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학파 이론 I] 카를 맹거의 주관주의 가치론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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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의 가치는 재화 속에 내재되어있는 속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가치는 각각 개인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매기는 중요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카를 맹거(Carl Menger)

안녕하세요. @rothbardianism 입니다. 오늘부로 여러분들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철학/역사학을 비롯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을 여러분들께 소개할까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할 이론은 바로 오스트리아 학파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는 카를 맹거 선생님의 주관주의 가치론(Subjective Theory of Value)입니다.

사실 주관주의 가치론에 대해서 설명하기 이전에 카를 맹거가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야기 해야할 거 같은데요.

당시에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던 때라, 모든 가치는 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의 양(Quantity of Labor)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을 시기였습니다.

뭐, 맹거도 처음엔 그것이 정설이었다 보니, 그렇게 받아들이는듯 했습니다만, 오스트리아 수상실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경제 변동 및 가격 변동 에 대한 조사를 했고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쭉 조사를 해보니 실제 가격의 변동전통적인 가격 변동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맹거는 고민을 하다가 경제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론은 개인의 행동과 선호를 분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관주의 가치론의 시초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맹거는 자신감이 생겨 당시에 오스트리아 경제학계의 주류로 여겨졌던 역사학파와 맞짱을 선포하게 되는데요. 맹거는 <사회과학 방법과 정치경제학>과 <독일 경제학에 있어서의 역사주의의 잘못> 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역사주의의 대빵인 구스타프 슈몰러(Gustav von Schmoller)에게 보내게 됩니다. 맹거의 도전을 시작으로 맹거와 역사학파의 이론적 전쟁은 시작되고, 이를 방법론 논쟁이라고 합니다.

맹거는 방법론 논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빈 대학에서 자기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관주의 가치론을 기반으로 경제학적 현상들을 설명하는 오스트리아 학파가 됩니다.

아니 그니까 주관주의 가치론이 뭐냐고....

자, 지루한 역사 공부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주관주의 가치론(Subjective Theory of Value)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 그니까 개개인의 중요성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은 알겠는데.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할 사람이 필요하니 제가 있는거겠죠? 그럼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제 옛날 얘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제가 중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풋풋했던 시절이 있었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에야 제주도하면 '효리네 민박' 이야기들 하시겠지만, 당시엔 제주도하면 한라산이었죠. 저도 당시에 한라산 정상을 올라가기 위해서 학우들과 열심히 등산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라산 정상에 도착하고 나니, 목이 너무 마르더군요. 하지만 어리석은 학우들과 저는 차마 물을 가져올 생각은 못했던 겁니다(바보들..). 그런데 참 세상 좋아졌어요. 한라산 정상에서도 물을 팔더라는 겁니다. 학우들과 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기라도 한듯 물 파는 아저씨한테 달려가서 물 세 병을 달라고 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아저씨. 참 문제입니다. 자기 아들뻘 자식들에게 기존 물의 가격보다 3~4배 가격을 받으시더군요. 그 때 당시에 편의점에서 500원 하던 물이. 아니 한라산 정상에 올라가니까 2000원을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래서 화가 난 저는 "아저씨 이 물 편의점가서 사면 500원짜리 아니에요? 너무하시네.." 라고 반문을 했죠. 그러자 아저씨가 "그런데 여기엔 편의점이 없잖아." 라고 하시더군요. 참 너무하죠? 그렇게 화가나서 퉁퉁 거리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산악회 회원분들은 기꺼이 2000원을 주고 물을 구매하시더군요.

결국 그렇게 퉁퉁거리던 저도 너무 목이 마른 나머지 2000원에 생수를, 5000원에 라면을 사서 먹어버렸습니다(엄마 미안해).

왜 이런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재화에 매기는 가치는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바뀌기 때문입니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이 매기는 생수와 라면의 가치는, 편의점과 상점이 즈리즐비 한 곳에 있는 사람들이 매기는 생수와 라면의 가치보다 더 큽니다. 왜냐하면 일단 한라산 정상에 있는 생수와 라면의 공급량은 편의점과 상점이 즈리즐비 한 곳 보다 현저하게 적을 수 밖에 없는 반면, 생수와 라면에 대한 수요는 한라산 정상에서 더 많기 때문이죠(한라산 정상을 올라가기 위해 열심히 땀 흘렸고, 칼로리 소모도 많았으니까요).

