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아기 띠를 하고 서점에 간다는 것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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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족이 중심가에서 외식을 하거나, 아내를 따라 백화점엘 들를 때는 보통 내가 9개월 된 둘째를 맡는다. 아기는 외출을 좋아한다. 하루 종일 집안 온 구석을 기어 다니며 탐험을 즐기던 아기는, 외출을 위해 겉옷을 입히고 아기 띠를 하는 순간부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기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 아껴놓던 개인기도 방출한다. 개인기는 도리도리와 손 흔들기인데, 대문 밖을 나서면 목이 돌아갈 정도로 세차게 도리도리를 해준다.

 다운타운의 백화점 바로 앞엔 알라딘 중고 서점이 있다. 중심가를 지나다니면 이 서점을 꼭 지나가게 되는데, 백화점에 들어갈 때나 나설 때나 내 시선은 늘 그곳을 향한다. 볼 일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난 아내에게 서점에 들렀다 가자는 요청을 한다. 아내는 내 가슴에 매달린 아기 띠 속의 둘째를 가리키며, 괜찮겠어? 라고 한마디 한다. 난 물론이지, 라고 답한 뒤 서점으로 들어간다.

 아, 책들의 마을, 고향 같은 이곳에 또 왔다. 오래된 책의 향기는 피톤치드처럼 내 몸의 산소를 활성화시킨다. 종이의 재료가 나무이니, 내가 느끼는 청량감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아내와 네 살 된 첫째는 손을 잡고 저 뒤쪽 유아 책이 모인 서가로 사라졌다. 난 최근 들어온 도서가 진열된 책장부터 책 구경을 시작한다. 내 앞의 아기는 잠시 동안 생경한 풍경을 파악하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숨죽이고 있다. 책장에서 눈에 띄는 책을 한 권씩 뽑으려고 책장에 가까이 다가가면, 아기는 책장으로 손을 내민다. 내가 책을 뽑으면 책장은 아기의 손으로부터 멀어지는데, 그때 아기는 끙, 하는 소리를 낸다. 내가 책을 두세 권 뽑아 들 때마다 한 번씩은 책장에 가슴을 밀착해서 아기가 책등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준다.

 내가 한 곳의 책장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한 곳에 오래 서 있으면 정확한 타이머처럼 아기는 큰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냐면, 서점의 맨 끝에 위치한 아동 도서 코너에서 구경하고 있던 첫째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올 정도다. 아기의 소리는 작은 생활 소음만 떠다니던 서점의 공기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러면 난 황급히 다른 서가로 이동한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아기는 아기 띠 밑으로 비죽 나온 발을 양쪽으로 파닥거리면서 신나한다.

 나는 정해진 루틴처럼, 영미소설 서가로 이동한다. 거기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난 아기가 관리하는 타이머의 시간이 다 가기 전에 꼭 들춰보고 싶은 책을 선별하여 살핀다. 다시 아기가 에엥, 하며 날 일깨우면, 이번엔 일본소설 서가로 이동하고, 그 다음엔 에세이 서가, 그 다음엔 독서와 글쓰기 관련 서가로 이동한다. 아기가 평소보다 흥분 상태에 있거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때는, 에세이 서가에서 책 구경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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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도 중심가의 대형 문구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밥을 먹고 귀가하는 길에 중고서점에 잠시 들렀다. 어제의 여정은, 에세이 서가까지였다. 실내 온도가 높았는지 아기의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기 때문에 아내에게 소환 통보를 받았다. 그때까지 구입할 책 하나도 고르지 못한 나는 에세이 서가에서 책 하나를 겨우 집어 들고 나올 수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세계적인 중국의 소설가 모옌의 자전적 에세이였다. 모옌은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모옌의 단편 소설 하나를 오디오북으로 들은 적이 있다. 어제 구입한 모옌의 책은 언제 읽힐 차례가 돌아올지 모르겠다. 책을 읽는 속도보다 구입하는 속도가 빨라, 내 방 책장엔 읽을 책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는 행위는 내게 큰 의미가 있다. 책들이 모여 있는 책의 마을을 둘러보고 ‘엿보는’ 행위는, 독서를 위한 과정의 하나가 아닌,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다. 책들을 엿보며 아직 내게 열리지 않은 미지의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내 가까이에서 피톤치드를 뿜어내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들은 언제나 말 걸어주길 바라는 부담 없는 사람처럼, 내게 인사를 건넨다. 한 방에 있어도 부담 없는 사람, 내가 말을 걸기 전에는 내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 소심한 친구처럼 그것들은 그렇게 그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중고서점을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원하는 책을 찾기 어렵다는 역설 때문이다. 평소에 좋은 책에 대한 정보를 들으면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해둔다. 그런 책들을 일반 서점에 가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고, 온라인 서점에서도 클릭 몇 번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운 좋게’ 그 책들을 만나는 걸 선호한다. 평소 눈여겨보았던 책을 중고서점에 갔을 때 발견하는 기쁨이란! 그건 내게 하나의 놀이이자, 신성한 의식과 같은 일이다.

