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벗어나는 실존의 용기 :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in kr-pen •  2 years ago  (edited)

DSC_1323 복사.jpg

죄는 이것이다. 즉, 신 앞에서 혹은 신에 대한 생각으로,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 혹은 절망에 빠져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강화된 연약함 혹은 강화된 반항이며, 죄는 절망의 강화다. -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p.158

1
카페에 왔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큼지막한 창을 통해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실내의 온기에 두꺼운 외투를 벗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엇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옆 자리에서 한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헤드셋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까요. 나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습니다. 얼마전 구매한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많은 책들 중에서 왜 이책을 구매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 성큼, 봄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를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의 말은 한동안 내 안에 쌓여있던 생각의 조각에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꽤나 긴 시간동안, '내가 되기 위해' 반항 중이었습니다.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변두리에서 또 다른 주류가 되기 위해, 나태가 주는 이 안락함을 즐기고 있던 것입니다. 나태와 안락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겁니다. 다만, 그것은 때로 무기력으로, 이내 절망으로 이어지는 상태들입니다.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 닻을 내리고 있는 집착심때문이지요.' 얼마 전 @peterchung 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피터님은 집착이라 이를 표현했지만, 비슷한 표현이 개신교에도 있습니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살아가는 일, 내려놓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념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2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매대에 놓인 많은 책들 중에서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집어들었습니다. 서점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의 말은 간단하게 '너무 신경쓰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조금 더 행복할 것이며,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자신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백수를 잠시 전전했지만 현재는 파워블로거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고.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인생을 즐겼지만 조금 공허했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책을 덮고나니 키르케고르의 또 다른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나오는 윤리적 실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윤리적 실존자는 자신의 기준에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의 첫 단계인 심미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래서 충동과 감각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실존이 지향하는 바를 따지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또한 다른 자기 개발서와 비슷하게 이러한 윤리적 실존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해, 이제 다른 방식으로 노력해보라는 겁니다.

3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서 살아갑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 아닌 신이라 말합니다. 신, 참 낡은 단어입니다. 너무 낡아서 구글 트렌드 들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꾸준히 관심을 갖게 하는 단어입니다. 나는 그 단어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지난 , 신앙의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신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변두리에서 또 다른 중심을 차지하고자 하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개념을 멋대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신을 믿는 일은 진정, 새로운 실존의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이해를 요구하는 단어가 아닌, 관계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수준에서는 실존하는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도덕률을 부과할 수 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성적이건, 객관적이거나, 개념적인 어떠한 지식도 적용될 수 없다. 신과 개인의 관계는 특수하고 주관적인 경험일 뿐이다. 현실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선험적으로 그 관계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관계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획득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사이비 과정일 뿐이다. 단지 신앙의 행위만이 실존하는 개인에게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보증해 줄 수 있다."

4
차트가 하락합니다. 돈을 잃고, 코인을 잃습니다. 그리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의 상태를 잃어버렸음을, 나의 시간을 잃어버렸음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어서 시간이 흐르길 바랍니다. 10년 쯤 지나면, 비트는 최소한 10만 불이 되어 있을테니까요. 그때쯤이면 비트를 팔아,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의 관념적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부정하고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실존의 철학을 구축한 철학자였습니다. 절망은 변증법적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은 실존의 단계에서 용기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키르케고르는 44세라는 꽤나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가 절망과 삶의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신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200년도 더 된 그의 이야기는 이제 너무 낡아버렸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면서도 인간은 영원한 것을 바라고,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신처럼'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화해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 아닌, 용기에 있을 것입니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님의 말씀중에서 몇가지 제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살아가는 일, 내려놓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념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진정으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한다기 보다는 이미 성찰이되어 실천하는 삶이라고 보여집니다. 제가 사실 불교수행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 혹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그러신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인이든 수행자이든 성찰과 수행이 되신 분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지요. 하지만 습관의 문제이지요. 운동선수들이 계속 자기암시와 연습을 하는 것처럼요.

신의 개념을 멋대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신을 믿는 일은 진정, 새로운 실존의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이해를 요구하는 단어가 아닌, 관계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한 형태라는 표현이 참 멋지십니다. 우리는 몸을 갖고 있기때문에 항상 '실체화' '실존'에 대하여 붙잡으려고 하지요. 실체가 있다면 인식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지요. 독립된 존재는 우리와 소통할 수 없지요. 그래서 신은 독존할 수 없는 관계이지요. 관계를 떠난 신은 우리 마음이 만든 허상이겠지요.

인간은 영원한 것을 바라고,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신처럼'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화해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 아닌, 용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 용기라는 것이 아마도 끊임었는 성찰과 실천 으로 고통이라는 현실에 맞서는 확신과 용기라고 생각됩니다. 오뚜기처럼요.

님도 수행자의 근기가 있어보입니다. 간화선을 思惟修라고 하지요. 생각을 닦는다는 것인데 생각의 끝까지 가보는 것이지요. 話頭(화두)라고 부르는 즉, 말머리가 바로 '언어가 끝난 자리'지요. 그게 무엇이던 간에 신이든 영이든 영성이든 마음이든지요.

님의 글을 곰곰히 읽으면서 제 생각도 정리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피터님 의견 감사합니다. 조금만 제 생각을 덧붙이겠습니다.

내려놓음이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한다 말한 건, 신자들이 종종 신에게 모든 일을 일임함으로써 신의 이름으로 자신과 이웃, 사회를 성찰하는 인문학적 성찰의 시도를 간과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내려놓음과 전적인 신뢰, 그렇게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에 의해 종교적 비극이 항상 있어왔으니 말입니다.

'진정으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이 문장이 정말로 성립한다면야 내려놓음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지만, 또한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한계가 존재하기에 어쩌면 내려놓는다는 이야기는 종교적 수행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면서도 완성에 이를 수 없는 것으로 계속해서 견지해나가야 할 하나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을 꼼꼼히 읽고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 내공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때로는 종교의 본질이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왜곡되는 것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완성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魔障에 빠진 것이지요. 조사어록에 그런말이 있잖아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여라!

대중가요가 생각나지요.

인생은 미완성

ps.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요. 퇴계 이황샘께서는 誠과 敬을 항상 화두로 사셨다고 합니다. 주역의15번째 괘인 謙(겸손)은 수행자 뿐만 신앙인이 항상 지니고 있어야할 OS인것 같습니다. 謙괘에는 모두 吉이라고 되어 있지요. 또 댓글이 주저리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 길어지다뇨 피터님 ㅎㅎ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접하지 못하는 분야에서의, 또 다른 관점에서의 말씀들이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가울프님 :) 활기찬 한 주 되시기를 !

'죽음에 이르는 병' 오래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그 때는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를 모르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책이었습니다.
오랫만에 제목을 읽는 것으로도 반갑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jjy님 혹시 철학도이셨을까요? 제가 아는 교수님이 키르케고르를 너무 좋아해서.. 저는 어쩌다보니 읽어본 책인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좋은 포스팅 잘보고 갑니다 ^^

뉴턴이 죽기 전 까지도 신과 같은 능력인 연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삶이란 모순의 향연이군요 (...) 잘 읽고 갑니다 :D

신 앞에 선 단독자, 그는 젊은 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케에르케고어는 여전히 젊네요.

젊은이라는 비유가 인상 깊습니다. 젊음이란 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 아직 불확정한 상태. 그래서 내면의 갈등에 솔직한. 우주의 충동이 살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