그 못된 아저씨가 2000원에 생수를 팔아도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 이유는 어차피 제가 구매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충분히 생수를 구매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그 수많은 생수와 라면을 들고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온 이유는, 한라산 정상에선 몇 배 비싼 가격에 생수와 라면을 팔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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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생산비용이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생산비용을 결정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한라산 정상에서도 시원한 물을 마시고 따땃한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한라산 정상에선 평상시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받고 생수와 라면을 팔 수 있다.'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생수아저씨는 나쁜, 못된 아저씨가 아니라 목 마를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그 많은 양의 물과 라면을 가져와주신, 고마운 아저씨였던 것이죠. 오스트리아 학파에선 저 못된 아저씨를 '기업가(Entrepreneur)'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많은 양의 물과 라면을 제공하자는 생각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라고 합니다.

이제 누군가가 주관주의 가치론에 대해서 물어보면, 당시에 자식뻘인 저에게 물과 라면을 몇 배 비싼 가격에 팔아버린 아저씨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땐 그 아저씨가 미워 보였지만, 지금은 저의 훌륭한 소재(?)가 되어주셔서 참 감사한 마음이죠.

여러분도 이젠 주관주의 가치론에 대해서 이해 하셨나요? 조금 재미있고 쉽게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드리고자 했는데 쉽게 들렸는지 잘 모르겠네요. 다음엔 뵘바베르크의 시간선호와 이자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재미있게&유익하게 읽어주셨다면 upvote해주시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셔요~ ㅎㅎ

내일 삼일절인데 즐거운 시간 보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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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참 술술 읽히는 글입니다. 덕분에 행복한 글 읽기는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미약한 보팅 드립니다. 한 가지 의문은 한라산 정상의 생수, 라면 파신 기업가분 이야기인데요. 무형의 가치에(더 나은 서비스같은) 대한 측량하기 힘든 노동(고민, 계획, 실행과 같은)경우는 몰라도 그 기업가분은 생수와 라면을 더 싼 값에 사서 패킹을 하고 더운 여름 날 새벽에 땀 흘리며 정상까지 운반하고 자리를 잡고 잘 늘어놓고 작게라도 파는 물건 이름과 가격도 써놓고 등등, 그런 노동을 계량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투입된 노동이 가격에 꽤나 영향을 줬을 것 같은데요. 물론 쓰다보니 편의점 즐비한 곳 길거리에서 그런 노동을 했다고 한라산 정상만큼 가겨을 매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감사합니다

그렇죠. 그런 노동을 들인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맹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생수를 비싸게 파는 건 그런 노동들이 있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정도 가격에 팔 수 있기 때문에 기꺼이 그정도 노동을 감수 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라는 이야기이죠. 그 아저씨는 수 많은 물과 라면을 들고왔지만, 만약에 다른 아저씨가 비상시에 쓸 용으로 자기 가방에 라면 한 개랑 엑스트라 생수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 생수와 가방은 똑같이 3000원, 5000원에 팔릴 수 있다는 것이죠. 수많은 물과 라면을 들고온 아저씨가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투입했지만, 그 아저씨나 그냥 가방에 혹시나 몰라 물 한병을 더 가져왔던 아저씨나 똑같은 가격에 물을 팔 수 있다는 사실이, 노동의 양은 가격을 결정하는데 요소가 될 수 없음을 잘 나태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성스런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내용이 좀 더 가까와집니다. 그렇군요. 결국 주관적 가치군요.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물을 구매하려던 저는, 그 아저씨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를 감안하여 3000원에 구매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이 마르고 배고프다는 '상태'가 엄연히 존재했고, 이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를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3000원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 아저씨도 3000원이란 가격을 제시한 이유가, 3000원 이상으로 올리면 그 물에 대한 수요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은) 생기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상황과 장소에 따른 개개인의 선호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못된 아저씨'가 전을 펼려고 하던 중에. 한 '착한 산악회원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생수와 라면을 지고 나타나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줍니다. 엊그저께 성과급도 받았고 운동 삼아 지고 올라온 것이니 자기는 돈 없는 사람들이 허기와 갈증을 채우는 것만으로 주관적 욕망을 충분히 채웠다고 말합니다. '운수 좋은 날'을 잡쳐버린 못된 아저씨는 '정신나간 사람'이라며 착한 아저씨를 산꼭대기에서 밀어 버렸습니다. 못된 아저씨는 스스로를 합리적 개인, 착한 아저씨를 비합리적 개인, 그 산을 '시장'이라 불렀습니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산을 시장이라고, 아니 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제 생각에 산은 그저 산입니다. 필자님의포스팅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 오스트리아 학파와는 다른 제 생각을 실례를 무릅쓰고 전해드렸습니다. 아무래도 별도의 포스팅으로 다루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계속 추가하게 되는데요. 오스트리아 학파는 못된 아저씨가 착한 아저씨를 밀어버린 행위가 이루어진 그 상황은 시장이 아니라고 할겁니다. 시장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상호간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이지, 남에 대한 보복을해서 상대방의 생명권을 빼앗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죠.

