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Essay 010 | 반항심으로 피어나는 취향

in #kr6 years ago


010.jpg






엄마의 취향


아홉 살 때 즈음이었나.

어느 어린 날의 겨울날, 반 친구들 중 상당수가 안에 털이 달린 점퍼를 입고 다녔던 적이 있다. 그 시절 그 아이템이 유행이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한 순간 나만 그 점퍼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야 말았다. 노란색, 분홍색의 귀여운 외투를 입고 다니는 친구들을 바라만 보다가, 엄마한테 나도 그 점퍼가 입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나의 공세를 못 이긴 엄마는 어느 날 내가 원하던 새 점퍼를 사다 주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 색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비비드 하다 못해 광택이 번쩍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새 파란 그 색을. 그때의 내 실망감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기대감이 극으로 달했을 때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그 기분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어리고 또 어리석었던 나는 엄마를 원망했고, 그 점퍼를 너무나 싫어했다. 친구들은 전부 '여자색'을 입었는데, 나만 푸르둥둥한 '남자색'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가볍고 따뜻했던 그 점퍼는 내게 조금도 자랑거리가 되어주지 못했고, 엄마한테 왜 '남자색'을 사 왔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갔는데, 어쩐지 친구들의 표정은 우쭐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반해 나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반항심이 취향에 미치는 영향


엄마가 어릴 때 코르덴바지만 입혀서 어른이 된 지금도 코르덴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어느 예능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는 한편, 어른의 취향이란 어떻게 완성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어린 날 엄마의 취향에 의해 선택되는 원치 않는 많은 것들에 대한 반항심이 또래문화의 유행과 충돌하며 갈팡질팡하다 어른이 되어 점차 자기의 색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타고난 성향은 저 깊은 아래에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스며든 엄마의 취향과 또래들의 문화는 내 성향보다 더 진하고 강렬하게 선택을 좌우한다.

어릴 때 온전히 나의 성향을 찾아볼 기회가 적으면 적을수록 취향은 섬세해지기보다는 양극단 중 하나로 가기 쉬운 것 같다. 또래문화에 완벽히 물들거나, 오히려 선입관으로 인해 보수적인 취향을 선택하게 되거나. 우리는 '아이의 취향'이라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어른이 된 내게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어리 날에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그 무엇에든 의문을 품고, 남의 기호가 아닌 나의 기호에 대해 생각해보고 고민해 볼 여지를 너무 적게 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닮아가는 모습


엄마는 가끔 집에서 입을 만한 옷들을 사다 주곤 하는데, 얼마 전 엄마가 사다준 수면바지는 핑크와 하트의 콜라보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예전에도 진한 핑크색 반팔티를 사다 준 적도 있다. 난 집에서 조차 그 색을 입고 싶지 않았지만 버리지는 못하고 고이 모셔두었다. 나는 엄마에게 여러 번 핑크와 무늬를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엄마와 나의 취향은 매번 엇갈렸지만, 엄마와 너무나도 닮은 점과 다른 점이 교차하는 지점에 나의 취향이 자리 잡고 있다. 엄마는 거의 모든 옷이 네이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어른이 된 나는 주로 무채색이나 톤 다운된 블루를 선호하게 되었다. 엄마보다 더. 어릴 땐 불만이었던 엄마의 취향을 어느새 다른 톤으로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취향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P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Lifestyle Essay 001 | 현실감각과 관계들
Lifestyle Essay 002 | 약속의 굴레
Lifestyle Essay 003 | 무색무취의 아이러니
Lifestyle Essay 004 | 기록의 양면성
Lifestyle Essay 005 | 나를 알아가는 시간
Lifestyle Essay 006 | 변하지 않고 변화할 것
Lifestyle Essay 007 | 감흥의 기원
Lifestyle Essay 008 | 모두의 효율
Lifestyle Essay 009 | 결론 없음에 대하여






Sort:  

엄마가 던져준 핑크회색의 별모양 수면바지를 아무 생각없이 입고 있다가 이 글을 보며 깜짝 놀랐네요ㅋㅋ

나의 성향을 찾아볼 기회가 적으면 적을수록 취향은 섬세해지기보다는 양극단 중 하나로 가기 쉬운 것 같다.

