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가로등/순간

in #kr6 years ago (edited)

Kobe, Japan, Jan. 2017, Nexus 5x


오늘같이 몸과 마음이 지친 날이면, 나의 어둔 밤을 비추는 가로등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명멸하는 빛의 거리를 더듬어가며 걸어갈 때에 반짝이는 것들을 생각한다. 사람의 생애는 생각보다 꽤 짧아서, 삼 만 일 정도 살면 요즘 사회 기준으로도 많이 산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중에 삼 만 분의 일을 어떻게 보냈나 돌이켜본다. 나는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고, 나이테가 켜켜이 쌓이고 있고,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진한 띠와 옅은 띠를 반복적으로 주조하고 있다.

사진으로 남겨두는 습관은 상당히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수단은 결국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적인 것들 뿐일텐데, 그 중에서 시각적인 것은 상당히 강렬하다. 그냥 놓아두었으면 스쳐지나갔을 빛을 영구히 잡아두고 있다. 기억을 해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진은 얼마나 편리한 매체인가. 기억의 책갈피를 사진으로 저장해두면, 우리는 머릿 속 어딘가에 저장해두었던 기억을 소환하기 편하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의 기분과 공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의 앞과 뒤에는, 내가 사진으로 담지 못한 궤적이 역시 존재하고, 그 것은 사진으로 재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온전히 남아있다. 그러고보면 사진은 사실 (시간축으로) 상당히 두꺼운 것이다. 순간에 두께를 정의할 수 있다면, 그 것은 아주 얇은 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삶의 순간 - 단면들도 사실은 두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순간 '안'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한 것 자체로 이미 두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순간들이 사실은 우리 삶의 나이테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순간은 매우 길고, 어떤 순간은 찰나이다. 나는 못내 그 순간들이 짧게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서, 길게 펴고 늘리고 싶지만 그게 항상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 같이 정신없는 하루에는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하루가 가는 게 아쉽다는 마음이 충돌하곤 한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렇다. 각자의 순간들을 살아내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흡사 가로등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가로등을 유심히 살펴볼 수도 있고 빨리 지나쳐갈수도 있고 마음에 담을 수도 있고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가로등은 가급적 오래오래 켜져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도 난 마음에 나이테 하나 두르고
그게 본디 내 껍질인양 부딪히며 살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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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운전할 때 늘어진 가로등을 보면 늘 과거를 뒤적이게 됩니다.
삶이 가로등같다는 말씀처럼, 과거의 나도 그 어딘가에 있는듯
그 행렬에 시간은 늘 무력하네요.

저로서는 가로등이 꺼지지 않길 바랄뿐입니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게 되면, 그만큼 제 삶의 파편을 잃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정의한 시간은 정말로 관념적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허수의 시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우니까요.

삼만일과 삼만분의 일 이라는 표현..!!
오늘의 제 나이테는 썩 맘에 들지 않네요 ㅠ

오늘도 큐레이팅 슥-
사진 예술 잘 보고갑니다 :D

나이테가 항상 마음에 들면, 아마 나이테가 형성하는 물결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침이 있는 날도 있는 것이겠지요. 항상 감사합니다.

어떤 카메라인가 해서 봤더니, 폰으로 찍은 사진인가 보네요. 폰으로 이렇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거라면 이제부터라도 자주 찍어봐야겠어요.

최근에는 스마트폰으로만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카메라가 제일 좋은 카메라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좀 더 전문적인(?)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놓치는 일상이 못내 아쉬워 어지간하면 잘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응원 드립니다. 요즘 폰은 정말로 잘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진과 글 사이의 두께도 상당히 두텁네요.
그 때의 기분과 공기를 기억한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기억의 책갈피를 마련한다는 느낌으로 사진을 찍곤 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보통은 그렇습니다.) 사진들이 켜켜이 쌓이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라벨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진과 사진에는, 순간과 순간에는 항상 '두께'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닿아서 다행입니다.

사람의 시각은 참 강하죠..... 다른 어떠한 감각도 눌러버릴수 있는 힘이 있어요.....

하물며 시신경의 갯수가 많은 이유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혹은 시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그 절망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사진과 글을 종이책의 두 면으로 상상해 펼쳐 봤어요. 천천히 읽었고, 읽은 후에도 책장 어딘가에 간직하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내일은 좀 더 좋은 날, 보냈으면 좋겠어요.~

종이책의 두 면으로 상상하셨더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일렬 배치만을 생각했었는데, 책처럼 읽어보는 방식이 있었군요. 천천히 읽어주시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은 좋은 날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applepost 님께서도 주말을 앞둔 오늘, 점점 행복해지는 시간들 보내시길 빌어봅니다. :)

이 글 이틀 전에 읽었는데 여운이 계속 남아서 또 찾아왔어요.
저는 이 글이 왜 이렇게 시처럼 느껴지죠...?
@홍보해

제가 종종 시와 산문을 구별되지 않게 적어서 그런가봅니다. 물론 두가지 방향을 모두 추구하다보니 이도저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만 (...) 여튼 감사합니다!

@qrwerq님 안녕하세요. 개사원 입니다. @wonderina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오늘도 행복한 나이테 하나를 두르고 있습니다
멋진 주말 저녁보내세요

행복한 나이테 매일매일 하나씩 두르시길 기원합니다. 나이테가 쌓여서 행복한 삶을 이루면 참 좋겠지요. 새로운 한주도 희망차게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

그동안 집에 잘 모셔두었던 카메라를 꺼내 요즘엔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되겠지만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욕심을 내다보면 놓치는 상황도 생기게 되더라고요. 차츰 다시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는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사진을 통한 기록의 노력은 줄어들지 않으리라 봅니다. @qrwerq님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씩 욕심이 생깁니다. 오랜만에 잠자고 있던 카메라를 꺼내놓으니, 들고 출사나가고 싶더라고요. 기록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니면 담을 수 없는 지금을 꼭 담으시길 기원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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