사실 더 나쁜 건 그 산에 올라온 깡패 아저씨 입니다. 그 아저씨는 못된 아저씨에게 갑자기 "자리세"를 내라며 가지고 있는 라면과 물의 30%를 강제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 착한 아저씨도 누구 허락을 받고 그걸 나눠주냐며, 착한 아저씨가 나눠준 물과 라면의 수량 20%를 뜯어가죠. 그러면서 자기는 착한 아저씨와 못된 아저씨 둘 다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정부'죠.

논의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데요. 실례를 무릅쓰고 제 생각을 보태자면 어떤 정부, 어떤 국가냐가 중요한 거 같습니다. 돈 없는 사람에게 물과 라면을 나눠주는 착한 아저씨가 정부일 수도 있고, 값비싼 물과 라면을 사먹지 않도록 물과 라면을 미리 공동구매하는 산악회 운영진이 정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폭리를 취하는 못된 아저씨를 규제하는 공원 관리자도 정부일 수 있겠죠... 정부는 시장 안팎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행위를 '반시장적'이라는 이유로 금기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의문입니다.

흠.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돈 없는 사람에게 물과 라면을 나눠주는 아저씨도 착한 척하는 아저씨일 뿐. 그 돈은 다 그 아저씨가 '관리'해준다는 명목하에 사람들에게 삥을 뜯어서 마련하죠. 세금이라는 시스템은 애초에 사람들에게 동의없이 가져가는 시스템 입니다. 저도 지금 제 소득세를 내는데 한번도 정부는 저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양해를 구한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착한 척 하는 아저씨'는 자기가 착한일을 하는데 보태지 않으면 힘을 이용해 마구마구 때리는 아저씨죠. '내가 가난한 사람 돕겠다는데 니가 돈을 안주냐." 면서 말이죠. 정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강제성을 띄는 존재입니다. 애초에 재원 마련의 방식부터 강제성을 띄는게 정부입니다. 정부는 필연적으로 자발적인 질서를 무너트리는 참여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글쎄요. 그 착한 아저씨가 못된 아저씨의 사업을 망하게 할 정도로 라면과 물을 가져올 수가 없죠. 아저씨는 단지 운동에 도움이 되는 양 정도나, 성과급으로 구매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지 설 수 없는 제한적인 양만 제공할테니까요. 그 리고 시장에서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재화를 공짜로 제공하는 참여자는 없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예시는 사실상 공산주의에도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인 예시는 모든 사상에도 들 수 있는 것이죠.

대학가에서 원룸 임대를 하는 사업자들을 '못된 아저씨'에, 대학생들을 위해 공공 기숙사를 건설하려는 공공단체를 '착한 아저씨'에 비유하면 어떨까요? 후자는 비합리적인 행위로 시장원리에 맞지 않으니 배제되어야 할까요? 착한 아저씨에 대항한 못된 아저씨들의 시위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예외적인 일anomaly로 다루기엔 이런 사례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더 늘어나지 않을까, 주류 경제학의 예측이 들어맞는 예를 오히려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의문은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것입니다. 댓글로 연재의 맥락을 어지럽혀 드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혹시 그랬다면 널리 양해해 주시길...^^;;

흠. 애초에 공공단체에서 제공하는 기숙사가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게 맞나요? 그 공공단체는 예산을 어디에서 받을까요. 깡패 아저씨에게 받겠죠? 죄송합니다만, 주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시장경제가 아닙니다. 정실자본주의인게 강하지요. 오스트리아 학파는 주류경제학이 아닙니다.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지요. 애초에 공공단체는 시장이 아닙니다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장과 정 반대의 개념인 것이 공공단체 입니다. 이는 정부가 시장의 참여자라는 소리와 일맥상통 합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결국 그 '착한 아저씨'도 남의 돈 강제로 빼앗아서 착한척을 하는것에 불과하죠. 그리고 예를 드신 거 처럼 상대방을 밀어서 죽이는 일은 정말로 예외적인게 강합니다. 그리고 지금 가지신 의문은 어차피 제가 오스트리아 학파인지라 저에 대한 의문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이러한 피드백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아, 그리고 한 말씀 더 드리면 오스트리아 학파는 산을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장소를 시장이라고 정하지도, 시장이라 말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시장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판매자가 있고 수요자가 있다면 그것이 시장이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도 재화와 재화를 자발적으로 교환하는 그곳이 바로 시장이 되는겁니다. 그 못된 아저씨가 착한 아저씨를 밀어버린게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도태되어 그랬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신거 같은데.. 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 '보복'이라는 것이 시장에서만 일어나는가.. 시장은 누군가가 부르고 싶어서 시장이 되는 것도, 부르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그냥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못된 아저씨가 착한 아저씨를 산 정상에서 밀어버린다는 표현은 '경쟁에서의 도태'가 아니라 착한 아저씨는 오스트트리아 학파의 전제에 부합하는 '합리적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논의에서 배제된다는 의미로 쓴 표현입니다. 여기서 물론 '합리적'이란 '계량화를 통해 예측가능한'이라는 의미이구요. 그리고 여기서 '시장'이란 당연히 오스트리아 학파가 정의하는 '시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오스트리아 학파의 모형이 기본 전제부터 현실의 시장(=산)을 반영하기에는 협소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애초에 오스트리아 학파는 공공단체를 시장 참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공단체는 애초에 민간 기업이랑 경쟁할 수가 없는 상대죠.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부터 이미 시장 참여자와 많이 다르구요.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파는 계량화를 통해 예측 가능한 무엇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스트리아 학파는 주류경제학과 많이 다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거나 예상하지 않습니다.

