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 Cubano#7] 트리니나드에서 생긴 일

in #kr-series6 years ago (edited)

쿠바에 모든 도시를 여행하진 않았지만 단연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도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건 '트리니다드'다.

트리니다드는 관광지로 아주 유명하다. 특히, 앙꼰해변이 유명하고 아마 인클루시브 호텔도 있을 것이고 저렴한 가격의 제법 맛난 랍스터도 먹을 수 있고 'Casa de la Musica'도 중앙광장을 향해 개방된 계단형식이라 아주 유명하고.. 뭐 당나귀 투어도 할 수 있다고 하고...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트리니다드를 좋아한다.

일단 트리니다드는 너무 상업적이란 느낌이 강하다. 물가도 비싸고 사기꾼도 굉장히 많고 대범했다. 그리고 묘하게 사람들이 차가웠다. 서로 필요에 의해 대화를 하지만 선 긋기가 명확하단 느낌이랄까. 쿠바답지 않게 개인적이다. 그런 인상을 받고 나니 모든 것이 시큰둥했다.

트리나나드에 도착한 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숙소 소개를 통해 커미션을 챙기려는 무리가 들러붙었다. 알레는 외견상 관광객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우리를 자기네 숙소로 모셔가려고 했다. 그러나 알레가 조용히 끌고 가서 자신이 쿠바노라고 하자 거짓말처럼 그 무리는 모두 사라졌다. 우리는 직접 우릴 받아줄 만한 Casa를 찾아야 했다. 그래도 첫 트리니나드 숙소는 그나마 쉽게 구한 편이었다.

3~4번의 실패 끝에 어쩌다 거리에서 만난 숙소 주인은 쿨한 사람이었다. 알레는 자기가 그곳에 묵었다는 사실을 함구해주고 기록부에 적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우리의 숙소 구하기 미션은 끝이 났다. 숙소는 좋았다. 지나치게 넓었다. 특히 화장실이 매우 큰 게 인상적이었다.

서로 지쳐 예민해진 상태였다. 서로 건들면 또 싸울 게 분명했다. 우리는 늘 그랬듯이 저 멀찍이 떨어져 일행이 아닌 사람처럼 각자 알아서 거리 구경을 하다가 아예 따로 헤어져 저녁쯤에 만났다. 광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단다.

산티아고데쿠바에서 알레는 인기가 아주 좋았다. 물론 우리가 손을 잡고 다니거나 연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가족은 아닌 게 확실한데도 여자 여행객은 스스럼없이 알레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유령이었다. 그리고 알레는 나를 제쳐둔 채 그냥 대화하곤 했다. 내가 알레의 여자친구도 아니고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거나 그 자체로 화가 나진 않았다. 다만 양쪽 다 더럽게 예의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따로 나가 말을 하거나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면 괜찮은데 꼭 그 자리에서 굳이 둘만 있는양 대화를 하곤 했다. 그렇게 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저녁엔 남자가 알레를 만지면서 "Que Guapo~!" (와 잘생겼네!) 라며 감탄한듯 느끼한 대사를 날렸다. 알레도 나도 당황했다. 이후 나는 "너의 인기는 남녀를 가리지 않구나!"라고 심심할 때마다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Stella, 재밌는 사실을 알아냈어, 네가 없으니 여자들이 말을 안 걸어. 너랑 헤어진 동안 내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오니 다시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이 있단 말이지.
-내가 네 윙메이트인거냐?

난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했지만, 그는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혼자 다닐 때는 그냥 평범한 쿠바 남자인데 내가 그의 옆에 있으면 젊은 동양인 여자가 따라다니는 매력적인 쿠바노로 변신한다는 가치 없는 설명이다. 그래 난 너한테 돈과 인기를 주었구나. 그러나 그에게 명예까지 선사하진 않았다.


다음날 아름답기로 소문난 앙꼰해변에서 우린 개싸움을 했다. 싸운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의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끊어낸 이유는 기억난다. 그가 깔깔거리며 웃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든 우리가 한창 진지하게 싸울 때면 그는 갑자기 즐겁다는 듯 배꼽을 잡고 웃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화가 났고 그는 더 깔깔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 웃음을 멈추기 위해 그를 죽이고 싶었다.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그 일이 벌어졌고 나는 그를 밀쳐댔다. 그는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 웃음은 지속되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 욕을 했다. ("FUCK YOU!!!") 그러자 그 모욕에 그도 화가 났다. 그는 모욕을 견뎌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몸싸움이 무르익자 주변에 누워있던 관광객이 와서 우리를 심각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경찰을 부를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알레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마지막 남은 인류애를 발휘해서 나는 씩씩거리며 꺼지라고 했고 그는 드디어 내 뜻대로 꺼져줬다. 눈앞에 안보이니 살 것 같았다. 나는 관광객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앙꼰해변을 떠올리면 끓어오르지 못한 화와 몸싸움만 기억난다. 그때 난 혼자 핸드폰 메모장에 '아무리 아름다운 곳에 와도 누구와 함께 오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며 분노와 슬픔의 글쓰기를 한다.

