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로 본 인생, 늦게 온 전성기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

in #kr6 years ago (edited)

오늘 다들 축구 얘기할 것 같아서 저는 야구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아니 어쩌면 야구 뿐 아니라 인생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바로 어제 한국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을 세운 엘지 트윈스의 박용택 선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만, 스포츠를 보면서 제가 눈 여겨 보는 것 중의 하나는 '전성기'입니다. 스포츠 선수의 경우 전성기라고 불리는 나이가 있습니다. 프로에 적응해서 신체의 능력이 떨어지기 전까지의 나이, 대부분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나이죠. 제가 좋아하는 송진우 현 한화 투수코치의 경우도 화려했던 20대를 거쳐 30대 초반부터 부진에 빠졌습니다. 31살, 32살이었던 1997년, 1998년 모두 각각 시즌 6승씩을 기록하며 은퇴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강속구 투수가 아님을 인정하고, 기교파로 변신합니다. 물론 그 때 미국 전지훈련 중에 배운 '써클 체인지업'이란 궁극의 신무기를 장착하기도 했죠. 그래서 그는 33살부터 40살까지 전성기를 유지하고, 43살에 은퇴합니다. 전성기가 늦게 온 덕분에 선동렬, 최동원처럼 강렬한 인상을 준 선수는 아니었지만, 투수로서 한국 프로야구 대부분의 기록을 차지합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박용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제가 박용택을 진지하게 주목하게 된 시기는 2016년 시즌이었습니다. 당시 박용택은 2000안타 기록을 앞두고 있었는데요. 시즌 초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 내 목표는 3000안타다. 2000안타는 신경도 안 쓰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1979년생인 박용택은 2016년 당시 만37살. 전 이 인터뷰를 보고서 이 사람이 농담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당시 명색이 일간지 스포츠부 야구담당 기자이니, 박용택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일단 누적 기록을 보면 박용택은 아주 독보적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KBO 데이터를 바탕으로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을 정리해봤더니, 2015년까지 안타순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위 양준혁(은퇴) 2318개
2위 장성호(은퇴) 2100개
3위 이병규 2042개 -> 2043개로 은퇴
4위 홍성흔 2036개 -> 2046개로 은퇴
5위 전준호(은퇴) 2018개
6위 박한이 1922개 -> 현재 2102개
7위 정성훈 1900개 -> 현재 2141개
8위 박용택 1874개 -> 현재 2321개
9위 이승엽 1860개 -> 2156개에서 은퇴
10위 이진영 1836개 -> 현재 2070개

2015년까지 현역 선수 가운데 박용택의 안타 기록은 5위였습니다.(이병규, 홍성흔, 박한이, 정성훈에 이어 박용택) 심지어 같은 팀이면서 나이가 어린 정성훈보다 기록이 뒤졌고, 마찬가지로 정성훈과 동갑인 이진영도 박용택보다 불과 38개 적은 안타수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엘지에서 저 세 선수가 머지않아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저 세 선수는 후배들보다 안타 생산 능력이 좋지만, 셋 다 타점이 많거나 장타율이 높진 않아 승리기여도가 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나이로 인해 기량이 발전할 가능성이 낮았고, 셋 다 수비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수비는 신체의 운동 능력이 그대로 반영이 되죠.

타격 능력은 조금 다릅니다. 일단 타석에 서서 투수들의 공을 눈으로 봐야 선구안이 좋아지고, 타격 능력도 향상됩니다. 그래서 젊은 선수들에겐 기회가 필요하죠. 그런데 오늘 경기의 승패를 위해선 당장 타석에 나가 안타를 칠 선수가 필요합니다. 저 세 선수가 안타를 곧잘 치는 유형이었죠. 하지만 오늘보단 내일을 위해선 과감하게 저 선수들을 정리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2015년엔 사람 못키우는 엘지, 이유 있는 ‘탈지효과’란 칼럼을 쓰기도 했죠.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엘지는 그 방향대로 리빌딩을 진행합니다. 이진영은 KT로, 정성훈은 기아로 갔죠.