정성들여 써주신 글을 감사히 읽습니다. 서두에서 만난 궁금한 점을 여쭙니다.

[멩거는] 오스트리아 수상실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경제 변동 및 가격 변동 에 대한 조사를 했고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쭉 조사를 해보니 실제 가격의 변동과 전통적인 가격 변동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죠.

적어 주신 이 구절에서 '실제 가격'과 '전통적인 가격'이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가격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전통적인 가격은 옛날 자료상에 남아 있는 가격을 뜻하는 것이고, 실제 가격은 그것과 다르게 최근의 가격을 뜻하는 것인가요?

정확하십니다. 역사학파는 역사에 일어난 변동들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봤는데 그들이 세웠던 그 기준들과 실제 일어나는 가격변동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죠!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부분을 보니 님께서 의도하신 내용을 조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역사학파가 세웠던 그(아마도 가격 변동에 관한) 기준들’과 ‘실제로 일어나는 가격 변동’이 서로 달랐다. (A)

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적으신 본문상의 문장,

실제 가격의 변동과 전통적인 가격 변동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B)

는 의도하신 바(A)와는 아주 다르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 답해 주신 A에 준해서 B를 읽자면 ‘전통적인 가격 변동’이란 말은 ‘역사학파가 세웠던 그 기준들’을 뜻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표현(‘전통적인 가격 변동’)은─적혀 있는 말 그대로 읽자면─‘과거 기록상의 가격 변동’을 뜻합니다. 반면에 후자의 표현(‘역사학파가 세웠던 그 기준들’)은 ‘가격 변동에 관한 역사학파의 해석이나 이론’을 뜻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당초 본문에 적으신 B와 답해주신 A는 의미가 전혀 다른 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었던 일차적 이유는 한국어를 사용할 때, 대체로 ‘실제 (가격)’라는 말과 ‘전통적 (가격)’이라는 말을 서로 대립적인 의미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영어로 적는다면, tradition)’에 대립될 만한 말은 ‘새롭다(new)’거나 ‘최근(recent)’이고, ‘실제(true, actual, practice)’에 대립될 만한 말은 ‘거짓(false)’이거나 ‘이론(theory)’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님께서 ‘전통적인 가격’에 대립되는 의미로 쓰신 것으로 보이는 ‘실제 가격’에 대하여, “‘실제 가격(영어로 적는다면, actual prices)’이 ‘최근의 가격(recent prices)’을 뜻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드린 것이거든요. 그런데 정작 님께서 주신 답은,

  1. “정확하다!(즉, ‘실제 가격’은 ‘최근의 가격’을 뜻한다)”라고 느낌표를 붙여 확답을 하시더니, 곧바로
  2. (실제 가격은 ‘최근의 가격’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가격 (변동)’이라고 전혀 다른 답을 하고 계십니다.
  3. 게다가 님께서 본문에 적으신 ‘전통적인 가격 변동’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와는 다르게 ‘가격 변동에 관한 역사학파의 해석이나 이론’을 뜻한다고 이해해야 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동문’을 하니, 님께서 ‘서답’을 하셨습니다. 언어로 의사 소통을 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독자들이 저 문장을 읽고 어떻게 이해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조금 듭니다.^^

아니요. 역사 학파는 말 그대로 과거에 있었던 가격 변동대로 현재에도 일어난다고 본 것이죠. 과거 기록상의 가격 변동을 기준으로 현재에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본겁니다. 한국어를 떠나서 전통적이랑 실제 가격이라는 말을 대립적으로 쓰려던게 아닙니다; 과거 기록상의 가격 변동과 실제로 그 때 당시에 일어났던 가격 변동이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뭔가 님께서 정리를 하시려고 다신 댓글이 저는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글의 의도가 비꼬려는 의도로 들려서 기분이 썩 좋지는 못하네요(님께서 그런 의도였든 그런 의도가 아니였든, 가치는 주관적인지라 저에겐 불쾌하게 들려서요.).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역사학파는 과거에 일어났던 가격 변동을 현재에도 적용했고, 맹거가 본 것은 당시의 가격 변동과 과거의 가격 변동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역사학파의 접근법이 잘못되었다고 느낀겁니다. 이해 되셨죠?

