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자본과 노동편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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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OST-너를 태우고
오늘의 지브리 음악은 포스팅 영화와는 다른 음악으로 선정해 보았습니다. 참고로 1분 20초 무렵부터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라는 생각을 하신 분들은 야구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 곡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역으로 활동했던 전설의 야구선수 이승엽의 응원가로 쓰인 곡이기 때문이죠.


역대 일본 흥행수입 1위(애니메이션만이 아닌 모든 장르 포함)
일본 애니메이션 북미 흥행순위 7위
제75회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작
제52회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최우수 작품상
BBC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선 中 4위

모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붙는 타이틀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대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대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전작 [원령공주]의 단점이었던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에서 탈피한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호평을 받았던 이유는 어린이를 감동시키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잘 살려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표현해왔던 환경과 여성문제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절묘하게 녹여냈으며, ‘자본’과 ‘관계(relationship)’라는 메시지를 추가적으로 부여했다. 이번 편에서는 그중 ‘자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980년대의 일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하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는 역시나 자본에 관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1980년대의 일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만들어진지 꽤 지났을 무렵, 지브리 측에서 이 영화는 19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를 고려해서 만들었다고 아예 공언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내용을 알아보기에 앞서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보는 1980년대 일본의 상황을 간단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일본은 일본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최고라 불릴 만큼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기업이 사람을 뽑기 위해서 면접비로 평균 2만 엔의 돈을 줬는데, 일부러 취업을 안하고 여러 기업에 면접비만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오일쇼크 이후 엔저현상과 함께 수요량이 뒷받침되는 상태에서 절대적인 공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며, 이자율과 인플레이션율이 모두 이상적인 골디락스 경제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급기야 이 당시 일본의 부동산 재벌인 요코이 히데키가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인수한 사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일본의 경영방식을 벤치마킹하려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배척하기도 했다. 일본이 미국의 경제력을 뒤쫓는다는 것은 주도권이 그만큼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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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이 시기 개봉했던 미국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년 개봉)]에서 묘사하는 2019년의 모습을 보면 그런 심리가 잘 녹아들어 있다. 작품 속 배경은 환경오염으로 황폐화된 미국 LA의 모습을 다뤘는데도, 굳이 대형광고판에 일본인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1980년대 당시의 일본에 대한 미국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장면이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일본에 대한 임팩트로 인해 할리우드에서는 일본풍이 묻어나오는 영화가 다수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것처럼 1980년대 일본 역사 최고의 호황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다. 플라자 합의로 인해 달러강세 기조가 꺾이게 되고 일본의 엔저현상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바뀐 분위기에 대해 적응을 할 수 없었던 일본은 그동안 누렸던 호황을 전부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가격과 주가는 연일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의 미숙한 대응으로 일본경제는 오늘날까지 장기침체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터널 바깥의 이야기

단카이 세대의 분위기를 많이 이어받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성상, 19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는 도저히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반자본주의적인 생활을 지향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인데, 당시의 생활상은 그런 그의 지향점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전, 반자본주의, 아나키스트적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 [붉은 돼지]를 보면 이런 그의 지향점을 잘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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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순수히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지향점이 아니라 대척점을 고발하는 성격이 짙기 때문에 흘러가는 양상이 [붉은 돼지]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 주인공 치히로의 아버지가 몰고 있는 자동차를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당시의 모습을 은밀히 고발하려는 장면이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고급외제차로 유명한 독일의 어떤 차량이다. 그리고 터널 안의 다른 세계로 들어가면서 센의 아버지가 주변의 건축물에 대해 ‘90년대에 계획되었다가 버블경제로 망했다’라는 대사가 스쳐지나가듯 나온다.(보편적으로 80년대 버블경제라 불리지만 90년대 초까지 진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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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본격적인 비판은 터널 너머의 세계에서 주인이 없는데도 음식을 그냥 먹는 모습, 그로 인해 돼지로 변하게 되는 모습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장면들로 인해 자동차 장면과 건축물 설명 장면이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중에 대담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치히로의 부모를 아예 대놓고 80년대의 브랜드 돼지 놈들을 상정하고 그렸음을 밝혔다.

터널 안의 이야기

갑작스럽게 부모가 돼지로 변한 낯선 세계에서 치히로는 살아남기 위해 그 구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유바바의 밑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이 대목에서 만약 치히로가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했으면 바로 석탄이 되어버렸을 것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한 바 있다. 그의 작품 의도에 따르면 애초부터 터널 안의 세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였던 것이다. 앞서 치히로의 부모도 그 세계에서 일을 하지 않고 비상식적으로 음식을 먹은 죄로 인해 돼지로 변한 바 있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는 터널 안의 세상을 통해 일한만큼 받아야한다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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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도 터널 안의 판타지를 통해 배출해낸다. 인간의 탐욕으로 오물 범벅이 된 강의 신이 유바바의 온천에 방문하는 장면, 돈 앞에서 냉혹했으나 자신의 아들만은 유난히 챙겼던 유바바가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황금이 흙가루로 변하는 모습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각각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캐피탈리즘적인 모습과, 물질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향해왔던 그의 가치관이 잘 녹아든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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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하면 유바바 온천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현실 어딘가의 한 장면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치히로와 함께 일하는 동료 린의 대사에서 그런 현실을 느낄 수 있다. 평생 온천이 있는 동네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린은 여기를 그만두고 언젠간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닷가 마을에 갈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린을 비롯한 온천의 노동자들은 유바바와의 계약으로 인해 평생 일을 해야 하는 처지다. 게다가 영화의 전개상 린이 해당 대사를 하던 시점은 강의 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사금을 유바바가 싹쓸이해간 시점이었다. 물론 유바바는 경영자의 위치에 있기에 수익을 어느 정도 가져가는 게 맞지만, 영화 안에서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보상은 그저 ‘맛있는 밥 한 끼’정도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렇게 챗바퀴처럼 굴러가는 온천 안에서 린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가능성은 만무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다시 터널 바깥

