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야자 시리즈] 야자와 축제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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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1때 10월이었다. 학교 전체가 한창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풍이 지고 잎사귀가 하나 둘 떨어져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요즘도 고등학교, 대학교 할 것 없이 10월에 축제를 벌인다. 왜 10월에 축제를 많이 벌일까, 를 생각해본 결과, 그건 ‘수확’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농사든, 일이든, 공부든, 한 해 동안 땀 흘리며 뭔가를 해온 사람들은 10월쯤 되면 그것의 결실을 맺고, 서로 결실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어쩌면 10월엔 뭐라도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압박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10월은 수확의 시기이고, 또 무엇을 하든 10월쯤이면 뭔가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이 어느 사이엔가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고등학생들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축제는 1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아이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진짜 한 해의 결실을 내놓고 축하하는 축제라면, 난 그간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몰래 읽은 책들과, 연습장에 몰래 끼적인 낙서들을 전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8개월째 수업도 듣고, 저녁 시간을 반납해가며 공부했지만 알코올을 뒤집어쓴 곤충처럼 박제되어버린 시험지 점수도 전시장 한 쪽에 전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선배들은 축제 1주일을 앞두고 새로운 결실을 부지런히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 해의 성과가 아닌 10월의 성과물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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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최대의 성과물은 바로 색이 바라져가는 나뭇잎일지도

 학교 안에는 여러 동아리가 있었다. 물론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동아리들이었다. 난 크든 작든 어떤 조직에도 속하기 싫어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었다. 자발적으로 어느 조직으로 걸어 들어가서 뭔가를 도모하는 일은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나의 관심 밖인 동아리들이었지만, 학교 안에는 여러 동아리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축제 시즌이 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본격적으로 엔진을 가동하는 것이다.

 예술과 관련된 동아리들은 그림이나 글을 도서관 홀에 전시했다. 작품을 걸었던 학생들은 여고에서 온 학생들이 꽃이나 동전 따위를 액자에 붙여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 당시엔 그랬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100원이나 50원 짜리 동전을 테이프로 붙였다. 가끔 10원짜리나 500원짜리도 있었다. 하지만 관람객들은 100원과 50원 동전을 가장 선호했다. 따지고 보면 그건 암묵적으로 정해진 시장가였다. 어떤 작품에 동전이 눈에 띄게 많이 달려 있으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작품이 좋거나, 작품 주인이 아는 여학생이 많은 날라리거나. 보통 후자인 경우가 많았다. 안면도 없는데, 순수하게 작품이 좋아서 동전을 붙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동전이 많이 붙어 있는 작품을 보면서 부러웠던 건 단 한 가지였던 것이다. 그 동전을 정성스럽게 붙인 여학생의 부드럽고 새하얀 손들 말이다.

 공연과 관련된 동아리들은 이 축제를 바라보고 달려온 종마나 다름없었다. 모든 걸 쏟아 부을 공연을 준비했다. 그 시즌엔 야자 때 드럼이나 타악기의 진동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곤 했다. 작품 전시나 공연이 애매한 동아리들은 작은 분식이나 주전부리들을 팔았다. 그들이 펼쳐놓은 임시 가게에 앉아 있노라면, 어쩌면 그들이 축제의 최대 수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교에서 온 여학생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에 동전이나 꽃을 붙인 여학생들의 마지막 코스는 어김없이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였다. 애매한 동아리의 멤버들은 장사하는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맛도 없는 떡볶이나 어묵을 홍보하며 돌아다녔다. 물론 선배에게 등 떠밀린 후배들의 몫이었다.

 이런 광경들이 펼쳐질 축제가 일주일 앞으로 돌아왔고, 축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그때만큼은 야간 자율 학습 'Free pass'를 받아들고, 동아리별로 흩어져서 저녁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 시기엔 매일 밤 학급 학생들이 몇 명씩 빠져서 땜통 마냥 교실이 듬성듬성했고, 그 빈자리들이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는 나 같은 학생들의 마음을 더 들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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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아이들은 축제에서 선보일 코끼리를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사실 진짜 하려고 하는 얘기는, 축제 일주일 전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경험했던 기묘한 일에 관해서이다. 이 일에는 중요한 인물 하나가 등장한다. 지금은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라, 그 친구에 관한 세부적인 정보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 일이 고1때였는지, 고2때였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뭐 그런 정보보다, 있었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내 빈약한 기억에 의지해서 이야기를 정리해보겠다.

