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14 나루 작업 일지] 도 - 미 - 솔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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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첼로와 해금 그리고 나, 셋이 모여 합주를 했다. 몇 달 전 공연을 함께 했었는데 그때 악기 구성도, 사람 구성도(나는 성격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 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잘 맞아 꼭 다시 해보고 싶었다.

촉박한 일정이라 며칠 전 부랴부랴 쓴 곡을 합주 한 번으로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단한 초견으로 합을 맞춰보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정말 망했다. 접고 집 가야겠다.'

연주자도 초견이었을뿐더러 무엇보다 나 역시도 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조한 티가 났고, 엉성한 편곡이 발목을 잡았다. 암묵적으로 '시간이 없었으니 괜찮아'라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시간이 없었다고 해서 내가 쓴 곡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라 괴로웠다.


그 곡 말고는 별다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이 곡을 살려보기로 했다. 곡이 좋으면 연주를 못 해도 음악이 좋고, 연주가 좋으면 곡이 안 좋아도 음악이 좋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기량에 내 곡을 묻어가기로 했다.

간절했기 때문에, 8분짜리 곡을 8마디씩 끊어가며 연습했다. 시간이 없어 악보에 악상기호도 그리지 못했다. 우리는 적은 단위로 맞추면서 음악의 다이나믹을 만들고, 최대한 표현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대강 훑기만 했는데 4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보통 합주는 2시간, 길면 3시간이다. 그것도 한 번의 합주에 여러 곡을 맞추는데 한 곡만 4시간이라니.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 노고 끝에 얼추 합이 맞아가고, 곡도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문제는 빠른 부분에서 생겼다. 박자가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 명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맞춰도 나아지질 않아 극단적 방법을 택했다. 메트로놈을 틀어놓고 한 명씩 연주해보고, 둘둘 짝을 지어 해보고, 그다음엔 다 같이 박자를 맞췄다. 점차 박자가 정확해졌고, 그때 알게 되었다.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각자의 그루브가 다르다는 걸.

한 명은 클래식, 한 명은 국악, 한 명은 실용음악이라는 게 재미있었다. 빠른 부분이라 각자의 그루브가 더 도드라졌던 것이다. 처음엔 한 가지로 통일했다가, 재미가 없어 각자 잘하는 걸 하기로 했다. 서로의 그루브를 받아들이고 나니 곡이 훨씬 더 좋아졌다.


나는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의 재즈 트리오 구성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트리오라는 말을 들으면 저 악기 구성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해금, 피아노, 첼로는 왠지 트리오가 아닌 것 같다.

합주를 돌아보니 어제 우리는 잘 만들어진 트리오였다는 생각이 든다. 곡이 별로라는 끈끈한 결속감이 생겨 서로의 연주에 세심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연주가 내게 영향을 주고, 또 내 연주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이 사람 구성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인 목적은 곡을 완성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함께하는 사람과의 깊은 조화를 느꼈다. 결국 합주는 다섯시간도 더 지나서야 겨우 끝났지만, 나는 내심 합주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이제서야 음악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걸 얼풋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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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음악은 하모니군요. 여러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화합해야 좋은 음악이 되나 봅니다. 만드는 과정은 힘들어도 저렇게 딱 맞춰질때 희열이 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학창시절 합창단이어서 힘든 연습끝에 조화로운 화음이 연주될때의 희열이 문득 기억나는군요 ㅎㅎ

댓글에 남겨주신 하모니라는 단어가 새롭게 느껴지네요. 왠지 발음도 예쁜 것 같고요. 처음엔 아마 저희 모두 망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조금씩 나아지는 걸 보며 속으로는 다들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합창단을 하셨군요! 저도 학창시절에 합창을 몇 번 해봤는데 반 친구들이 하나가 돼서 노래를 부를 때 몇 번 전율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대개 반주자였는데 그걸 지켜보는 게 참 재밌었어요. 덕분에 즐거운 추억을 또 하나 되새겨보네요.

합주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느낌으로 말할 때 느낌도 꽤 괜찮더라구요.
최근에 그런 곡을 들은 적이 있는데, 복잡한 감정을 느꼈었습니다 ㅎㅎ

음악하시는 모습 좋습니다 ㅎㅎ 부러워요

그러게요. 따로 이야기해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더라고요. 최근에 들었던 그 곡을 여쭤도 괜찮을까요?

그나저나, 사진과 음악을 꿈꾸는 천문학도라니! 정말 멋있는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께서 작곡 하신건데 개인 보관하고계셔서 세상으로는 나오지 않은 음악인것 같아요 수업중에 우연히 들려주셨거든요 ㅠㅠ 알려드릴 수가 없어 아쉽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요즘 잡담만 올리고 사진과 음악공부가 조금 뜸합니다 ㅠㅠ 그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ㅎㅎ 잘부탁드려요!