애초에 터널 안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치히로의 아버지에게 생겨난 일종의 욕망 때문이었다. 치히로는 말렸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시밭길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마치 잘못된 걸 알면서도 탐욕으로 인해 주변의 자연과 참된 가치들을 짓밟고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터널이라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고, 무언가에 이끌린 사람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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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제 다시 터널 바깥이다. 유바바가 시험하는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하고 돼지로 변했던 부모를 인간의 모습으로 만나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바깥세계로 돌아갈 때는 한 가지 지켜야할 주의사항이 있다. 터널을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리스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앞서 말한 터널 안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를 보면 그보다는 탐욕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망을 끝까지 참아내고 터널을 통과하는 치히로의 모습과, 영화 초반부에 치히로의 말을 무시하고 터널 안으로 질주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널 밖->터널 안->터널 밖의 서사구조가 단순히 자본과 탐욕이라는 오로지 하나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는 없다. 만약 오로지 자본과 물신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였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오늘날 이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원령공주]에서처럼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매니악한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작초기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10살짜리 딸아이도 볼 수 있는 영화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 아닌, 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설정해야만 했다. 바로 ‘관계와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미야자키 하야오 시리즈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편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원령공주(1997)上편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원령공주(1997)下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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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네요. 소위 불노소득에 관한 비판이 있었군요.
일본과 미국이 바로 그 부동상 거품에 의해서 휘청 거렸고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죠.
조물주 위에 건물주. 초등학생들 꿈이 건물주. 같은 우스운 현상도 보이니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됩니다.

단카이 세대는 큰 틀에서 한국의 민주화세대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불로소득에 대한 비판도 사실상 그런 가치관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죠. 감사합니다:)

오늘 다시 찾아서 보고싶네요.
미야자키 만화는 뭔가 느껴지는게 많아서 보고나서도 오래가는 것 같아요.
만화 자체도 재미있고
좋은 분석 글 잘봤습니다.

네 워낙 꼼꼼하게 작업하는 감독이라 더 관람 포인트가 많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ㅎㅎ

제라피님, 글을 가끔 올려주시기 때문에, 아주 음미해서 읽었습니다!ㅎㅎ
영화를 봤던 당시에는 판타지라고 생각했는데, 시대상이 녹아들어있었군요..!!

경아님 감사합니다. 사실 천천히 음미하게 하기 위한 저의 큰그림이라 말하고 게으름이라 읽습니다ㅎㅎㅎ 단순한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니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남들보다 더욱 시대상을 활용하는 것 같네요.

반-자본주의 심리는 헐리웃이나, 대한민국 영화계, 그리고 여러 국가 영화계에 아주 뿌리박혀 있지요. 저는 시장주의를 매우 지지합니다만, 자본 앞에서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비판하는 컨텐츠는 꼭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자본만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

맞습니다. 그런 균형감 있는 자유지선주의자라서 제가 더 로스님을 응원합니다:)

무릎을 탁! 치고 봤습니다. ^^/
이렇게 볼수 있구나 하구요.
저는 치히로의 성장쪽에 더 중심을 두고 봤었거든요. ^^

사실 더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는 쪽은 성장쪽이죠 ㅎㅎ

와우!!! 정말 재미있는 글입니다! 어렸을적 디즈니와 지브리, 참 좋아했었는데, 잘 읽고 갑니다.

저도 디즈니와 지브리 애니메이션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학 때 '중국문화 바로알기'라는 수업시간에
조금은 생뚱맞은, 하지만 정말 흥미롭게도
교수님이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동양사상을 풀어주셨던 게 기억이나요-
무려 9년전 ㅠ 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정말 재밌게 ㅎㅎ 공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부터 느꼈지만...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한 영화인듯해요-
이번 글을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네요!

오 센과치히로로 동양사상풀이라니 재밌네요 ㅎㅎ 오랜만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농님!

일본에 가서 미야자키 하야오 박물관에 들렸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는 ...

멋진 포스팅입니다.
비록 5일전 것이지만 리스팀 해갑니다.
감사합니다.^^

요호님도 오랜만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스팀도 감사드려요^^

Hello @shyuk3655, thank you for sharing this creative work! We just stopped by to say that you've been upvoted by the @creativecrypto magazine. The Creative Crypto is all about art on the blockchain and learning from creatives like you. Looking forward to crossing paths again soon. Steem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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