셋 중에 박용택은 예외였습니다. 부족해진 수비력으로 인해 지명타자가 되었지만, 타격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진화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타격 능력이 떨어진 이진영, 정성훈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아니 저 두 선수 뿐만이 아니라, 프로야구 통산 최다안타 10위안의 모든 선수들이 30대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의 커리어 평균 기록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반면 박용택은 150안타 이상을 치기 시작한 33살(2012년 시즌)부터 39살인 올해까지 매년 자신의 커리어 평균 이상을 기록해왔습니다. 메이저리거인 추신수조차 32살부터 자신의 커리어 평균보다 낮은 출루율을 기록했고, 페이스가 좋은 올해(36살)만 커리어 평균보다 좋은 기록을 보여주고 있죠.

박용택 최근 3년 주요 타격 기록
2015년 159안타 18홈런 83타점 장타율 0.503 출루율 0.370
2016년 176안타 11홈런 90타점 장타율 0.458 출루율 0.412
2017년 175안타 14홈런 90타점 장타율 0.479 출루율 0.424

박용택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전성기를 맞았지만, 남들보다 더 길게 전성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는 솔직히 알지 못합니다. 송진우의 '서클 체인지업', 추신수의 '레그킥'과 같은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제가 더 이상 야구기자가 아닌 관계로, 그 비결을 앞으로도 알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박용택은 자신이 늦게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부터 남다른 목표를 세웠습니다. 바로 3000안타. 2016년엔 많은 이들이 조금 황당하게 여겼지만, 점점 진지한 목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매년 150개 이상의 안타를 친다면 그가 만 43살에 달성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페이스가 떨어지면 마흔 다섯살에도 쉽지 않은 기록입니다. 그 목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3000안타는 그가 프로야구 최다안타(2319개) 기록 보유자가 되고서 안타를 681개를 더 쳐야 달성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681개 이상의 안타를 친 선수는 지금까지 157명에 불과합니다. 이미 레전드의 반열에 오른 선수가 마흔살부터 만만찮은 도전을 시작하는 셈이죠. 그런데 그 만만찮은 도전을 그는 이미 30대 중반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야구 뿐 아니라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전성기를 열지만, 남들보다 전성기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에 늘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둘러보면, 많진 않지만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꼭 있긴 합니다. 언젠가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 각 사람들의 비결 등을 정리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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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월드컵때문에 묻히긴 했지만 정말 대단한 대기록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기록을 위해서가 아닌 실력으로 남은 커리어를 멋지게 장식해서 길을 터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른 젊은 선수들에게도 큰 자극이 될거 같아요. 꼭 야구가 아니어도 다른분야에도 귀감도 되구요

@hyeongjoongyoon님 안녕하세요. 깜지 입니다. @floridasnail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가이드독 ㅋ

참 탐나는 선수입니다 리더쉽도 느껴지고요

아무리 지명타자에 베테랑이어도 저만한 선수가 거의 없죠

이분 현역일 때 LG가 우승하면 20년된 비싼술은 이 분 다드려야 합니다.

삼천안타 치기 전이면 드려도 안드실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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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택은 정말 대단한 선수죠
사실 양준혁이 최대안타 기록을 세워놓고 은퇴했을때 이 기록을 깰 선수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겠다 싶었는데 그걸 불과 몇년 안되서 깨버리네요 ㅎㄷㄷ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됩니다.
전무 후무한 3000개 안타를 기대하며~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남들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뛰는 모습이 멋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사람 되고 싶네요...:)

전 늦게라도 전성기가 오려나 싶어요..

저는 꾸준한 운동선수들의 공통점을 유연성 & 피지컬 트레이닝이라고 봅니다. 기술, 수싸움은 점점 발전하지만 결국 반사신경과 근력은 30대 중반 이후로 사그라들고, 따라서 이런 형태의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 근력증강이죠 ㅎㅎ

특히 위에 타격 상위권 선수중 양준혁, 홍성흔, 박용택 선수는 웨이트 트레이닝 신봉자로 유명한걸 생각해보면 이 가설에 힘이 실리는거 같아요. 홍성흔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프리로 스쿼트를 그리 잘쳤다고 아직까지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역시~ 과학적인 원인 분석이군요 ㅋ 박용택의 루틴도 매우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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