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기 4. 구르는가, 멈추었는가

in #kr-travel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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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쓰러져 자고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내 여행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던 기계가 이제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았다. 그 기계는 더 이상 복잡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전원버튼을 누름에 따라 켜지고 꺼지는 화면 아래의 키만이 그 기계가 켜져있는지, 꺼져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이제 나는 내 소식이 궁금할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휴대폰에 저장한 수많은 메모도, 사진도 잃었다. 더 이상 쉽게 숙소를 예약할 수도 없고 그랩으로 차를 불러서 탈 수도 없다. 내 위치와, 목적지로 가는 길을 확인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여행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여기에도 PC방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리셉션 직원에게 인터넷 카페가 어딨는지를 물었더니 이해를 못 하다가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가리켰다. 나는 고철덩어리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리셉션 데스크 안에 있는 컴퓨터를 쓰겠냐는 시늉을 하기에 일단은 확인할 것이 있어 사용했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 타이핑도 불편했다. 베트남에서는 로마자에 성조를 표기한 문자를 사용한다. 쿼티 자판으로 입력을 하되, 여러가지 규칙으로 문자를 변형한다. 가령 ee는 ê가 되고, dd는 đ가 된다. 이렇게 반복되는 문자들만 합쳐졌다면 그나마 수월했을텐데 as, af와 같은 조합들도 있어 타이핑이 어려웠다. 타이핑이 어려워서 더딘데 눈치까지 보여서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몸짓을 섞어서 설명을 했더니 이번에는 알아들은 모양인지, 나가서 우회전 2번, 좌회전 1번이라고 길을 알려주었다.

베트남은 길이 수시로 휘어지고 갈라진다. 좌회전 1번만으로도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올 수 있기도 한다. 그래서 전혀 확신을 갖지 못 하고 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확히 도착했다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컴퓨터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리셉션 직원은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컴퓨터를 살 수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이다. 조금 둘러보니 컴퓨터 뿐 아니라 전화기도 팔고 있어서 혹시 수리를 할 수 있을까 몇군데 물어보았지만 모두 판매만 하는 모양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없어서 내 고장난 휴대폰을 꺼내 보이고 드라이버로 조이는 시늉을 하며 "Fix," 반응이 없어서 이번에는 "Repair," 그리고 돌아온 말은 "Sorry."

아침을 먹지 않고 아침부터 걸은데다가, 허탈함까지 느껴져서 배가 고팠다.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하필 음료만 파는 카페였지만, 나는 그냥 음료라도 마시길 택했다. 요구르트를 한잔 마시며 점원에게 내 휴대폰을 보여주며 고칠 곳이 없냐고 했더니, 또 익숙한 "Sorry," 하지만 이어서 생소한 "Wait"도 남기고 점원은 안쪽으로 갔다. 점원과 함께 한 사람이 나왔다. 내가 여행 중에 본 베트남 사람 중에 가장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그는 아마도 사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근처에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음료를 다 마시고 돌아갈 때 자기를 부르라고 했다. 갑자기 마음이 풀어져서 요구르트를 느긋하게 마실 수 있었다. 많이 달지 않고, 맛이 아주 진해서 맛있었다. 달랏의 특산품 중 하나가 우유라서 요구르트도 맛있었을까? 억지로 요구르트라고 했더니 갑자기 짜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요거트, 요거트다.

요거트를 다 마시고 잠깐, 영어를 잘하는 그를 부르기 위해서 점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일단 계산을 하고 "Excuse me"라 했더니 바로 "Wait"라 답하고 다시 안쪽으로 갔다. 기다리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참 답답하기도, 든든하기도 하다. 곧이어 나온 그를 따라갔다. 직원에게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했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친 후 나에게 20분을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너무 고마웠다. 달랏에는 친절한 사람들만 있는 모양이다. 안쪽을 흘긋 보았었는데, 작업실이 있었고 거기서 즉석으로 휴대폰을 고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잠깐 멈췄던 톱니바퀴가 다시 굴러가는 기분을 느끼며 기다렸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더니 작업실에서 사람이 나와서 나에게 휴대폰을 들어보인다. 내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잠깐 살펴보더니 카운터 직원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고, 카운터 직원은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금액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문제는 카드 계산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현금으로 계산을 하려면 내가 가진 현금의 전부를 내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현금 전부를 내놓는다는게 내 목숨을 내놓는 기분이라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 후에 은행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쳤다. 여행의 마지막에 현금이 다 떨어졌지만 그래도 현금을 인출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현금은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건 아니어야 했다. 나중에는 그 수리점은 사기였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명백한 인지부조화라는걸 알면서도 정신이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도록 가만히 둘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살피는 것도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다.

수리를 포기하고 다시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걸었더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파져서 또 다시 눈에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음식을 열심히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면요리를 주문하려고 했다. 묘하게도 직원이 나에게 그 메뉴는 김치가 들어간게 더 맛있다고 했다. 내가 한국인인걸 알아보고 추천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 메뉴는 라면에 김치, 계란을 넣고 같이 끓인 것에서 매운맛, 짠맛을 크게 덜어낸 맛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디 갈 때마다 PC방의 위치를 물었지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가리키거나 "Sorry" 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달랏에서 떠날 버스표를 사는데, 직원이 영어가 유창하기에 다시 한번 희망을 품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이번에는 "Sorry"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당 돈을 지불하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표를 사고 그가 알려준 길을 따라 갔다. 온라인 게임의 로고들이 그려진 가게가 나왔다. 드디어 찾았다.


지난 글
베트남 여행기 1. 호치민에서의 첫날
베트남 여행기 2. 아기자기한 무이네
베트남 여행기 3. 운수가 좋았던 달랏에서의 하루


사진 하나 없는 여행기를 즐겨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휴재 없이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며칠간 제대로 못 자다가 자고 일어났더니 주말이 사라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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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휴대폰이 먹통이 된 그 암담함,, 읽는 내내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여행하시는 동안 많이 불편하셨을것 같아요. PC방 찾기가 정말 힘들군요. 호텔 너마저...사진이 없어도 그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져요.

여행기도 글이군요 ㅋㅋㅋㅋ 신기합니다. ㅎㅎㅎ

그 상황에서 인지부조화를 살필수 있다니 놀라워요. 사진이 없어서 더 이입이 되네요:)

사진 하나 없는 여행 글이 폰 때문에 발생 한 일이었군요. 그래서 더 생생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sorry를 외쳐야 할 사람은 스티브 잡스라는 생각이...ㅎㅎㅎ
그 조그만 것으로 구르게도 하고 멈추게도 만들었네요.

어려운 상황이였군요...
베트남이 생각보다 영어 하는 사람이 적은 것 같아 걱정이네요.

필요한 곳에는, 딱 필요한 정도로만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별 문제 없었어요.

다음연재 기대하겠습니다. 보팅 맞팔 신청합니다 !!

폰이 없이 보낸 시간이라서 더욱 오래 김리님의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될 것 같네요. 비록 같은 이유로 사진이 없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쉽게 흐릿해질지도 몰라요. 여기서 더 지나면 여행자인지, 이주자인지 햇갈리는 생활로...

흠. 안 그래도" 유 룩 소..." 들으셨다고...

실존주의 여행을 보는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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