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essay] 필통의 묘

in #kr6 years ago


길을 가다가 근처 문방구의 안내판을 보았다. 재개발로 인해 9월까지만 영업하고 더이상 영업하지 않으니 물품을 할인해서 팔고 있다는 안내였다. 하긴 근처를 지나다니면서도 한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곳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아카데미과학과 같은 로고가 찍혀있고 빛 바랜 상자들이 쌓여있는 모습을 봤으면서도 들어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이번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들어가보기로 했다.

이 문방구는 정말로 기묘한 느낌이었다. 요즘에는 옛날 물건을 따로 전시해서 보여주기도 하는 공간이 있기도 한데, 이곳은 현재와 10-20년 전의 과거가 묘하게 들어찬 느낌이었다. 김영만 아저씨가 젊은 시절 웃고 있는 모습이 담긴 종이나라표 색종이라던가 100원짜리 말굽자석이 박스채 놓여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모델처럼 서있는 책받침이 꽂혀있는 곳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B1A4 인터뷰한 잡지라든가 슬라임과 같은 요즘 세대 것들도 같이 있어서 과거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도 현재의 시간이 흘러들어오는 매대라고 생각했다.

필통들이 꼿꼿이 서있는 채 꽂혀있는 진열대가 인상 깊었다. 지금 사용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스타일라고 생각했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필통들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필통들이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 아마도 이런 류의 필통은 10년 - 20년 전에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에게는 흡사 비석처럼 느껴졌다. 더이상 오지 않을 주인들을 기다리는 물건들, 유효기간은 나처럼 초등학생에 비하면 (이제는) 약간 나이를 먹었다고 하는 세대들이 오지 않는 한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약간...이라고 해두자.) 일주일이 지나면 이 것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차마 묻지는 못했다. 40년 이상 자리를 지키던 문방구를 정리한다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는 사실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건들의 가격표를 보며 시간과 부모님의 노고를 떠올렸다. 이 당시 몇 천원이었다면, 아마 지금으로서는 약 몇 만원의 환산 가격을 가졌을 것이다. 어린 시절 배움이라는 명목 하에 많은 것들을 샀고 가지고 놀았고 망가뜨렸다. 나는 한번도 이에 대해서 핀잔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부담되는 일이었겠지만 내색 하지 않으시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100원, 200원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는 색종이는 너무 저렴하다. 출고 당시의 100원은, 지금으로는 한 500원 정도의 가치는 되지 않을까. 나에게는 시간이 흘렀지만 물건의 시간은 매대에 놓일 때에 정지한다. 이 물건들은 어쩌면 그 시간들 속에서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은 - 견딘 존재들일 것이다.

조만간 다시 들러서 몇 가지를 업어올 생각이다. 그냥 두기엔 뭔가 섭섭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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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면서도 변화를 받아들여야하는...
추억에 잠겨 글 읽고 갑니다.

지금 있는 모든 것들도 결국 언젠간 변하겠지요. 현재에 고정되어 살고 싶은 요즘입니다.

업어오시면 인증샷이 궁금해지는 물건들일 것 같네요

최근에 몇가지 업어오긴 했어서 아마 조만간 올릴 듯 합니다ㅎ

유통기한 ....

유통기한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궁금해지곤 한답니다

업어오실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도 기다려집니다.

간단한 것 몇가지만 업어왔습니다. 아마 조만간 한번 글을 적어볼까 해요

전 말굽자석을 샀을것 같아요.

고이 포장된 말굽자석 이쁘더군요. 자석들이 가지런히 작은 종이박스에 쌓인채 놓여있었답니다.

음 ㅎㅎ 사진을 남겨두시는 게

차마 사진은 찍지 못하겠더라고요. 남겨두었으면 저는 만족하였겠지만 아마 주인분들은 마음이 아팠을거 같아요.

저는 물체주머니를 꼭 다시 가져보고 싶어요!

물체주머니 좋네요- 다만 그건 이미 다 나갔는지 아쉽게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ㅠㅠ

대신 아래와 같은 것을 업어왔습니다. (이 색종이는 92년생입니다.)

동서남북 -> 저고리 + 바지 -> 카메라, 이 테크트리 아시죠!?

제가 앞의 두개는 만들어봤는데 카메라는 못만들어봤네요ㅎ 동서남북은 정말로 맨날 하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ㅋ (감상이 아니라 놀이로서의 접기!)

곰돌이가 @qrwerq님의 소중한 댓글에 $0.018을 보팅해서 $0.007을 살려드리고 가요. 곰돌이가 지금까지 총 602번 $9.326을 보팅해서 $8.810을 구했습니다. @gomdory 곰도뤼~

으음 -_ -;;; 묘하게 귀에 익은 단언데요?

사... 산가치! 처... 철가루!

처음 뵙는데 죄송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나가다 너무 빵터져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이상 오지 않을 주인들이라는 말이 훅 가슴 속에 박히네요. 저 문방구 정리하시는 분의 심정은 어떨라나요. 저도 짐작 조차 못하겠습니다.

이미 훌쩍 자란 세대들은, 그렇다고 아직 삶을 찬찬히 뒤돌아보기엔 젊은 나이라서요. 아마 (추억이나 기억을 먹고 살 때가 된) 주인들 품에 안기기는 어렵겠지요.

문방구점 가족분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그냥 담담하신듯 보였습니다. 이미 감정이 다져진듯 보였어요.

요즘은 참 모든 물건들의 생명이 짧은 듯 해요. 그 찰나의 타이밍을 놓치면, 그렇게 주인을 찾지 못하게 되는 듯 해요. 전부는 아니지만 그 중 하나쯤은 시간이 더 많이 지나 또 누군가의 손에 흘러들어갈 기회를 얻지 않을까요. :)

저도 그러길 바라봅니다. 한낱 사물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들이라지만, 제품들이 생산될 때의 분위기와 느낌을 상상하곤 합니다. 분명히 누군가의 땀이 들어갔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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