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미지, 영상의 밀도

in #kr6 years ago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이, 글보다는 이미지가, 이미지보다는 영상이 대세가 된 요즘의 시대,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소비하고 활용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무엇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길이와 호흡이 달라지고 태도와 방식이 달라졌음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변해가고 있는 각자의 밀도와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글의 길이


길고 어려운 글이 소비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차분히 앉아서 두꺼운 책을 읽어내는 인내심이 좀처럼 생기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스마트폰을 익숙하게 다루는 세대들에게서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과 책을 소비하는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달라진 습성만큼 그에 맞는 글과 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행길에 쓴 누군가의 짧은 일기와 sns 활동을 캡처해놓은 듯한 모음집도 책이 되어 소비되고 있다.

너무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소비되는 책과 글에 대해 어떤 시선을 두어야 할까. 어려운 책을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조차 없다면, 글과 책을 소비하는 양은 지금보다 줄어들지 모른다. 영상이 익숙한 세대가 글에 대해 갖는 관심의 영역이 더 좁아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온전히 즐기며 읽는 태도가 책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것 보다는 희망적이고 진실될 수 있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름에서 따온 '호킹 지수'는 '책을 구입한 독자가 실제로 그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를 뜻한다. 천만 부 이상 팔린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의 호킹 지수는 100을 기준으로 6.6에 불과하다.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왜 다 읽어내리 지도 못할 책들을 구매해가며 호킹 지수를 떨어트렸을까.

지식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더 길고 어려운 책을 소비하게 이끄는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이미지의 감각


인스타그램은 이미지 소비를 먹고 자랐다. 말도 안 되는 논쟁이 피곤하고 딴지를 거는 참견이 싫었던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떠나 인스타그램에 둥지를 옮겼다. 그저 하나의 sns 채널에 불과했던 인스타그램은 사람들의 습관을 바꿔놓고 시선을 달라지게 했다. 내 일상을 이미지로 공유하고 남의 일상을 사진 한 컷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시각에 대해 예민하게 만들었다. 공간의 시각적 효과가 중요해지면서 포토존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인스타그램에서 통할 법한 느낌이 인테리어와 디자인의 흐름마저 바꿔놓았다.

실시간으로 이미지가 소비되다 보니, 하나의 프레임 안에 모든 것을 담은 종합 선물세트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한 컷이 더 중요해졌다.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매력이자 미학이 되었고, 흐릿하거나 어두운 것도 더 감각적인 것이 되었다. 한 장의 사진이 담아내는 임팩트보다는 일정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것들의 분위기가 얼마나 그 맥락을 잘 유지하는 지에 따라, 흥망성쇠가 판가름난다.

사진도, 그림도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고, 짧은 글이나 시도 그 안에서 이미지로 소비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부정 혹은 긍정의 이분법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렇다.








영상의 쾌락


글 보다 영상을 먼저 접하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해졌다. 검색도 학습도 힐링도 재미도 모두 유튜브에서 해결한다. 영상은 문자로 읽히는 글이나 고정된 이미지보다 더 쉽고 더 편하게 시간을 소비할 수 있게 해 준다. tv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 하기도 한데,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건너뛰기도 하고 하이라이트 영상만 보고 대충의 내용을 감지하기도 한다.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것만 취하면 되고 실시간으로 소통을 할 수도 있으니,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있기는 하나, 플랫폼을 만들어가는 주도권은 상호보완적이다.

전반적인 영상의 호흡은 짧아진 듯 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자극과 힐링이라는 반대적인 요소가 asmr이라는 컨텐츠 안에서 만나고, 브랜드의 프로페셔널한 영상보다 일상을 기록한 브이로그의 조회수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특별히 뭘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또 괜히 보게 되는 맛이 있다. 조용한 듯한데, 귀를 기울이면 주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더 크게 들려온다.

시끌벅적함이던 잔잔함이던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선택되겠지만, 결국엔 즐길 수 있는 요소인 쾌락으로 향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글과 이미지와 영상


글과 이미지, 영상 이 셋 중에 어떤 것이 가장 밀도 높은 컨텐츠일까. 글이 반드시 영상보다 깊은 것이고, 영상이 반드시 글보다 헐겁다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요리를 할 때 블로그의 글과 사진을 찾아보는 사람이 있고, 영상으로 검색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정확하게 명시된 그램수가 더 밀도 높은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영상 안의 행동이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밀도와 감각이 다를 수 있고,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익숙하게 경험했는지에 따라 더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글의 호흡은 빨라졌지만, 잔상이 남는 한마디를 더 원하게 되었다. 이미지는 단순해졌지만, 모아 보면 뭔가가 느껴져야 한다. 영상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만큼 어딘가 빈구석이 있어 숨 쉴 틈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 전에 이것이 시대의 무드(mood)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 우리의 일상을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다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보다 훨씬 더 담담하고 심플한 방식으로.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의 신곡 'Don't Miss It'의 뮤직비디오는 그저 스마트폰 메모장에 가사가 쓰여지는 장면 하나만을 보여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놓치지 마'라고 되뇌는 가사 때문인지, 우울한 곡의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디지털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이 화면은 꽤나 감성적일 뿐 아니라, 아날로그적이기까지 하다. 혼자 되뇌며 메모장에 적어 내려 갔을 법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날로그적'이라는 것은 경험과 감정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지, 어떤 물건이나 컨텐츠를 아날로그적이다 아니다로 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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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고 갑니다. 지금 태어난 세대는 도대체 어떤 세상을 살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저도 어릴 때 책을 덜 보고 텔레비전을 더 볼껄 그랬습니다..