어이쿠, 비꼬다니요? 그건 님의 오해십니다.

길 가다가 누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해서 그게 무슨 뜻이냐, 이런 뜻이냐 저런 뜻이냐라고 묻는 행위가 비꼬는 것인가요?

지금 님은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입장에서 그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어 독자에게 알고 계신 것을 한국어로 전달하여 설명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저는 본문상에 적어 주신 다음 문장 X를 읽고 거기 등장하는 용어들에 대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고 님께서 주신 답글이 본문과 대비해 볼 때 여전히 혼란스러운 점이 있어 다시 제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대한 님의 답글에서 아래 Y와 같은 결론적 요약을 답해 주셨습니다. 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몰랐었으니까요.

X: (멩거가) 쭉 조사를 해보니 실제 가격의 변동과 전통적인 가격 변동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죠.

Y: 역사학파는 과거에 일어났던 가격 변동을 현재에도 적용했고, 맹거가 본 것은 당시의 가격 변동과 과거의 가격 변동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역사학파의 접근법이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님의 글을 읽는 한국어 독자가 본문상에 있는 X만을 읽고서 X가 뜻하는 바가 Y라고 알 수 있을까요? 본문의 다른 곳에서 Y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면, X에 대해 질문을 드린 저라는 독자는 독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게으름을 범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님께서 애써 적어 주신 게시물 본문의 나머지에서 Y와 같은 내용을 알 수 있습니까?

한국어 독자 100명이 이 글을 읽는다고 치면, 문장 X와 나머지 본문을 읽고서 그중 몇 명이나 Y라는 내용을 알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지식이 님처럼 풍부하지 않은 독자 입장에서 말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도저히 X를 읽고 거기에 Y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리면서 제가 유추할 수 있는 선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님께서 어떤 글을 쓸 때, 님이 알고 계신 모든 내용을 알지 못하면 질문도 하지 말아라. 이런 입장을 취하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흠. 그렇군요. 저도 그런 의도에서 말씀 드린 건 아닌데. 말투가 되게 공격적이셔서요. 말씀하신 바 이해했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께서 저 점을 그냥 넘어가신 이유는, 저 부분을 이해하시지 못하셨더라도 맹거의 가치론을 이해하는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일거라 사료됩니다. 그런데 제가 불쾌했던 건 느낌표 하나하나 까지 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씀하시는 뉘앙스가 꼬투리 잡기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과 댓글 나눈거 보시면 알겠지만, 다른 분들이 Clarify 하시려는 부분에선 전 다 댓글 달아드렸는데, 님의 댓글은 뭔가 기분이 영 좋지는 못하네요. 뭐 제 개인적인 주관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가지 오해를 더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느낌표 하나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꼬투리 잡기로 느끼셨다고 하셨는데, 반대로 그 느낌표를 포함한 발화에서 저라는 독자가 느낀 느낌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애초에 제가 드린 질문은 “전통적인 가격은 옛날 자료상에 남아 있는 가격을 뜻하는 것이고, 실제 가격은 그것과 다르게 최근의 가격을 뜻하는 것인가요?”였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이 두 가지였습니다. (1) 정확하다! (2) '실제 일어난 가격 변동' vs. '역사학파는 역사에 일어난 변동들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봤는데 그들이 세웠던 기준들' ...!

(1)번의 말씀은 제 질문에 대한 강한 긍정이셨고, 그중 하나는 ‘실제 가격 = 최근의 가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의 내용까지 포함하면, 이 등식은 ‘실제 가격 = 최근의 가격 = 실제로 일어난 가격 변동’으로 확대됩니다. 역기서 ‘실제로 일어난 가격 변동’은 '최근의 가격 변동’도 포함하고 ‘실제로 과거에 일어난 가격 변동’도 포함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니 님의 본문과 답변마저도 모두 다 혼란스러웠던 것인데, 이렇게 혼란스러운 답변을 하는 글쓴이라면 제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어도 무시하는 답변을 한 것이라고 여겨지더군요. 만일 그처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하는 답변이었을 것이라고 치면, 어떻게 명징한 것인양 느낌표를 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의 의도를 님께서 알아보시기에 더 분명해질 수 있도록─제가 보기에는 혼란스러운─각 어휘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을 더 드렸던 것입니다.