들어보고싶어요 나루님!~🤠

ㅋㅋㅋ 크리스님. 저 곡은 저희 모두 추억에 묻어 두기로 한 곡이라... 아쉽습니다. 다음에 (이것보단) 더 나은 곡 들려드릴게요:)

데모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악보로만 남은 곡인데 그냥 이대로 묻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좀 더 좋은 곡 들려드릴게요 (_ _)!

그걸 一味, 한맛이라고 부르지요. 修行용어인데 저는 이 단어를 엄청조아라해요. 한 맛 속에는 여러가지 맛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맛을 내지요. 모두 똑같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지요. 조화로움인거지요. 그 하모니를 들어보고 싶군요. 개인적으로 저는 가야금과 오케스트라가 합연했던 캐논을 조아했어요. 찾아보니까 없네요. 꿩대신 닭.

쭉 댓글 달면서 올려주신 곡을 들었습니다만... 정말 아쉽게도 저는 이 곡이 좋지 않군요...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걸 들어보고 싶어요. 실은 이런 류의 연주를 좋아하진 않습니다... 정성껏 남겨주셨지만... 괜한 죄송한 마음이 드는군요. 마음씨 넓은 피터님께선 이해해주시겠지요?

죄송할게 무에 있나요? 취향이 다른 것인데요. ㅋㅋㅋ.

ps. 나루님의 자작곡을 한번 올려보시는 게 어때요?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데 :-)

그러니까요. 많이 궁금해하시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우선 제 곡에 늘 자신이 없고, 두 번째로는 곡을 올리게 되면 어쨌건... 제가 드러나는 거라 그게 아직까진 두렵네요. 아잇. 참 저도 잘 모르겠네요 ㅋㅋㅋ

그맘 알지요. 자신을 드러낸다는게 힘들긴 하지요. 편안하게 생각하시고요.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나루님의 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오시길요. 특히 자신에 대한 만족이 중요하지요. 그렇지만 때로는 그 만족 추구가 강박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가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또 반대로 경솔하지 말라고도 하지요.

어쩌란 말야?

편안해질 때가 그 때인 것 같습니다.

공명이라는 단어를 알긴 하는데, 뜻이 확실하지 않아 찾아봤어요. 여러 뜻이 있네요. 共鳴을 설명해주신 걸까요?! 그렇다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삶에서는 자신감이 충만한데, 음악에서는 그렇지 못하네요. 아마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걸 알기 때문에 더 그럴 거예요.

어제 피터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최근 본 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 이거에요.

나 스팀잇 패인

나 스팀잇 패인

나 스팀잇 패인

나 스팀잇 패인

키득 키득 키득..... 이 노래는 어떨지... 이게 바로 共鳴

이 노래... 뭐죠? 엄청 많이 들어본 곡인데 혹시 유명한 다른 버전이 있나요? 너무 익숙한 멜로디인데...

나루님의 작업일지는 왜인지모르게 글 읽는게 지루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선 공감하게되요. 곡이 별로라는 것에 끈끈한 유대감이 생겼다는 말도 왠지 공감되네요 상황적으로. 하지만 정작 좋은 곡일것 같네요

음악 작업을 하며 느끼는 거지만, 모든 작업에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삶을 살아가면서 음악을 통해 배운 삶의 태도를 적용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정말 겸손 아니고... 객관적으로 굉장히 별로였습니다...

ㅎㅎㅎㅎㅎ단호한 나루님...

캬.... 합주가 생각보다 오래걸리네요...
그런데도 끝나지 않길 바라셨다니.. 진정한 음악인....

진정한 음악인

굉장히 민망하고 오글거리고.. 부끄럽네요. 그냥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맞춰가는 과정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ㅎ하핫!! 진정한 음악인이시죠~~^^
즐기시는게 제일 좋은겁니다!!

나루님의 작업일지는 왜인지모르게 글 읽는게 지루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선 공감하게되요. 곡이 별로라는 것에 끈끈한 유대감이 생겼다는 말도 왠지 공감되네요 상황적으로. 하지만 정작 좋은 곡일것 같네요

박자는 같은데 그루브가 달라서 서로 다른 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지다니 ! 마치 클래식 음악 연주자와 재즈 연주자가 똑같은 곡을 같은 템포로 연주하지만, 둘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천지차이인 것과 비슷하네요 ㅎㅎ

네! 정확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 둘이 같이 연주했으니 그 그루브가 더 달랐겠지요? 그런데 배워서는 할 수 없는, 그 서로 다른 그루브가 참 재밌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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