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공연후기] 마에스트로가 버무려낸 달콤쌉싸름한 실내악 코스요리 -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 Carte Blanche to Dong-Suk Kang

in #kr6 years ago (edited)
17일.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퇴근하자마자 여왕님을 태우고 차를 내달려 세종로 주차장에 도착했죠. 근처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로 들어섰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그제서야 깨달았죠. 노란 렌즈가 끼워진 운전용 글래스를 아직 끼고 있다는 사실을...
워낙 근시가 심한데다 최근에는 난시까지 겹쳐서 일상생활 할 때와 운전할 때 안경을 바꿔 껴야 하는 저주받은 눈의 헤르메스. 노란 렌즈에 원래부터 노오~란 클래식 공연장의 조명까지... 덕분에 헤르메스에게 이 날 공연은 영원히 "노랑노랑"하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지난 5월 15일부터 시작해 오는 27일까지 이어지는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 이 날의 주제는 'Carte Blanche to Dong-Suk Kang'였습니다.

Carte Blanche가 '백지 위임'이니 강동석 선생에게 선곡부터 연주자 구성까지 모든 것이 맡겨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표현하면 "서기~ 하고 싶은 대로 해~"가 되겠습니다.^^

이 날의 레퍼토리는 보케리니, 슈베르트, 모차르트, 백스의 곡으로 구성되었는데요. 슈베르트와 모차르트야 별도의 소개가 필요 없을 테고^^ 보케리니는 이 곡만 들으시면 '아아~' 하실 듯합니다.

그렇죠?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 '보케리니의 미뉴에트'로 더 유명한 '현악 5중주 마장조 String Quintet in E major, Op.11, No.5'입니다.

강동석 선생께서 선정한 이 날의 첫곡은 루이지 보케리니의 '플룻과 현악을 위한 5중주 제1번 바장조Quintet for Flute and Strings No.1 in F Major, G.437'인데요.

라인업은 최나경(플룻), 강동석(바이올린), 이한나(비올라), 조영창(첼로), 주연선(첼로)...

강동석 선생의 의도 또한 그것이었는지는 감히 예단할 수는 없으나 라인업 구성에서 '노장청(?)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낸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보케리니가 원래 첼로 연주자였던 만큼 이 곡 또한 첼로, 특히 1번 첼로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곡 소개를 맡은 플루티스트 최나경의 말처럼, 직접 공연을 보지 않고 음원만 들으면 바이올린 두 대가 연주하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1번 첼로의 고음역 연주가 돋보입니다.

1번 첼로는 '레전드' 조영창 선생께서 맡아주셨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죠.

그리고 플루티스트 최나경. 넘치는 자신감과 패기, 낙천적 성격, 뛰어난 테크닉에다 최근에는 원숙미와 여유로움까지 더해 클래식 공연 관람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스타 연주자 중의 한 명이죠.

이 날 연주된 보케리니의 곡은 악보가 사후에 발견되어 정말 보케리니의 곡이 맞느냐는 의혹이 있을 정도로 희귀한 곡이라 합니다. 때문에 당장 악보를 구하는데도 애를 먹었다는데요. 유튜브를 검색하고 여기저기를 수소문한 끝에 LA 필하모닉의 협조로 마드리드 왕립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름난 연주자들도 악보가 없을 때는 유튜브를 검색한다'는 사실이 꽤나 재밌었습니다. 아마추어 록밴드랑 똑같네. 귀 카피는 안 하나? ㅋㅋ)

그럼 감상해 보실까요? 동영상에선 플룻을 뉴질랜트 태생의 미국 플루티스트 마리아 마틴이, 바이올린을 재미 바이올리니스트 김혜진이, 1번 첼로를 미국의 마에스트로 콜린 카가, 2번 첼로를 이날 공연의 네 번째 곡에도 참여한 에드워드 아론이 맡고 있습니다.

곡의 특성상 가운데 앉은 마에스트로 콜린 카의 첼로를 중심으로 감상하시면 더 흥미로우실 듯합니다.

두번째 곡은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 내림마장조 “야상곡“(F. Schubert Piano Trio in Eb Major “Notturno”, Op.147, D.897)이었습니다.

라인업은 임효선(피아노), 이경선(바이올린), 주연선(첼로).

이경선 교수.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죠. 냉철하고 과묵하고 안정된 '철의 여제' 같은 이미지로, 개인적으로 '믿고 듣는' 연주자 중 한 명입니다. 피아니스트 조재혁과 호흡을 맞춘 동영상 한 번 감상해 보시죠. 참 멋있습니다.

