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관계와 성장편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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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One summer’s day


관계의 끝과 시작,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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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히로
건강해
또 만나자

이 영화에서 맨 처음 나오는 장면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치히로는 그동안 지내왔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해야한다. 기존의 학교친구들은 치히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랜다.

여기서 ‘치히로 건강해 또 만나자’와 그냥 이름 없이 ‘건강해 또 만나자’라고 부르는 것은 체감 상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특별한 순간이 다가올 때면 항상 그 사람의 이름을 함께 불러주곤 한다. 심지어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당신의 존재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사람의 이름이 가지는 가치는 값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그래서일까. 단순히 이름의 관점에서만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몰라주는 곳을 갈 때 불안함을 느낀다. 영화 속의 치히로도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갈 생각에 설레기보다는 전에 살던 곳이 더 좋았다며 하소연한다. 그리고 터널 안의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아예 다른 사람들이 치히로의 이름을 몰라주는 걸 떠나서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이름을 잊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인격 하나가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스팀잇 공간에서 shyuk3655 혹은 제라피라는 이름을 쓰고 활동할 때와 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다른 닉네임을 달은 인격, 그리고 실물공간에서 본명을 쓰고 살아가는 모습은 분명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360도 다른 사람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그만큼 이름은 나와 타인의 관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주변의 친한 지인이 개명한 것을 겪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얼굴과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도 이름이 바뀌게 되면 순간적으로 그 사람이 달라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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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가 유바바에 의해 이름이 센으로 바뀌게 되면서 원래 인격을 잊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극 초반부에 걸쳐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치히로가 이런 위기를 겪고 있을 때 그의 원래 이름을 재확인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하쿠’다. 하쿠는 유바바의 온천에서 치히로가 센의 이름으로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이름을 빼앗기면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며 치히로의 원래 이름을 적어서 준다. 공교롭게도 이 둘의 맨 처음 만남도 (이 시기는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잊기 전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시작되었음을 상기해보았을 때, 이 영화는 관계의 시작이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인 치히로의 꽃다발카드에 적혀있는 친구들의 작별인사에 치히로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관계의 마지막 역시 이름과 함께 마무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오나시와 가면 쓴 사람들

Act1 가오나시

그렇다면 관계를 형성하는 상징적인 요소에는 이름을 제외하고 무엇이 있을까. 이 영화 속에서 특징지어 볼 수 있는 것은 ‘가면성’이 있다. 이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로는 ‘가오나시’가 있는데, 가오나시는 우리말로 직역하면 ‘얼굴이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뜻에 걸맞게 가오나시는 가면을 쓴 외관으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으며 말을 하지도 못한다.

영화 속에서 이런 가오나시의 존재가 보이는 유일한 사람은 치히로로 묘사된다. 밖에서 비를 맞고 있던 가오나시가 눈에 띈 주인공이 ‘온천 문을 열어둘테니 들어와 있으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당연히 가오나시의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몰라주었으므로 치히로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비록 존재감은 없었지만 마법을 부리는 능력은 탁월했던 가오나시는(극중에서 최상급의 마력을 가진 유바바도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그 마력을 이용해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존재인 치히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제1법칙은 ‘상대방에게 집착하지 않기’다. 상대방은 원하지 않는데 자신은 그게 옳은 행동이라 생각해서 그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관계의 선율은 깨지고 만다. 극중에서도 맨 처음 가오나시가 치히로에게 온천수 명패 1개 이상을 준 그 시점부터 둘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이 어긋난 관계는 치히로를 가지고 싶어 했던 가오나시의 집착이 모두 뱉어지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순간 비로소 다시 맞춰진다. 영화 속에서는 그 집착의 크기가 치히로를 제외한 모든 물질을 가오나시가 먹어치우는 것으로 표상된다.

