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배의 역사

in #kr-pen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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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시에 소년이 멋진 사람이 아니었던 이유는 여럿 있지만 명쾌히 표현하긴 어렵다. 단지 역할기대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만 할 수 있다. 소년이 스스로에게 갖는 기대감, 타인이 소년에게 갖는 기대감, 그 두가지가 엮여 소년을 괴롭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모호하게 와닿는건 있다. 그리고 소년은 그럴 때마다 지탱할 사람을 찾는다.

소년을 지탱하는 사람이라 해서 특별하진 않다. 소년도 특별한 기대를 품지도 않고, 특별한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것, 그 자체에 기댄다. 소년이 거쳐온, 기대온 사람들도 모두 평범한 인간일 뿐이며 제각각 고뇌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년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저 소년에게 한풀이를 할만큼 비참하진 않은 사람들이었을 뿐. 소년 또한 그들에게 한풀이를 할만큼 비참하진 않았다.

소년이 한 일은 숭배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상을 씌운다. 소년은 그 평범한 사람들을 멋진 사람들로 만들고 추종한다. 이를 위해서 소년은 적당히 그들의 삶에 들어가지 않아야 했다. 그들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라야 했다. 하지만 신의, 사후세계의, 영혼의 존재에 증거는 필요 없다는 이들이 증거에 가장 집착하듯 소년 또한 그들의 멋의 증거를 찾곤 했다. 그래서 숭배는 영원할 수 없다. 소년의 우상이 스스로가 인간이라는걸 폭로하거나, 소년이 자신의 우상이 인간이라는걸 알아낸다면 숭배는 끝이 난다.

소년의 숭배는 그래서 몇번이나 끝이 났다. 그렇지만 소년의 섬김은 무가치 하지 않았다. 평범한 우상을 섬기던 소년은 성장했다. 아직도 소년은 말로 뚜렷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씌운 이상적인 인간의 틀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소년의 삶과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 소년은 잘 모르고 있지만 소년이 멋에 다가가며 소년을 숭배하는 이들이 생겼다.

이제 소년은 끝 없이 우상을 섬긴 비참한 인간과 섬김의 대상이 되는 멋진 인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소년은 자신이 섬김의 대상이 되었다는걸 몰랐지만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다. 과거 소년의 우상들 또한 자각 없이 우상이 되었고, 자각 없이 우상의 자격을 박탈 당했다. 그래도 우상들에게도,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무언가는 있었을 것이다. 소년 또한 그 길을 걷고 있다.

다시 최초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소년이 우상으로 남아주길 원하는 소년의 신도들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소년의 내면, 그 두가지가 또 소년을 괴롭힌다. 소년은 아직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 하지만 자연스레 옛 우상들을 닮아갔다. 소년이 만들어 낸 우상의 아이덴티티가 아닌 우상의 실체를.

소년은 어느새 아무도 섬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이 그 사실을 떠올렸을 때, 자신의 첫번째 신도와 헤어졌다. 헤어짐은 어느 한쪽의 선택이 아니었다. 신도에게는 더 이상 우상이 필요 없었으며, 우상에게는 더 이상 신도가 필요 없었다. 마침내 소년은 홀로서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여유가 생긴 소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소년의 부모, 소년이 보기에는 불완전한 인간. 그들에게도 신도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소년은 부모에게 존경을 표했다. 소년의 부모는 걱정을 포함한 몇가지 감정이 섞인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소년은 그토록 바라던 멋진 사람과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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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숭배하기도 하지요. 인간적이고불완전한 모습까지 좋아하는 걸 수도 있고, 그 불완전성에 대처하는 모습에 감탄해서일 수도 있고. 아, 이건 숭배가 아니라 사랑인가요?