취향도 선택일까요? 자유의지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사회화의 결과? 문득 취향을 고민할 기회가 없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글 속에서 그저 외부 환경의 무언가가 내 안에 내재화된 선호 정도가 취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지만 제가 끝까지 수많은 사람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록스를 취향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는 걸 보면 어쩌면 구분되서 별개로 존재하는 저만의 취향이란 게 있을지도 몰라요.

획실히 지금은 취향의 부흥기죠. 취향이 팔리고 소비되는 시대. 유행보다는 더 개인적이고 깊고 통합적인 라이프스타일의 관점.

적고나니 정말 두서없네요. P님 라이프 에세이는 정말 제 취향이라는 아무말 대잔치로 끝내야겠어요.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쓰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대단한 명품백 대신 셔츠의 질감이나 커피 한 잔의 향이나 불필요한 것 없이 적당히 기능적인 심플한 물건들에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건 사회적인 분위기와 일상의 질이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크록스 정말 제 취향 아닙니다. ㅋㅋㅋㅋ

어릴 때 청으로 된 옷 입는걸 엄마가 싫어하셔서 반항심리로 입다....30대가 된 지금은 엄마 취향으로 ㅎㅎㅎ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는 순서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ㅎㅎ

다 큰 지금은 서로의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선물을 주고받으며 이해가 안 된다며 실랑이를 벌이곤 하죠. 마치 짜여진 희극처럼.

취향도 다를뿐 더러 의미부여도 각자 다르게 하기 때문에 선물은 정말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전 선물은 주는 사람의 몫과 자유도 약간은 있는 것이 좋다고 느끼는데, 어떤 사람은 받는 사람에게 실용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ㅎㅎ

핑크와 하트의 콜라보 수면 바지 저 주세요. ㅋㅋㅋ
핑크도, 하트도, 수면바지도 좋아합니다. ㅎㅎㅎ

저 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핑크핑크 좋아하는데..ㅎㅎㅎ

아니 두 분...핑크 좋아하시는군요!!ㅋㅋ 애석하게도 제가 산 올그레이 수면바지와 번갈아가면서 입고는 있습니다...

엄마의 취향을 모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 이래서 집에 딸이 있어야 하나 봅니다...

딸이어도 엄마의 취향은 세상 제일 어렵고 이해안가는 부분입니다. ㅎㅎㅎ 서로가 서로의 포인트를 절대 모르죠.ㅋㅋ

반항심으로 피어나는 취향.. 정말 비슷한 경험들이 너무 많아요. 특히 엄마가 사다준 옷들로 시작된 그 취향. 사실 취향이라기 보단, 적극적으로 안 좋아하게 되는 그런 느낌.. 사다줘서 고맙긴 한데. 딱 좋아하는 그것이란 느낌은 거의 없었어요. 타인의 취향을 알려면 섬세한 관찰이 필요한데, 부모 자식간에는 그런 게 별로 없죠..

엄마가 사다준 성의를 무시할 수 없기에 매몰차게 버리지 못하고 어디엔가 수납해두어야 한다는 점이 마음을 찝찝하게 만들곤 하죠. ㅎㅎ 그런데도 저의 취향을 설명하려고 하면 엄마는 그만 얘기하라는 눈빛을 보냅니다. ㅎㅎㅎ

저는 엄마한테 옷 고르는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작년에 같이 옷가게에 갔다가 깜짝 놀란적이 있어요. 제가 옷 하나를 사려고 골랐더니 엄마가 자신도 이곳에서 샀던 옷이라고. ㅋㅋㅋㅋㅋ 게다가 엄마에겐 조금 크고 짧은 원피스라 제가 뺏어왔어요.

아무래도 생김새가 비슷하니 취향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다보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도 같아요.

ㅎㅎ아이러니 한건 엄마가 산 엄마의 물건이 엄마가 저에게 사다준 물건보다 더 괜찮고 탐이 날 때가 많다는 거에요. ㅋㅋㅋ

Coin Marketplace

STEEM 0.22
TRX 0.27
JST 0.041
BTC 104664.06
ETH 3858.84
SBD 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