댓글 연쇄가 길어지니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느끼신 불쾌감에 대해 일부나마 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라스바디언님! 기다리던 포스팅이었습니다.
알기 쉬운 예시까지 들어주셔서 주관주의 가치론을 잊어버릴 수가 없네요 ㅎㅎ 역사 이야기도 재미있으니 계속 덧 붙여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앗!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올려주시는 운동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역사 이야기도 같이 첨부하여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선생님! ^^

저는 그냥 운동을 좋아하는 일반인이라 선생님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ㅠㅠ

제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선생님이지요 ^^

빈 학파 얘기만 많이 들었지. 구체적으로 뭘 주장하는 지 몰랐는데 이제 그 서막이 열리기 시작하는 가 보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융의 분석심리학과 심리유형론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구성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신분석학의 요람이었던 빈의 경제학 또한 그런 영향을 받은 건가 싶어 흥미가 이빠이 입니다만.. 말씀하신 개인의 선호와 행동을 중심으로 경제현상을 이해해햐 한다는 주관주의 가치론에 그런 관점이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만일 그렇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융 경제학'처럼 느껴져 관심이 배가될 듯 합니다만..

안녕하세요. 오스트리아 학파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융의 분석심리학과 심리유형론을 잘 몰라서요. 나중에 포스팅 해주시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꼬리를 문 댓글에서 논의가 여러 갈래로 진행되어 정리를 위해 별도의 댓글을 다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님의 진정어린 답글에 감사드리면서, 그 답글에 응하는 것이 예의이고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필자님 고유의 취지를 가진 연재 포스트에 제가 무한정 댓글을 달아 흐름을 흐뜨러뜨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저의 의문 제기는 제 블로그에서 제 나름의 흐름을 갖고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댓글 상의 논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부디 일방적인 결렬 선언(?)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ㅎㅎ 혹여 댓글상의 논의를 계속 진행하시길 원하신다면 기꺼이 답글 드리겠습니다. 어제 새벽부터 이 시점까지 논의가 건강하게 진행된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이에 필자님께도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흠. 제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반론은 아닌 거 같습니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합리적인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주류경제학과 오스트리아 학파를 헷갈리시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반론은 다셔도 됩니다만. 사실 하시는 반론이 주관주의 가치론에 대한 반론도 아닐뿐더러.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반론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 하시는 반론은 시카고, 오스트리아, 신고전, 고전학파에 대한, 그냥 자유시장에 대한 반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텐데요. 그리고 오스트리아, 시카고, 신고전, 고전학파 다 추구하는게 다른데.. 그냥 시장에 대한 반론을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한 반론이라고 하시면 조금 답변하는 입장에서 난감하긴 합니다.

댓글상의 논의를 마무리 했으면 하는 말씀을 드린 상태에서 필자님 말씀에 답을 드리는 게 옳은지 아닌지 한참 고민을 했네요. 일단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다소 혼란스레 진행된 논의를 하나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제 생각에 주류, 비주류 라는 표현 자체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 관행이 혼란스럽긴 한데, 주류에 도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학계의 풍토 때문인지, 오스트리아 학파, 행동경제학파, 심지어 마르크스학파까지 다들 국가, 행위의 과정 또는 결과, 시장에 대한 태도 등 각자의 기준으로 '비주류'를 자임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2. 합리적 개인과 관련해서는 개념의 외연을 어디까지 둘 것인가 하는 차원인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는
    '주류' 경제학이 정의하는 '합리성'과 오스트리아 학파의 '목적합리성'은 분명 다르지만, 제가 보기에 어떤 맥락에서든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개인'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기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해서만 폭을 좁히자면 '각각의 주관적 가치 기준과 목적에 맞게 합리적이고 일관되게 행위하는 인간'이라는 공리가 적절하냐라는 의문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네요.

  3. 시장의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필자님의 말씀에서도 '판매자가 있고 수요자가 있으면 시장이 된다' '돈이 없어도 재화가 교환하면 시장이다' 사이에는 약간의 불일치가 보입니다. 전자, 즉 판매-수요(구매?) 관계에서는 화폐의 존재를 상정하시는 듯한데 후자에서는 '돈이 없어도'라는 단서가 있어서요. '자발적 교환'만 이루어지면 (이를테면 물물교환 행위까지도) 시장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신지...

  4. '오스트리아 학파가 인간 행동을 예측하거나 예상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하나의 공리를 정점으로 개별 사안들을 추론하는 '연역'을 학문적 방법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계량화라는 표현이 걸리신다면 '수학화'로 바꾸어도 저로선 무방합니다. 어떻든, 연역은 하지만 예측은 하지 않는다는 건 모순 아닌지...