댓글창에 브리님을 발견하면 꼭 찾아 읽는 저는..스토커일까요. '불완전성에 대처하는 모습에 감탄' 이라는 말에 한참이나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스토커님! :)
사실 저도 댓글 찾아 읽는 분들이 몇 분 계세요.. 누군지는.. 아시겠죠? 저도 스토커일까요? ^^;

아... 숭배와 존경으로 잘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전달력이 부족했나봅니다 ㅜㅜ

아닙니다. 제가 숭배를 너무 약한 의미로 해석했나봅니다. 킴리님 댓글을 마저 읽어보니 숭배와 존경에 대한 의미가 더 명확해지네요.
제가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ㅠ.ㅜ

고등학교 때부터 매년 저에게 같은 생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항상 멋진 사람이 되고싶지만 부족한 점이 많아 매번 우상이 필요했습니다. 고등학교때는 친구중에 배울점이 많은 친구를 우상으로 두었고, 군대에서는 동기,선임중에. 사회에 나와서는 알바사장님. 학원을 다닐때는 학원선생님과 어떤 아저씨. 그리고 대학에 돌아와서는 선배. 매순간마다 우상이 존재했고 그들은 저를 발전시켜주었습니다. 물론 모든 우상들을 흡수하려 했기에 일부 우상보다는 뛰어난 점이 생겼고 저를 보고 부러워하는 점도 생겼답니다. 절대 내가 뛰어나서 뛰어넘은게 아닌것 같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줬기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습니다. 절대 감사해야하고, 평생 감사해야합니다. 더이상 우상이 필요하지 않아도 같이 가야합니다. 그들이 나를 만들어줬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소년은 멋진 사람이 아닌것 같습니다.ㅎㅎ 왕노릇을 하고싶어하는 어린 소년일뿐. 진정한 멋진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녕하세요 kmlee 님, 어렵네요 ㅎㅎ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 보통 신을 찾게 되고 그러한 분들이 신에 빠지게 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신이 리얼이든 거짓이든 한번 믿으면 꽤 오랜 시간을 소비하고서야 진실을 알게 되겠지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 해낼 수 있다 생각이 드네요. 소년이 부모에게 존경을 표했다면 이미 멋진 사람이 된 듯 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간절한 마음에 조급해지는 것만 경계하면 되겠죠. 감사합니다.

네 조급함은 늘 실수를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처럼 내가 불완전하고 불안할 때 종교를 갖고 완벽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허상을 우상으로 삼다보면 자칫 더 큰 절망이 오기도 하겠지요. 앗! 이것도 글에서 표현해야했는데...

제가 처음으로 숭배한 인간은 마이클 조던이었습니다. 몇몇 우상을 거쳐 이제 저도 아무도 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상과 가까워질 수 없어서 포기하게 된 걸까요.

너무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는 증거를 찾기 어려워서였을까요?

You're so nice for commenting on this post. For that, I gave you a vote! I just ask for a Follow in return!

이 이야기는 실은, 소년에 자신을 투사한 kmlee님의 이야기라 봐도 무방하겠지요? 얼핏 보면 소년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 같지만 kmlee님 개인의 고민을 담은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순환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서툴렀군요.

오독한건가요ㅎ;; 독해력을 더 키워야겠습니다!

제 표현이 미숙한 탓인걸요.

이미 캐내먹고 그늘을 만들고 계신 듯한...
오늘도 잘 쉬었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많이 받는 질문이죠.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냐는 질문.

어른이 되면 존경하는 '위인'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대신 주변에 존경할 만한 '사람'은 생기더군요. ^^

저는 뭐라고 답을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엄청 엉뚱한 답을 하긴 했을텐데...

앗! 갑자기 궁금합니다.ㅎㅎ 뭐라고 하셨을지.

항상...불안함이 있을때 종교를 믿지 않는 제가 모든 신을...불러일으키는 모습 이게 불안감...이런곳에서 오는 건가보네요!
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ㅎ

멋이 뭘까요?
꽤 오래전부터 가진 의문인데 여전히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 멋이라는게 내 안의 진짜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 타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가짜 욕망인건지 구분이 안돼요. 멋을 생각하면 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이 떠오르는지...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ㅠ.ㅠ

답은 제각각 다르겠지요. 저는 평정심과 중용을 멋으로 여깁니다.

멋인지는 모르고 살고 있으나 평정심과 중용은 일상에서 근간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네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평정과 중용이라... 자칫 '잘난 체' 한다는 소리 듣기 좋은 아이템이죠. 엄청 많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선비라느니, 성인 군자냐는 둥, 아직 그런 것에 반응하는 것을 보아서는 저는 그것들과 멀고 멀었나 봅니다.

그런 사람들도 어딘가에선 사랑을 말하겠지요. 유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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