피아노에는 경희대 임효선 교수였는데요. 때로는 애잔하고 섬세하게, 때로는 강하고 또렷하게 드라마틱한 접근이 필요한 곡의 특성상 매우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던 듯싶습니다.

첫 곡에 이어 이번 곡에서도 저음역을 맡아 준 첼리스트 주연선은, 린 하렐의 제자이면서 서울 시향 수석 첼리스트라는 커리어에 걸맞는 안정감과 균형 감각으로 연주의 가치를 보이지 않게 높여주지 않았나 합니다.

자 그럼, 이 날의 두번째 곡이었던 슈베르트의 “야상곡“을 본격적으로 들어보실까요?

이어진 세 번째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4중주 제1번 사단조(W. A. Mozart Piano Quartet No.1 in g minor, K478)였습니다.

젊은 시절 이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레코딩'이라는 경력으로 널리 알려진 노회한 피아니스트 제러미 메뉴인과 외모부터 왠지 '파가니니스러운'(?) 마성이 다분한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야 그린골츠가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는 마에스트로 양성원과 협연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던 공연입니다.

그리고 G마이너라는 범상치않은 조성에서 보듯 '악기들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장 모차르트스럽지 않고, 결코 편안하게 들을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 가장 실내악스럽지 않은' 곡이었기에 흥미 두 배였죠.^^

(물론 왕성한 앙상블 연주 활동을 통해 다양한 협연자들과 성공적으로 작업해온 비올리스트 서수민을 빼놓아선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일 공연장에 가보니 양성원 대신 로테르담필의 수석 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임희영으로 연주자 이름이 바뀌어 있더군요.

선입견 때문일까요? 5열 가운데 앉은 제 귀로 확연히 전해지는, 연주의 균형이 무너진 듯한 느낌은...

사실 청각 신경에 이퀄라이저가 장착되어 있다면 트레블을 줄이고 미들과 베이스를 늘리고 싶을 정도였는데요. 그나마 비올리스트 서수민이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준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개성의 불균형' 때문인 듯한데, 제러미 메뉴인과 그린골츠, 그리고 임희영의 연주를 각각 들어보시면 그 날의 제 느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실 수 있을 듯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각 연주자의 개성에 집중해 주시길...

먼저 제러미 메뉴인과 그의 한국계 부인인 무키 리의 듀엣 연주입니다.

다음은 그린골츠가 연주하는 차이코스프스키입니다. 바이올린을 활로 베는 듯한 느낌입니다. 가끔 바이올린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한...

첼리스트 임희영의 연주입니다. 악기는 다르지만 훨씬 정리된 느낌입니다. 열정적이지만 일정한 선을 넘지는 않습니다. 연주 스타일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피아노가 뒤에 있고 현악기 연주자들이 저를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높은 음역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보니, 5열의 한 가운데 앉아 있던 저의 왼 귀에 들리는 그린골츠의 강하고 예리한 바이올린이 오른 귀의 정갈한 첼로를 압도해 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원래 라인업대로 양성원 선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제러미 메뉴인의 노회함을 배경으로 양성원의 섬세한 중후함과 그린골츠의 광기어린 예리함이 어우러졌다면...

참고로 양성원과 엔리코 파체의 협연입니다. 직접 관람하기도 했던...

자 그럼, 이 날 공연의 세 번째 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4중주 제1번 사단조를 본격적으로 감상해보실까요? 원곡의 의도를 기준으로 가장 모범적인 연주인 듯합니다. 물론 모범적인 것이 꼭 매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곡을 연주하기에 최적화된 라인업인 건 확실합니다...^^

끝으로 아놀드 백스의 피아노 5중주 사단조(Piano Quintet in g minor)입니다. 마지막 곡이라고는 하지만 40여 분에 걸친 대곡으로 인터미션 이후를 독차지하는 곡인 만큼, 이 날의 메인 이벤트라 할 법합니다.

아놀드 백스는 20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영국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이 날 연주한 곡은 피아노 5중주라기보다는 소규모 관현악, 나아가 발레 모음곡, 심지어 오늘날의 영화 음악처럼 느껴지기는 곡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이건 켈트다!'라는 느낌이 훅 하고 꽂히는....

울창한 숲 그늘 아래의 을씨년스러움, 신비한 정령에 쫓기는 듯한 긴박함, 그러다 홀연히 나타나는 초원, 초원을 내달리다 만나게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찔한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파도와 새햐얀 포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한 편의 장대한 판타지...

"처음 들으시면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다"는 강동석 선생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물론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예습'을 한 탓도 있겠지만^^) 켈트/드루이드적인 메인 테마와 스케일, 피치카토, 약음 등 실험적인(?) 주법의 과감한 활용, 긴장과 이완, 공포심과 안도감을 교차해서 엮어내는 예측 불가한 곡 구성 등에서 대단히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네요.