 물론 새 책 한 권 가격으로 중고 책 여러 권을 살 수 있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내가 아기를 매달고서도 기어이 중고서점에 가는 행위를 다 설명해주지 못한다.

 지난달에 다른 도시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경로는 주로 아내가 짜는데, 여행지를 선정하는 기준은 첫째도, 둘째도 아이가 즐길 거리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내는 여행 이튿날, 날 위한 장소도 한 군데 가자고 하며 마음을 써 줬다. 난 주저 않고 말했다. 그 도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알라딘 중고 서점엘 가자고 말이다. 우리 도시에 있는 것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책도 많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섰지만, 내가 매달고 있던 아기는 서점의 규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냉철하고 정확하다. 그때도 아기는 내게 절제를 요구하며 에엥, 하는 소리로 다른 서가로 이동해야 할 시간임을 수시로 알려 주었다. 역시 큰 서점이라 그런지, 아기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 5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기 띠를 하면 아가의 온기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아기 띠를 하고 서점에 간다는 것은, 한껏 데워진 가슴으로 책을 대한다는 뜻이다. 어떤 통제와 구속도 없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책을 구경하는 것보다, 훨씬 뜨거운 심장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책을 대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아기 띠를 메고 중고 서점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훗날 아기가 서고 걷는 과정을 거쳐 어린이가 되었을 때, 난 서점에서 내 가슴에 매달려 책등을 쓰다듬던 그 작은 손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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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생각이 나네요 ㅎㅎ글이 따뜻한 느낌이 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옛 생각을 하셨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넘 멋진데요 뜨거운 가슴으로 내가 좋아 한느 책을 본다는거 저도 서점 무지 좋아 하거든용 중고 서점은 내가 갖고 싶은 책은 늦게 나오니까 그냥 서점가서 몇시간 읽고 오면 넘 좋더라구요

네 중고서점의 매력이 있지요.ㅎ 부담 없이 서서 몇 시간이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죠.^^

저도 누군가의 가슴에 매달려 책을 쓰다듬었었을까요, 책 좋아하는거 보면 필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손 끝에 아마 감각이 남아 있을 듯 합니다.ㅎ 그 감각이 되물림되겠지요.^^

중고서점에 매력엔 쉽게 빠져나올 수 없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책을 우연히 찾은 그 순간에 기쁨이란!

네 맞습니다. 한 번 맛들리면 중독되는 그런 마력이죠.^^

자식 키워본 사람, 책 좋아하는 사람은 100% 공감가는 글입니다.

자식 키우고, 책 좋아하는 분이네요.ㅎㅎ 반갑습니다.^^

제가 오늘 알라딘 중고 서점에 갔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제 리듬에 맞춰 편하게 컴퓨터에서 책도 검색해 가며 서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이것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자유는 아니었나 봐요. 서점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를 보더라도 불편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서점 나들이라니.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네 저도 그 자유가 가끔 그립고 부럽기도 하지만, 지금도 좋습니다.ㅎ
다만, 아기가 큰 소리를 칠 때면 주변 분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 같아 좀 죄송한 마음이지만요.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을 이해해주는 것 참 좋은 다짐입니다.^^

아기가 아버지를 책의 상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알람이네요 ㅋㅋㅋㅋㅋ

네 좋은 알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정확하고 확실한 알림이지요.ㅋㅋㅋ

아기가 커서 무의식 중에 그 때 가슴팍에서 들었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기억해 낼 것 같아요.

네 심장소리를 기억해내고, 책을 쓰다듬던 손 끝의 감각도 기억해내면 좋겠네요.^^

아기가 세상밖으로 나가기 위해 개인기를 방출하는 모습이 상상이되어 웃으면서 글을 읽게되네요 ^^

네 그 모습 보면 아주 웃깁니다.ㅎ 아기의 생각이 보일 때 신기하기도 하구요.^^

아기의 발동작과 서가의 이동.....절묘한데요?ㅎㅎㅎ
언젠가...그 아기가 커서 자기의 아기를 안고 서가를 걸어다니는 장면도 상상해봅니다.

네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요.ㅎ 다만 그때까지 종이 책이 살아남아야 할텐데요.
수십년 후의 미래를 쉽게 떠올리기가 힘드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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