글쓰기와 파도 소리 그리고 알레가 눈앞에서 안보였던 덕에 내 화는 사그러들었다.
우리는 다시 만났을 때 서로 미안하단 말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동행한다.

도시도 맘에 들지 않고 개싸움도 하고 그렇게 트리니나드는 복합적으로 최악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만약 저녁에 Flora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종교가 없다. 신도 믿지 않는다. 그런 내게 알레는 말했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너도 신을 믿게 될 거야.

그때는 그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한바탕 개싸움 후에 저녁이 찾아왔다. 모든 관광객의 집합소 Casa de la Musica 계단에 앉아 맥주 한 캔씩 마시며 음악과 공연을 보고 있었다.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난 후, 알레는 캔을 발로 밟으려고 시도했는데 보기 좋게 캔이 미끄러졌다. 간신히 납작하게 만들기에 성공했는데 그 모습이 강아지처럼 애처롭고 웃음이 났다. 그 모습이 Flora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나와 마주친 그녀가 우릴 보고 웃었다.

Flora는 우리 뒷자리 대각선에 앉아있었는데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미소가 아름다웠고 사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기품있고 부드러운 인상, 예뻐서 몇 번 쳐다보았다.

공연이 끝나고, 클럽인지 술집인지 정체불명의 바에 들어갔는데 Flora도 거기 있었다. Flora는 우리를 테이블로 초대해서 비싼 양주와 안주도 사줬다. 그리고 알레보다 내게 더 관심을 보였다. 난 좀 통쾌했다. 말레이시아 어머니와 영국 아버지를 둔 혼혈아이고 직업은 요트/크루즈의 전속 항해요리사, 지금 요트는 시엔푸에고스에 정박해 있다고 했다. 내일 돌아가야 하는데 우리를 초대했다. 너무 가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여러 사정상 갈 수 없다고 답했다. 목소리가 허스키한 게 매력적이었다. 내가 술을 못 마신다고 하니 토닉워터를 사서 건네준다. 내가 '너 정말 아름다워.'라고 하자 그녀는 내게 '네가 더 아름다워.'라고 한며 미소 짓는다. 같이 춤추다가 내 볼에 살짝 뽀뽀해준다. 나 아마 얼굴이 빨개졌을 거다.

그렇게 매력적인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거리를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릴 향해 온다. 헬멧을 쓴 Flora였다.! 엄청 반가웠다. 알고 보니 Flora는 우릴 찾아 거리를 배회했단다.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잖아. 이렇게 봐서 다행이다.
-잘 가, Flora. 보고 싶을 거야.

인사를 건네자 의외로 가방에 무언가 종이 뭉탱이를 꺼내더니 내게 내민다. 그건 돈이었다. CUP 돈뭉치였다.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아냐!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없어.
-어차피 이 돈을 환전할 시간도 없고 이제 돌아가면 곧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해. 그리고 이거 많은 돈도 아니야. 받아줘.

그리고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손을 흔들며 Flora와 그녀의 친구는 시엔푸에고스로 떠났고 난 한참 믿을 수 없어 그 돈뭉치를 바라보았다. 우린 사실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 이젠 우리는 걱정 없이 밥도 사 먹고 Flan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알레는 뿌듯한 얼굴로 말한다.

-거봐. 우리가 간절히 무언가가 필요할 때 그냥 무언가가 생기기도 한다니깐.

Flora에겐 우리가 만난 그날이 기억할만한 특별한 일이었는지는 모른다.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다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은 내게 정말 특별했다. 그 일은 내게 기적의 순간이었고 내가 가장 싫어하지만 영원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트리니나드를 만들어줬다.
여행기에서 트리니나드를 빼려고 했는데 역시 이렇게 또 쓸 수밖에 없다. Flora 고마워.


Mi Cubano 시리즈
[Mi Cubano#1] 첫 만남 -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
[Mi Cubano#2] 예고된 불협화음의 시작
[Mi Cubano#3]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Mi Cubano#4] 사랑하지 않아도 특별한 사람
[Mi Cubano#5] 그렇게 마음이 열리다.
[Mi Cubano#6] 때로는 곤란해도 괜찮다.

Sort:  

This post has been upvoted for free by @minibot with 5%!
Get better upvotes by bidding on me.
More profits? 100% Payout! Delegate some SteemPower to @minibot: 1 SP, 5 SP, 10 SP, custom amount
You like to bet and win 20x your bid? Have a look at @gtw and this description!