그러게요. 똑같이 겪어본 것이 아니니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어릴 때 책을 더 안본 걸 후회하는 경우는 많은데 ㅋㅋ이제는 정말 영상을 더 봐야하는 시대일수도 있구요. ㅎㅎㅎㅎ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한데, 요즘 어린이들은 스마트폰의 전화 아이콘이 수화기라는 사실을 모른대요. 수화기를 써 본적이 없어서 그 모양이 뭔지 모르는거죠. 심하게는 아날로그 시계를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현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자라는 아이들과 우리가 자라면서 겪었던 것들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이죠. 그만큼 사회와 기술 발전의 흐름이 빠르다는 이야기기도 하고요.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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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집에 전화기를 놓지 않는 세대들이 많아서 잘 모르는 아이들도 있을 것 같네요.
저 어릴때만 해도 집에 전화기가 없는 집도 있었는데^^;;

전 어릴 때 유선전화를 써서 무선전화있는 집을 부러워했는데, 이 이야기도 너무 옛날이 되어버렸네요 ㅎㅎㅎ

저도 그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전화기 얘기하면, 손바닥을 네모로 펴서 스마트폰 모양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ㅎㅎ 동화책도 누르면 소리가 나는 형태가 많아서 그냥 책인데도 눌러보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더라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글을 좋아하지만 영상도 특히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글 -> 이미지 -> 영상으로 변화해 나가는 흐름이 자연스럽고 타당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낯설기도 하네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일상에 다 스며들어온 듯한 느낌.

특히 인스타그램에서 통할만한 인테리어, 아이템 관련 사업들이 발전하는 사실이 참 재밌네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겪이라는 트렌드코리아의 설명이 적절한 예가 아닌가 싶어요.

담담하고 심플하지만 잔상과 의미를 주어야 한다니. 아이러니하네요. 참 좋은 글입니다.
처음에 풀봇을 드리지 못한 게 죄송할 정도에요. 흑흑. (기계적인 보팅의 폐해 ㅋ)

맞아요. 정신차려 보니 우리의 습관이 바뀌어버렸 던 거에요.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에 유투브를 아이 손에 들려주고, 나중에 가서 왜 책 읽는 습관을 갖지 못하냐고 말하는 건 모순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생각했어요. 현실을 인정해야 좋은 흐름으로 유도할 수도 있는 건데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반드시 어떤 컨텐츠가 어떤 것 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도 의문이 들어요. 저 역시 영상 소비를 글 보다 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ㅎㅎ

인사이트가 생기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인사이트라 말씀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ㅎㅎ

뮤직비디오 아이디어 좋네요. 우리세대의 문화소비방식을 아우르는듯한..그런 느낌이네요ㅎㅎ 유튜브 조사하다보니 저도 영상보는게 예전보다 편해졌어요. 이상한건 영상보는 시간이 늘어나면 책 보는 시간이 줄어든다는거에요..흠.

뮤직비디오 느낌있죠. ㅎㅎㅎ 전 요 며칠 무한반복하고 있답니다. 하루는 짧은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영상도 보려니 쉽지 않은 건 사실인것 같아요. 경아님은 다 잘 해내시리라 봅니다.ㅋㅋㅋㅋ

깊이의 의미도 모호해지고 어떤 한가지 컨텐츠가 주류를 쉽게 대체할 수도 있는 시대라 저는 그 변화가 좀 벅찹니다. 자연스럽고 쉽게 받아들이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그저 세상의 변화만 가지고 통탄할 뿐입니다만 결국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열등감입니다..^^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빠르긴 하죠. 전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일인지라 열심히 보고 있지만 저 역시 그 속도가 가끔은 버겁기도 합니다. 보다 어린 세대들은 지금 익숙한 걸 낯설게, 지금 낯선것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을테니까요. 여러 세대의 것들이 다양하게 대세가 되어 섞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

이런 시기에 글쟁이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ㅎㅎ 저도 고민이에요. 하지만, 지금 환영받는 글이 있고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좋은 글도 있으니 시대의 흐름을 잘 알면서도 내것이 너무 흔들리지는 않게 지켜가며 글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쉽진 않지만 ㅠㅠ

점점 더 농축된 것, 편집된 것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간다고 생각해요.

영상을 소비하는 패턴도 만약 축구경기가 90분이라면, 골장면이나 하이라이트만 모아서 보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거죠. 예능도 1시간짜리 방송이면 진짜 재미있었던 장면을 30초~1분으로 편집한 것만 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글자를 소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 같습니다. 글자를 보긴 보되, 잡스러운 부분은 모두 도려내고 진짜 필요한 알맹이만 보고 싶은 거죠.
그래서 아마 앞으로는 소설도 굉장히 빠른 전개를 보여주는 책들이 많이 팔리지 않을까...요?

인기있는 드라마의 전개나 장르는 매우 그런 편인 것 같아요.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몰입감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으니까요. ㅎㅎ 책의 경우는 오히려 별다른 사건이나 몰입감보다는 일상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경험담이나 에세이쪽이 많아지고 있는 듯 해요.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서는 더 세밀하게 다루는 느낌이에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알맹이가 달라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책의 두께는 확실히 얇아진 느낌이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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