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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절망에서 벗어나는 실존의 용기 :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in #kr-pen6 years ago (edited)

님의 말씀중에서 몇가지 제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살아가는 일, 내려놓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념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진정으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한다기 보다는 이미 성찰이되어 실천하는 삶이라고 보여집니다. 제가 사실 불교수행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 혹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그러신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인이든 수행자이든 성찰과 수행이 되신 분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지요. 하지만 습관의 문제이지요. 운동선수들이 계속 자기암시와 연습을 하는 것처럼요.

신의 개념을 멋대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신을 믿는 일은 진정, 새로운 실존의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이해를 요구하는 단어가 아닌, 관계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한 형태라는 표현이 참 멋지십니다. 우리는 몸을 갖고 있기때문에 항상 '실체화' '실존'에 대하여 붙잡으려고 하지요. 실체가 있다면 인식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지요. 독립된 존재는 우리와 소통할 수 없지요. 그래서 신은 독존할 수 없는 관계이지요. 관계를 떠난 신은 우리 마음이 만든 허상이겠지요.

인간은 영원한 것을 바라고,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신처럼'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화해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 아닌, 용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 용기라는 것이 아마도 끊임었는 성찰과 실천 으로 고통이라는 현실에 맞서는 확신과 용기라고 생각됩니다. 오뚜기처럼요.

님도 수행자의 근기가 있어보입니다. 간화선을 思惟修라고 하지요. 생각을 닦는다는 것인데 생각의 끝까지 가보는 것이지요. 話頭(화두)라고 부르는 즉, 말머리가 바로 '언어가 끝난 자리'지요. 그게 무엇이던 간에 신이든 영이든 영성이든 마음이든지요.

님의 글을 곰곰히 읽으면서 제 생각도 정리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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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님 의견 감사합니다. 조금만 제 생각을 덧붙이겠습니다.

내려놓음이 성찰의 필요성을 간과한다 말한 건, 신자들이 종종 신에게 모든 일을 일임함으로써 신의 이름으로 자신과 이웃, 사회를 성찰하는 인문학적 성찰의 시도를 간과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내려놓음과 전적인 신뢰, 그렇게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에 의해 종교적 비극이 항상 있어왔으니 말입니다.

'진정으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이 문장이 정말로 성립한다면야 내려놓음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지만, 또한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한계가 존재하기에 어쩌면 내려놓는다는 이야기는 종교적 수행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면서도 완성에 이를 수 없는 것으로 계속해서 견지해나가야 할 하나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을 꼼꼼히 읽고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 내공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때로는 종교의 본질이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왜곡되는 것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완성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魔障에 빠진 것이지요. 조사어록에 그런말이 있잖아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여라!

대중가요가 생각나지요.

인생은 미완성

ps.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요. 퇴계 이황샘께서는 誠과 敬을 항상 화두로 사셨다고 합니다. 주역의15번째 괘인 謙(겸손)은 수행자 뿐만 신앙인이 항상 지니고 있어야할 OS인것 같습니다. 謙괘에는 모두 吉이라고 되어 있지요. 또 댓글이 주저리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 길어지다뇨 피터님 ㅎㅎ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접하지 못하는 분야에서의, 또 다른 관점에서의 말씀들이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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