 그 애는 다른 반 학생이었고 한 다리 건너 알게 된 친구였다.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만나면 몇 마디 말을 나누거나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의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와 나의 성향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다혈질에 기분파였고, 기분이 좋을 때는 무척 호탕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다른 이를 챙길 줄도 알았지만 심사가 뒤틀리면 화를 제어하는데 애를 먹었다. 반면에 나는 조용했고 감정에 기복이 별로 없었다. 가능하면 튀지 않으려고 했고 별 존재감이 없었다. 내향적이라 누구를 거느리거나 외부로 손을 뻗기보다 내 속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스타일이었다.

 그는 나의 그런 성향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너트처럼 볼트 같은 그를 내가 잘 받아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마르고 작은 내게 부성애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1학년 때의 키가 3학년 때까지 그대로였고, 난 무척 큰 변화를 맞이했다. 1학년 때 그보다 작았던 키는 2학년 때 그의 키를 추월했고, 그 후로 난 영원히 그보다 큰 키로 살아가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 가끔씩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내 교실로 찾아왔다. 주로 청소 시간이나 저녁 식사 후였는데, 조금 남는 여유 시간에 그와 교정을 거닐었다. 그가 주로 얘기하는 쪽이었고, 난 듣는 쪽이었다. 대화의 추가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좋은 대화를 나눴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따분하진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솔직했고 흥미로웠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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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고등학생때 솔메님을 영화처럼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 야자 시리즈 읽는 재미로 요새 스팀잇 켠다는.. ㅎㅎ 화이팅!

타임머신을 타고 레일라님의 과거로 가보면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난 한 여고생이 있겠지요? ㅎㅎ 잼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ㅋ 앗 어디서 빵 냄새가..^^

야밤에 쏠메님의 포스팅을 보니
20여년 전 그때 그시절로 돌아간듯 합니다.
술 한잔 해야겠습니다. ㅎㅎ

팥쥐님의 20년전 그 시절은 술을 부르는 시절인가 봅니다.ㅋㅋ
그 20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ㅎㅎ

키가 훌쩍 커진....내성적이고 사색적인 작가님..
다음회가 궁금해집니다.

키가 늦게 발동이 걸렸어요. 고등학교때 다 컸죠ㅎ
기대 감사합니다^^

궁금한데서 딱 끊으셨군요.
다른 학교 축제에 놀러간 기억은 있는데, 이상하게 저희 학교 축제는 전~혀 기억이 안나요. 안한건 아닐텐데 관심이 너무 없었나봐요.

쓰다가 너무 졸려서 뒷부분은 잘 다듬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음으로 넘겼어요.ㅎ
써니님도 남학교 다니며 동전 붙이고 다닌 여고생이셨겠죠?^^ 자기 학교보다 남학교에 관심이!ㅋ

ㅋㅋㅋㅋㅋㅋ 네 애석하게도 여학교 축제에는 간 기억이 없어요.

ㅋㅋㅋ 역시 그게 본능이죠ㅋㅋ

t3ran13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t3ran13님의 [The Alternative Steem TOPs, 26.10.2018 GMT] Top Of The Pop

...>79.409 [Soul's daily] 등 하나 켠 밤에
<...

전 다른 반 친구와 친하게 지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같은 반 친구도 그닥.. ^^;

학급에서 아웃사이더셨나요ㅎㅎ 오로지 동네 친구와만?^^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감사합니다ㅎㅎ 좋은 휴일 되세욥!!

다음 이야기도 기다려지도 솔메님도 궁금하네요^^
전 고딩때 문예반이었는데 시화전 했어요.
솔메님 얘기를 들으니 그때가 잠깐 떠오르네요.
ㅎㅎㅎ

와 문예반 출신이군요!^^
시화에 동전이나 꽃이 많이 붙었을 거 같아요ㅎㅎ
호돌박님의 비주얼을 보면 여학생들 사이에서 좀 알려지셨을듯요ㅎ

급 궁금해지는데요... 축제에서 듀엣을 하자거나 하는...ㅎㅎ

땡! 아닙니다ㅋㅋ
그 후에 대학교에서 듀엣으로 어느 대학 가요제를 나간적은 있습니다만. 순전히 추억만 되었었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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