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어 #2: Paris의 판단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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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추리 소설에는 뒤바뀐 정체성이라는 주제가 매우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자리를 바꾸고 분장하여 남들을 속이는 설정인데, 워낙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눈치가 빠른 편인 독자에게는 추리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파리의 판단(The judgment of Paris)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다. 한 귀족 부인이 대강 이렇게 받아친다.

But the judgment of Paris means nothing these days!
(파리의 판단이라니, 요즘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걸요!)

그녀는 당연히 패션이 화두에 오른 것으로 착각하였고, 당대의 패션에 있어 파리 패션계가 차지하는 역할이 예전 같지는 않다는 뜻으로 그렇게 대뜸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 부인의 무지의 결과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일행은 모두 경악하지만, 그녀가 평소 어린아이 같은 성품을 가진데다가 결혼을 통해 귀족 신분에 올랐기 때문에, 다소 어색하게나마 분위기가 수습된다.그런데 결국 그 발언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탐정 포와로에 의해 그녀의 범행이 밝혀지게 된다.

파리의 판단이란 한글로는 주로 파리스의 심판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의 원인으로 그려지는 사건을 가리킨다. 심판을 보다라는 의미에서 심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파리스의 판결이 조금 더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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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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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스의 심판, 루벤스

출생의 비밀을 가진 목동 파리스는 헤라(쥬노)와 아테나(다이아나), 아프로디테(비너스) 간에서 가장 미인을 판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파리스의 판단이란 이를 가리킨다.

용어 해설

귀족 부인의 실수는 한국에서는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의 도시 파리는 파리로, 그리스 신화의 파리스는 파리스로 부르니까.

반면 둘 다 파리스로 발음하는 영어에서는 다르다. 물론 파리스의 판단(판결)의 경우, 냉정하게 보아 상식 분야에 든다고 보면 되기 때문에 설령 혼동이 있다고 해도 거의 일시적일 것이다.

만일 파리스의 심판에 관해 완전히 처음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귀족 부인처럼 파리 패션계로 착각하는 일은 거의 없으리라고 보면 된다. 현재는 그때와는 또 문화적 배경이 다르므로.

Judgment는 맥락에 따라 심판, 판단, 판결 등 여러 가지로 이해하면 된다.

예시 1: The Judgment Day
(신에 의한 심판의 날)

예시 2: I don't trust your judgment.
(나는 너의 판단/판단력을 믿지 않아.)

추가 상식 1: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소설 심판은 영어로는 재판(the trial)이다. 원제목(Der Process/Der Prozess)은 재판을 둘러싼 모든 관료적인 절차까지 다 포함된 의미이다.

추가 상식 2: 그렇다면 대회 결과나 법관의 판결은? 정작 어떤 대회 심사과정이나 재판 과정이 끝나고 내려지는 판결의 경우, judgment보다는 verdict가 더 알맞은 용어이다. 대회의 심판을 judge라 부르는 경우는 많지만 그의 판정 결과를, 여러 뉘앙스를 갖는 judgment로 부르기보다는 verdict가 더 적확하다. 또한 (주로 징역/금고형을 선고하는) 유죄 판결의 경우 sentence가 더 알맞다. 결국 judgment는 신의 심판이 아닌 이상 판단/판단력을 가리키는 경우가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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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judgement 밖에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럼 만약 조 몬태나가 무죄 판결 받은 거 어찌 생각하심? 이라고 물을라면 verdict 를 사용해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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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흥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도 원서로 읽으시나요?
프란츠 카프카 심판도 읽어보고싶네요
변신밖에 몰라요 ㅎㅎ

예, 전 인터넷에서만 한글 읽는거 같아요 주로 스팀잇 ㅋㅋ

변신도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심판이 훨씬 더 우울했어요...

외국에서 생활하시거나 일이 영어쪽이신가보군요 ㅎㅎ

심판은 더 우울하다니 어떤 느낌일지 ㅋㅋ
변신은 약간 블랙코미디 같았는데 ㅎㅎ

네 어릴때부터 자랐어요.

심판의 전제도 사실 변신만큼 판타지적인데도 어지간한 현실적인 배경의 소설보다 더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조합의 느낌을 딱히 표현할 말이 없어서 Kafkaesque라는 말도 생겼고, 평론가 누군가는 K라는 머릿글자 하나만으로도 카프카가 연상된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위치의 작가라고도 하더라구요. 근데 그건 심판의 주인공 이름이 요제프 K인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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