  5. '공공단체/국가가 시장참여자가 아닌 건지', '아니라고 간주하는 건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한 건지' 불분명합니다. 필자님 댓글에서도 참여자가 아니다'라고 하신 부분이 있고 '자발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참여자'라고 하신 부분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사실 진술과 가치 진술은 염연히 구분되어야 할 듯한데요...

  6. 모든 권력은 강제력입니다. 정당성 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데요. 로스바드가 주장하듯이 국가를 대신해서 '자발적인' 민간기업이 강제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성을 보장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자발성=정당성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문의 요지입니다.

끝으로 저는 일정한 경제학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론'이라기 보다는 '의문'으로 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의문에 대한 해답 자체 보다는 해답을 구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진정성 있는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네 선생님. 하나도 실례 아니고, 미안해 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달아주신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의문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도 배워가는 학생의 신분입니다(뭐, 죽을 때 까지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런 반문이나 의문을 가진 분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저의 생각도 다시 정리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제가 '비 주류'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오스트리아 학파는 경제학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 보다도 학계에서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알리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는 것이고요. 저는 오스트리아 학파가 '비주류'인 것에 자랑스러워 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 주류학계가 아니라는 것, 오스트리아 학파가 주장하는 바가 정설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주류라고 말씀을 드린것이죠!

  2. 사실, 오스트리아 학파는 말씀하신 거 처럼: "각각의 주관적 가치 기준과 목적에 맞게 합리적이고 일관되게 행위하는 인간"이라는 가정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관적 가치와 목적에 맞게 행동하긴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룰려는 과정속에서 '합리성'을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냥 미제스가 말했듯 '인간은 행동하고, 그 행동은 반드시 목적을 가진다.' 라는 공리만 주장할 뿐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말하는 인간은 합리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목적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생물이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점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3. 판매와 구매는 화폐가 없어도 가능한 행위입니다. 단지 화폐가 있어야 될 거 같이 보이는 것 뿐이죠. 우리는 A씨와 B씨가 있다면, A씨는 B씨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B씨는 A씨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교환 과정에서 B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으면서 판매한 것이죠. 굳이 교환의 매개물인 화폐가 없어도 구매 판매 행위는 이루어집니다. 자발적 교환은 돈이 있어도, 없어도 이루어 집니다. 재화만 있으면 이루어지는 일이고. 사실 돈 자체도 재화입니다.

  4. 오스트리아 학파는 경제가 개인들이 세계에 관해 선호하고, 평가하고, 의도하고, 믿는 것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개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오스트리아 학파는 그 공리를 바탕으로 연역하여 인간 선택들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개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정부의 인위적인 강제력이 들어간 것이라면 '시장에 해롭다'는 예측은 하는 것이죠. 개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집단의 강제력이니까요.

  5. 제 글에 혼선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국가나 공공기관 자체를 시장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봅니다. 공공기관과 국가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조차 적용되지 않으며, 그 외에 경쟁이라든지 자유로운 진입도 막기 때문이죠. 시장에 가장 반대에 있는 개념이라고 보고있습니다.

  6. 라스바드는 절대로 민간기업이 행하는 '강제력'을 옳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국가이든 무엇이든 자발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든 권력은 강제가 아닙니다. 삼성은 저에게 강요한 것이 없습니다. 여타 대기업들도 저에게 강요한 것은 없죠. 만약에 대기업이 박근혜 정권에서 처럼 정부의 힘을 빌려 카르텔을 형성하고 독점권을 부여받는다면, 그것은 강제겠지만, 그 외에 시장에서 자신들의 제품을 소개하고 경쟁하고 하는 행위에서 강제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 여태까지 어느 기업에도 강제력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만, 정부에겐 늘 받죠. 소비할 때 소비세, 월급날엔 소득세, 전력을 쓰면 누진세, 양도할 때 받는 양도세 등등. 저는 한번도 동의하지 않은 세금들을 가져갈 뿐만이 아니라, 남성들의 경우 의지와는 상관없이 군대로 징집해버리죠. 심지어 내가 원하지도 않은 빚을 져버려서 대신 내달라고 합니다. 하고 싶은 일도 허가없이는 불가능하죠. 심지어 내 화폐 재산도 자기들이 찍어내고 인쇄시켜서 그 가치를 떨어트립니다. 내 재산을 내가 원하지 않은 곳에 쓰기도 하고요. 이게 바로 강제입니다. 정부는 그래서 강도일 수 밖에 없고요.

저는 일정한 경제학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지 않으신 분의 피드백이 좋습니다. 여러방면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탐구속에서 저는 더 고민하고 더 발전할 것이라 믿으니까요 :) 언제나 이런 피드백은 대환영입니다. 팔로우 하고 갑니다.