Act2 가면 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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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모두 뱉어냄으로써 관계를 회복한 가오나시는 치히로와 함께 새로운 곳을 향해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곳에서 둘은 온천에서 만나본 적 없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가오나시처럼 실체가 없는 가면성을 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마치 가오나시의 군집처럼 이루어지고 있다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이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면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고 존재를 지속적으로 일깨우는 관심이 필요한데, 현대사회에서는 그 관계가 대부분 표면적인 수준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피상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의외로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반대의 경우란 피상적 관계가 가면성에서 오기 때문에 서로의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살아가자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번 생각을 해보자. 전통주의 시대에 오늘날보다 사람과 직접 살을 맞부딪힐 기회가 많았던 그때를 우리는 ‘사람간의 정이 넘치는 시대’라고 기억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그 시대를 ‘인간의 부정적 본성이 정이라는 이름으로 묻혔던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농촌마을의 긍정적 기능이 작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의외로 그 폐쇄성으로 인해 부정적 사건이 은폐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사회의 가면성이라는 문제를 조금 색다르게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가면을 벗고 서로의 민낯을 공개하면 진정한 관계가 맺어질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가면이라는 게 벗으라 해서 벗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마치 전통적 기업에서 김 과장이 정 대리에게 오늘부터 계급장 떼고 이야기하자는 소리와 같을 정도로 실현성이 없는 이야기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상대방의 적절한 가면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방법일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여지는 의외의 키 포인트가 바로 이 부분이다. 기차에서 내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치히로와 가오나시는 거기서 악독한 유바바와는 달리 선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쌍둥이 언니 제니바를 만난다. 제니바는 가오나시와 처음인 만큼 그에 대해 제법 궁금했을법한데도 굳이 많은 것을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식사를 대접해줌과 동시에 소일거리를 도와달라고 따뜻하게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진심어린 따뜻함으로 인해 가오나시는 자신의 엔딩을 제니바의 집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과정에서 가오나시는 영화의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가오나시’인 채로 남게 된다.

왜 굳이 제니바는 가오나시의 진짜 이름을 묻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도 가오나시의 다른 이름을 묻지 않아도 그의 진가를 확인하는데 무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면을 벗기지 않아도 그의 진짜 모습이 보이는데다가 상대방이 직접 가면을 벗겠다는 표시를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의 가면을 억지로 벗길 의무는 없다. 오히려 적절한 가면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가오나시는 가오나시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성장의 다른 말은 미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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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씬은 치히로가 하쿠의 진짜 이름을 말하는 모습이다. 하쿠의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원래는 강의 신인데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힘을 잃고, 다시 마법을 배우기 위해 유바바의 제자로 들어갔다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치히로로 인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은 하쿠는 용의 모습을 한 껍데기가 벗겨지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본질을 잃어버린 한 존재가 드디어 본질을 되찾았음을 알려주는 영화적 장치이다.

한편 영화 중반부에 하쿠의 도움으로 진작부터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지 않았던 치히로는 비슷한 시점에서 이미 내적성장을 끝마친 상태였다. 당연히 돼지로 변한 부모를 알아맞히는 유바바의 마지막 관문도 손쉽게 통과한다. 이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부모와 함께 원래 살던 현실세계로 돌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하쿠는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알려준다.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어쩌면 관계의 끝에 미련을 남기지 말라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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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치히로는 중간에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만, 그마저도 무사히 넘겨 원래의 세계로 이어지는 터널에 다다르게 된다. 이 순간의 치히로는 분명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한 단계 성장한 인물 그 자체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관객이 치히로를 성장한 아이로 보는 순간 하나의 장치를 따로 마련한다. 그게 극의 마지막 부분에 엄마의 팔을 꼭 붙잡고 터널 밖으로 나아가는 장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인물의 성장물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라 생각한 시점에서 다시 미성숙함을 나타내는 장면을 넣은 것이다.

최근의 영화에서 성장 신화라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성장하면 뭐든지 좋다’ 라고 여기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자신을 보면, 너 성장했냐? 라고 물어보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예전보다는 조금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으로, 나의 경우 이 60년, 그저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위의 내용처럼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 이 장면이 의도된 것임을 암시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성장이나 미성숙을 떠난 어떠한 각 개인의 고유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커가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10대에는 20대 인생선배들이 하늘 같아보였는데 20대가 되어보니 별거 없이 나는 똑같았고, 또 그 다음 30대, 40대, 50대도 마찬가지였다고. 경험과 고민을 통해 사람은 늘 성장해나가는 것이 확실하지만, 또 어쩔 때보면 우리는 암흑 같은 터널 속에서 여전히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말하는 성장과 미성장은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시리즈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편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원령공주(1997)上편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원령공주(1997)下편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자본과 노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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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정말 분석 잘하시는 것 같네요. 배우고 갑니다.

미약한 글을 좋게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처음 봤을 때 정말 좋았던 작품인데, 너무 오래전에 봤기 때문인지, 기억 나지 않는 것도, 미처 몰랐던 것도 많네요. 꼭 다시 봐야겠어요!

네 저도 글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봤는데 재미있더라구요!

진심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준다는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 대해 겉으로만 관심 있는척 했던것은 아닌지... 특히 돌아보게 하네요. 차분하게 다시 한번 봐야겠네요. 포스팅 고맙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그러게요 저도 글로는 쉽게 저런 말 썼지만 막상 진심으로 남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참어려운 거 같아요. rideteam님도 좋은주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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