Congratulations @fgomul!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Award for the number of comments
Award for the number of posts published

Click on the badge to view your Board of Honor.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Do not miss the last post from @steemitboard:

Presentamos el Ranking de SteemitBoard

Support SteemitBoard's project! Vote for its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트리나드 여행기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드네요. ^^ 때론 Flora 같은 뜻밖의 인연이 생기기도 하는것 같아요.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문구가 저렇게 쓰이다니. ㅎㅎ 다음편엔 알레와 어디를 가게될까, 무엇을 하게 될까 궁금합니다.

억 laylador님이시당! 봇들 가득한 글에 빛같은 댓글 감사드립니다.ㅠㅠ!

남의 떡 이론은 검증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죠 ㅋㅋ
알레와의 이야기는 놀랍게도.....아직 꽤 남아 있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드릴 것 같아요.:D

왠지 저에게도 해당되는거 같아서 공감이 되어요. 왠지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때만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 연락이 오는..(?) 혼자일땐 조용하다가요. ㅎㅎ 알레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신 고물님의 공이 큰것 아닐까요.

역시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laylador님의 매력 때문일겁니다.

알레의 개똥이론, 명언 퍼레이드는 쭉쭉 이어집니다. 방금 댓글을 보고 하나 더 생각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역시 악감정을 많이 덜어내니(?) 다행히도 아직은 매력적인가보네요. ^_^;ㅋ

덜어내는 과정이 있으셨군요.. 아직은 매력적인 그분이 더 궁금해지네요.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

여행에세이를 한참 즐겨 읽던 시절이 있습니다. 음,,, 삶을 리셋하고 혼자 살 땐데요, 여행에세이가 너무 좋아 읽다가 무작정 해외로 뜨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말 외에는 어떤 언어도 할 수 없었고, 해외여행은 해본 적도 없어서 갈망만 하다 실행을 못했지요. ㅎㅎㅎ 한번은 출판사 사장님 소개로 여행작가님과 친분을 쌓기도 했습니다. 책도 여려권 냈고 글도 잘 쓰시는 분인데요, 그 분 글과 느낌이 비슷한 글이네요. 다른 게 있다면 그 분은 남자라는 것. 얼마전 카톡에 보니 '여행중'이라고 써있더군요. 또 어딜 여행중이려나.

삶을 리셋하고 혼자 살 때라.. 그 때 이야기도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ㅎㅎㅎ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여행을 가고 싶어지죠 ~ 어떤 분이실지는 모르지만 여행작가님과 비교를 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naha님께도 분명 여행 갈 기회가 또 주어질 것입니다. 혼자든, 누군가와 함께든 그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_+!

그리고 웬지 영어도 엄청 빨리 배우실 것 같아요~ ㅋㅋ그리고 naha님의 여행에세이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그걸 위해서라도 보내드리고 싶네요. (이상 naha 작가님 짱팬)

돈을 주고 싶어 오토바이로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무언가를 특히 돈을 주겠다고 마음먹게 했을까요? 플로라에겐 또 거기에 닿기 까지 그녀만의 기나긴 (인생)여정이 있었겠죠?

저도 그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그녀의 자세한 인생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삶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어요 ^_^허스키하게 잠긴 그 목소리가 그립네요.

여행하다보면 늘 한번씩은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나도 늘 더 베풀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지, 다짐하지만 쉽지 않죠... :)
저라면 플로라를 꼭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을 것 같은데, 연락처가 없다니 너무 아쉽네요..

어떨땐 너무나 외롭고 쓸쓸할때고 있고 어떤 때는 기대도 못했던 호의와 만남이 있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서 베풀어야지 하다가도 살다보면 여유도 따뜻함도 잃어버리고 ㅎㅎㅎ
저는 지나가는 인연은 보내줘야한다는 걸 배웠던것 같아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왠지 분위기 있네요, 그냥 보내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는 거.

전 어릴 땐 정이 많았어서 참 못 놓치겠던데, 요샌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그냥 뭐 흥 싶어서 ㅋㅋㅋㅋㅋ 전 그냥 메말라서 연락처를 덜 묻게 된 케이스랄까.... ㅠㅠ

그런데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인연을 연락 한 번 없이 지내다 그 친구가 제가 사는 도시에 놀러온다는 걸 페북서 보고 8년만에 다시 만나고, 올해 한국 놀러왔길래 또 만났고, 내년에 유럽가서 또 만날까 싶은데... 아 페이스북 주고 받아놓길 잘했다... 싶었어요. 8년간 소식도 모르고 지내던 사이인데도 옛날 서로 모습을 안다는 때문에 베스트프렌드 같은 느낌이 있더라고요 ㅋㅋ 겁 잔뜩 먹고 여행할 때 단 며칠이지만 의지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다시 봐도 감사하고.. :)

Coin Marketplace

STEEM 0.16
TRX 0.15
JST 0.029
BTC 57690.80
ETH 2449.97
USDT 1.00
SBD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