이렇게 설명이 장황하다는 건 꽤나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겠죠? 40여 분짜리 대곡이니 마음의 준비는 하시되, 결코 지루하지 않으니 선입견은 갖지 마시길...

자,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우선 눈을 감고 마법의 숲속으로...

이 곳은 키 큰 나무들이 빽빽히 서 있는, 맑은 대낮이나 햇볕 한 조각 찾기 힘든 북구의 원시림. 당신은 주위를 둘러보다 어느덧 숲의 정령에 홀린 듯, 두려움에 사로잡혀 숲 속 오솔길을 내달리기 시작하는데...

일요일 오후 가볍게 시작했던 글인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지려고 하네요. 당일의 분위기를 최대한 생동감 있게 전해드리기 위해, 참여한 연주자들의 동영상 중에서 개개인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들도 함께 소개하려다보니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연주자들은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들인 만큼, 링크를 걸어드린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 두셨다가 틈틈이 들으시면 클래식 감상에 거리감을 느끼셨던 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아놀드 백스의 피아노 5중주에 참여했던 연주자들 중, 신예 피아니스트로서 주목 받고 있으면서 이 날 변화무쌍한 피아노 파트를 의외의 원숙함으로 장악해낸 문지영, 비올리스트로서는 드물게 솔로이스트로서 음악성과 대중성을 골고루 그리고 오랫동안 인정받고 있는 김상진, 그리고 소갯말을 덧붙이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할 수 있는 마에스트로 강동석, 그리고 앞서 소개해 드린 조영창 선생이 함께한 브람스 피아노 4중주 1번 4악장 동영상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동영상 끝나고 혼자서 미친 놈처럼 "브라보~!!"를 외쳤답니다. ㅋㅋ)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는 27일까지 계속됩니다. 실내악의 특성상 당대의 대표적인 연주자들을 종합 선물 세트로 만날 수 있다는 부수적인(?) 장점도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관람 부탁드리구요. 저는 27일 폐막 공연 이후 한 번 더 이 행사에 대한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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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또 뵙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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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첼로곡 첨 들어보는 곡인데 너무 좋네요.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상연되는 곡이고 외국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악보가 발견된 곡이라네요. 저도 예습하느라 검색해서 찾아들었는데 듣자마자 귀에 꽂히더군요.^^

오옷? 그렇다면 완전 신곡이네요! 한 번 더 들어야겠습니다.

제가 살짝 헷갈리는데 말씀하신 '첫번째 첼로곡'이 이날 공연의 첫곡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일종의 '신곡' 맞습니다.^^

우와.. 헤르메스 형님은 클래식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스팀잇에는 참 다방면에 능통하신 분들이 많아요. ㅎ

능통은요. 그냥 오지랖입니다.ㅋ 관심 둬서 재미없는 건 없다는 게 제 좌우명 중 하나... 근데 아론님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신 듯한데요. ㅎㅎㅎ

제가 잘 모르는 수많은 다른 분야를 알고 계신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스팀잇이 참 좋습니다. ㅎㅎ

네, 그런 면에서 대표적으로 아론님의 알투디투 양육기(?)는 연재 시작부터 제게 문화충격이었습니다~ 너무나 부러워요~

좋네요. 우리 서로에게 신선한 문화 충격을 주면서 앞으로도 잘 지내보아요 ㅎㅎㅎ

아니 헤르메스님 글을 그렇게 잘 쓰시면서...
ㅎㅎㅎㅎㅎ 놀라운 분이네요 음악에 이렇게 조예가 깊다니
엄청난 정성이 들어간 포스팅이네요
풀봇 안드리면 벌받을것 같아요 ㅎㅎ

조예가 깊으신 분들은 따로 있습니다. 저야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호기심 많아서 모르는게 있으면 찾아볼 뿐이죠. 클래식이 아직은 많은 분들이 관심 갖는 분야가 아니라서 글 올려놓고 "갑분싸"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그래도 많은 분들이 반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과찬의 말씀,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반주 첼로곡 듣는 게 정말 오랜만입니다. 좋군요. 시간날 때마다 들러서 하나씩 꺼내 들어야겠네요.

락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전 스팀잇에서 소통하며.. 참 난 재미도 없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이젠 예전보다 더 재미있게 여러가지 경험하며
살게 될 거 같은 좋은 느낌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좋은 느낌 갖게 되셨다니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프사 좋습니다. ~~~

음악적 취향이 다양하시네요. 덕분에 오늘 마치 음악회를 간듯 구경해봅니다. 감상 잘할게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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