 CD를 틀어보곤 했다. 어디하나 거친 곳없이 매끈하고 무지개 빛이 반사되는 물건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CD로 한경애의 노래를 틀어서 듣고는 그 엄청난 감성적 충격에 거의 주저앉지 않았나 싶다. "옛 시인의 노래"는 그렇게 수없이 익숙했던 심수봉이나 해바라기와 동급이었지만, CD와 최신형 CD 플레이어라는 그 음질은 순식간에 내 심장을 고동치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는 필름이 한참 끊긴다. 아마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애모, 립스틱 짙게 바르고… 머 이런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바위섬과 김종환으로 거의 10년을 버틴 것 같다. 서태지 등으로 대표되는 8-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과 나는 전혀 딴 세상을 살았다. 구닥다리 노래들을 들으며 자란 내게 그런 노래들은 어떤 감흥도 없었다.

내게 장르가 있는 음악이 찾아왔다. 뉴에이지였다. 옴니버스로 묶어 나오는 미라클이란 CD 앨범은 뉴에이지란 장르에 나를 미친듯 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몇 달만에 무려 200여장의 CD를 사재끼는(?) 기염을 토하며 뉴에이지에 미쳤고 2005년 시내에 나갈 기회만 있으면 CD가게를 찾았고, 그 때 처음으로 나간 해외여행 일본과 홍콩에서도 뭘하고 봐야할지를 모르니 서점이나 CD가게에서 두 어시간씩 잘 알지도 못하는 CD를 일단 사고 보는 요량이었다. 그러니 CD처럼 생기기만 해도 일단 사고 보는 지경이었다.

그 때 신나라란 음반사가 있었다. 뭘 주문하면 꼭 샘플씨디나 보너스 씨디를 함께 보내줘서 내가 가장 사랑하던 음만사였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신나라에서 내게 도착하는 택배가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Kevin Kern이 방한하니 그의 CD를 구매한 사람들을 추첨해서 표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15만원짜리 표 두 장을 받는 행운으로 S석이었던가, 여튼 예술의 전당 - 전설의 고향? 암튼 제법 가까이서 그의 공연을 관람했다. 거의 7-8회의 커튼콜이 쏟아졌다. 그는 그 엄청난 앵콜에 반응했고 앞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10여차례 가까이 무대와 무대뒤를 왔다갔다 했다. 그가 한국 공연에서 연주하고 또 한국판 CD에도 담았던 마지막 트랙은 오빠생각이었다. 그 곡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렇게 나는 데이빗 란츠, S.E,N.S., 야니, 케니쥐, 케빈컨, 유이치 사카모도 등 이런 연주들에 깊이 빠져들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오늘의 추억은 2005년 무렵 내가 미쳐있던 뉴에이지 음악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엉뚱한데로 말이 새버렸어요.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 하기로 하고 비록 서론이 너무 길어져 버렸지만, 그냥 몇 곡을 소개하는 걸로. 대체 할게요.


하려던 뉴에이지 이야기는 어디가고 횡설수설 했습니다. 뭐 암튼 뭔가에 미쳐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음악들은 제가 잠들 때도 들어야 잘 잘 수 있었고, 일어나자 마자 들어야 했던 노래목록들 중 유튜브에서 찾아낸 것들입니다. 좋아하는 분이 있으시면 좋겠군요.


[수수단상] 인생템 시리즈


#3 스트리트 파이터 II
#2 영진구론산바몬드
#1 프리마

Sort:  

수수님은 저보다 한참 젊으신데 음악 정서가 멀지 않네요. 뉴에지도 좀 익숙하고요. ㅎㅎ

@dozam님 저랑 음취 비슷하시군용^^ 기본좋습니당~

오ㅎㅎ 저도 뉴에이지 좋아하는데 ㅎㅎㅎ
쉴 때 아니면 잘 때 들으면 크으~~ ㅎㅎㅎ

맞아요 @newiz님 정말 잘 때 정서가 좀 안정되는 것 같아요. 클래식은 좀 산만하고…

Hi @soosoo!

Your post was upvoted by @steem-ua, new Steem dApp, using UserAuthority for algorithmic post curation!
Your UA account score is currently 4.020 which ranks you at #3796 across all Steem accounts.
Your rank has improved 7 places in the last three days (old rank 3803).

In our last Algorithmic Curation Round, consisting of 206 contributions, your post is ranked at #147.

Evaluation of your UA score:
  • Some people are already following you, keep going!
  • The readers like your work!
  • Try to improve on your user engagement! The more interesting interaction in the comments of your post, the better!

Feel free to join our @steem-ua Discord server

포스팅을 읽다가 옛날의 추억에 잠기고 스르륵 빠져 들어갔습니다.
역시 수수님의 글은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himapan님 또 이렇게 칭찬을 고맙습니다^^

냉동실에 두면 더 들을수 있었단 사실을 전 왜 몰랐쬬??
이런.. ㅋㅋㅋㅋ 아깝지만 버려버렸어요.
해바라기는 LP로 있었는데 ㅎㅎㅎ

그러게욥 늘어진게 살짝 쪼그라들어주는 효과가 있었죠~ ㅋㅋㅋ 테이프감기는 5각형 연필로~ 6각인가..? 암튼..

거이 모르는 노래라고 딱 잡아떼봅니다!!
라고 쓰지만 거이 모르는 노래가 대부분이에요~
카세트테입으로는 신해철 김원중이아닌 김원준, 푸른하늘 , 015B을~ CD는 N.EX.T, 이승환, MAMAS&PAPAS, BON JOVI 이런거 들었던거 같아요~ 테이프는 다 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는 100여장의 CD들도 한국갈때마다 엄마는 버린다고 하시네요ㅜㅜ 엄마는 싫어하시겠지만, 카세트나 CD플레이어들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을껄 하는 후회도 잠깐 해봅니다.

@greenapple-bkk님 역시 제가 제목만 들어봤을 법한 노래들이군요… 그 세대에 문주란과 김수희를 듣고 있었으니 쩝… ㅋㅋㅋ

그래서 감성이 좋으신가~~

음악 이야기들이 많을 걸 보니
금요일이군요 ㅎ

저도 함께 추억으로 빠져듭니다~^^
바위섬, 칠갑산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요!!

바위섬 좋아하세요? 우앙~ 칠갑산은 최근 한 10년간은 떠올리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바위섬은 지금도 좋아하는 최애곡이에욥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3188.04
ETH 2570.49
USDT 1.00
SBD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