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diary] 예전과 오늘 일기 3 - 상처와 배려

in #kr6 years ago


예전의 생각들을 오늘 다시 생각한다. 예전의 생각들이 오늘의 생각과 얼마나 같고 달라졌는지를 더듬어본다. 이러한 작업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아주 예전과 예전과 오늘 일기' 같은 글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예전 일기를 다시 읽는 작업은 상당히 즐거우면서도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의 생각이 부끄러워질 수도있겠지만 한편으론 내가 지금은 부끄럽지 않을만큼 성장했나 라고 되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부끄러워지곤 한다. 변화는 언제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고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는 이유로, 거의 자라지 않은채 반복적인 생각의 재생산을 하는 것을 언제나 경계한다. 기록을 통해 과거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생각이 진행하는 속도감을 느끼는 것, 이 것이 어쩌면 일기의 가치일 것이다.


예전과 오늘 일기의 이전글도 링크해둔다.


살아가면서 우연치 않게 상처를 주고 받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진행되곤 한다) 세상이 완벽해져야 한다고 믿을 때에는, 상처의 발생이 왠지 그 세계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인 것 마냥 일순간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니 잘못된 것들은 즉각 응답해야 했고 잘못된 것이 그냥 방치되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거나 옳지 못한 것이라고 여길 때가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사람도 세계의 일부분이었고, 최소한 드러난 관계들에 대해서 균열이 보이면 안되었다. 하지만 균열의 발생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주 살짝이나마 나이를 조금 더 먹게 된 지금에서는, 조급증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숙성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앞뒤 글자 바꾸어서 성숙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다만, 신속히 해결하고자 했던 의지는 오히려 상대방의 성숙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되었다. 나의 걸음에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실망할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 걸음걸이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상대방에게 그 리듬을 강요한다는 것이 사실은 웃기는 일이지 않은가.

상처는 주고 받으면서, 그 합계가 0이 되는 게임은 아닐거다. 누가 더 0에서부터 멀어지나를 비교하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있는 작업은 아닐 것 같다.

2014년 1월.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게 되면서 내가 바라보는 상처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하나의 생각은, 어떠한 상처도 결국 삶과 죽음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 삶과 죽음의 여부를 결정짓는 위험과 위기 앞에서, 생존과 관계되지 않는 상처의 아픔은 그다지 세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처에 대해, 지나고보면 별 것 아니었다는 듯 여겨지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게다. 너무나 큰 상처라면 오히려 PTSD의 영역에 접어들 것 같기도 하고.

상처는 종종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지만 어떠한 상처가 정말로 우리의 삶을 뒤흔들만한 힘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곤 한다. 다양한 상처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우리가 삶에 영향을 받을만한 상처가 어떤 것이 있는지 솎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보면 의외로 명확하게 보이는 상처는 몇 안되었던 것 같다. 그런 상처들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다른 하나의 생각은, 해가 지나감에 따라 마음 안에 여러 안전 구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일종의 격리 저장소 같은 느낌이다. 상처들은 각기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마음의 안전지대의 경계 안에 갖힌다. 상처들은 낱낱히 조사되고 분해된다. 나는 특히나 큰 상처들에 대해서는 Intellectualization 을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편인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 것이 항상 옳은 방향은 아니다. ) 이와 관련되어 최적화된 형태가 결국 상처를 격리하고 분해하는 것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상처를 직면한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상처를 담을 수 있는 공간도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서 이러한 상처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의 일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결국 상처가 상처로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작업이 될 것이다. 이미 벌어진 상처는 대체로 상대방의 몫이기보다는 나의 몫으로 놓아둘 때가 많기 때문에, 내가 이를 어디까지 다룰 수 있는냐에 따라 삶에 가지는 상처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보다 나의 감정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대방에게 나의 걸음에 대한 힌트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나의 걸음에 대한 힌트를 상대방에게 준다고 해서 내가 나의 온전한 페이스대로 항상 걷기만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게다. 이는 온전히 나의 성향과 선호를 나타낼 따름이며, 강요로 작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서로 간의 보폭에 관한 차이와 균열은 세계의 결점이 아니며, 세계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에 불과하다. 그러니 차이와 균열을 놓아두던가 아니면 좁히던가 하는 선택지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보폭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을 한다. 배려는 보폭을 항상 서로 간에 동일하게 맞추는 것만을 뜻하지 않으며 각자의 걸음대로 놓아두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각자 걷는 것'이 '같이 걷는 것'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이 걷는 것'이 각자 걷는 것'보다 더 낫다고 흔하게 생각되곤 하지만 말이다.)

이 때, 배려는 결국 내가 나의 의지로 행하는 것이지, 채근하거나 억지로 옭아매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다. 따라서 이러한 '배려'가 잘 이루어진다면 굳이 더 많이 생성된 상처를 떠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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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라는 말 뒤에, 실재했을 많은 일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제게 남은 상처 같은 것들도 떠올려 봅니다. 상처를 마주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지만, 상처가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금 더 무심해지고 혼자 그리고 같이 걸어가 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추상적인 이야기를 실행하는 건 언제나 어렵지만요.

추상적인 이야기들이 삶의 구체성과 만날 때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역시 구체적인 고려와 제한을 따져보아야하겠지만요.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추상적인 인류보다 눈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듯이 말이지요.

주고 받음에 의해 상처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그래도 상처의 범위 중 일부는 우리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에 관여하지는 못하더라도요.

나의 걸음에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실망할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 걸음걸이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상대방에게 그 리듬을 강요한다는 것이 사실은 웃기는 일이지 않은가.

'각자 걷는 것'이 '같이 걷는 것' 만큼 중요하다

어제 후배와 술을 마시며 독설을 퍼부은 것이 찔리네요.ㅠㅠ

그런데 사실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상대방에게 애정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러한 부분에서 조금 냉정한 편인데, 먼 관계에 있을수록 관심을 꺼두는 편이거든요.

이번 글은 읽기도 전에 좋을 거로 확신했어요. '상처와 배려'라서요.

역시 상처에 대한 글을 읽을 땐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게 되네요. 제 상처는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해보면 딱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데요.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으니 하나밖에 안되면서 전부인 것 같네요.

저는 상처를 잘 묻었다고 생각하는데, 가끔 보면 그런 것도 아닌가 봅니다. @qrwerq님이 말씀해주신 주지화라는 것도 찾아봤는데요. 머리로는 늘 이해하지만 막상 비슷한 상황이 되면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위에 쓰신 글은 오늘 쓴 것 같은데 무려 4년 전 이야기라 놀랐어요. 4년간 한 같으시군요. (그것을 경계한다곤 하셨지만요)

상처에 관한 글이면서도, @qrwerq님의 상처는 보이질 않아서 무슨 말을 건넬까 하다 제 얘기만 주절주절하고 갑니다.

저에게도 제 삶을 조율(?)하는 핵심적인 상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여기가 (저에게는) 너무나 오픈 되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또한 큰 상처에 대해서는 제가 "주지화"를 너무나도 강하게 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에게서, 저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감정을 엄청나게 이성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은 느껴지지만, 진입할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이해'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제 짧은 지식으로는, 주요한 (자주 즐겨 쓰는) 방어기제가 아마도 각자 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시를 적는 시간이 되면, 억압된 감정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지난 4년간, 다행히 (저에게는) 이 생각의 흐름이 틀린 방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더 이기적이 된 것 같고, 그 이기성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놓아둠의 영역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적절한 거리와 함께요. 예전에는 완벽하고 완전한 것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성향은 마찬가지이나)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도 세계가 가지는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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