이제 논의가 정리되어가는 느낌입니다. ^^

  1. 특정학파(^^) 외에는 모두 비주류로 취급받는 현실인 것에 동감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2. 이 부분은 고민을 좀 많이 했습니다. 둘 사이의 논의가 왜 이렇게 미끄러질까 싶어서 미제스의 <인간행동>영문판을 다시 훑어보기도 했구요. 제 생각에 미끄러짐(?)의 원인은 이게 아닌가 합니다. 인간의 행동과 관련하여 미제스가 핵심 개념으로 삼은 것은 목적론teleology과 인과율causality입니다. 목적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은 행위가 낳게 될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합리적 판단 능력, 즉 인간이라는 주체가 갖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거죠. 제 의문의 대상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3. 시장의 본질은 '자발적 교환'이라는 입장이시군요. 이해했습니다.

  4. '자유', '자발성', '개인'의 개념에 대해서는 실로 거대한 이견 또는 의문이 있습니다만, 이건 말 그대로 철학적 논의라 논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듯합니다;;;

  5. 필자님의 관점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6. 권력의 정의에 관한 문제인데... 이 또한 학자마다 학문 분야마다 달라서... 저는 정치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경제학도이신 필자님과는 기의가 확연히 다를 수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니체 연구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또 달라지겠죠.^^ 국가에 대한 관점은 필자님과 아무래도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제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끼리 꽤나 즐거운 토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기회에, 또 다른 주제로 또다른 즐거운 대화와 소통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와... 미제스의 인간행동을 정독하셨군요. 저도 못한 것을 하시다니 어떻게 보면 저보다 더 오스트리아 학파에 전문가 이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파가 맞으시든 아니시든 인간행동을 읽으셨다는 점에서 매우 반갑네요!

정치학 전공이시군요! 저도 원래 정치학을 했다가 제 사상이 너무나도 불순(?)하여 교수님들께 미움을 받는 바람에 전공을 철학과 경제학으로 바꿨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관점이 많이 다른데서 나오는 의견차이인 거 같습니다. 누가 틀리고 맞고를 할 수 없을 거 같은데.

사실 선생님께서 가지신 의문에 대해서 나중에 저를 멘션해주시고 블로그에 자세하게 글을 써주신다면 저도 그 의문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전 선생님이 저와 다르다고 해서 멀리할 생각 1도 없습니다. 다만 같이 고민할 수 있는게 있다면 고민해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선생님 글 기대하겠습니다!!

아하~ 그러셨군요. 정독까지는 아니구요;; 호기심 만발한 성격이라 인터넷 돌아다니며 필요한 책들 PDF로 수집하는게 일종의 취미... 게다가 인간행동 같은 고전들은 저작권이 만료되었으니 저 같은 사람에겐 인터넷이 축복이죠.ㅎㅎ 개인적으로 진지한 글을 쓰면 에너지를 지나치게 쏟는 타입으로 두통이 심해져서 두어 주 전에 유시민에 관한 글 쓰고 난 다음부터는 자제하는 중입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짧게 나누어서 써볼 생각은 있습니다. 이제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봄맞이 대청소 중에 여왕님 잠시 출타하신 틈을 타고 이러고 있던 터라, 빨래 널러...ㅋㅋ 반갑고 즐거운 토론이었습니다. 그냥 끝내긴 허무하니 댓글마다 미력한 뉴비의 보팅 남기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스바드의 이름을 알고계신 한국분이 많이 안계신데~^^ 오..유시민에 대해서 쓰신 글이 있군요. 바로 정독하겠습니다. ㅎㅎ 여왕님! 훌륭한 남편이시군요 ㅎㅎ 앞으로 인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헤르메스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정치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저도 매우 감사하고 즐거운 토론이었어요 ㅎㅎ

그래도 생산 비용을 어느정도 고려하나요? 아니면, 그것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가치에 포함되니까 전혀 생각하지 않을까요?

생산비용이 어느정도 영향은 있겠죠? 왜냐하면 생산비용이 비싸면, (수요가 일정히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공급량이 많을 수 없으니까 희소성이 생기고 그러면 가격이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생산비용이 직접적으로 고려되지는 않습니다. 생산비용은 이윤을 위해서 감수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편합니다. 산 정상에서 누구나 높은 가격에도 생수를 기꺼이 구매할 수 있기에 비싼 생산 비용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시면 편합니다!

가격은 무조건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이 맹거의 주장입니다.

생산자 사이의 가격경쟁이나 치킨게임에서 어렴풋이 느끼던게 이런 것이군요.

네 맞습니다 ^^

생산비용이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생산비용을 결정한다. 코페르쿠스적 전환이 따로 없네요. 널리 알려진 경제상식의 편견을 교정하는 문장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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