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그 시절 놓친 영화. 박하사탕. 1999년 作. 김영호의 시간도 거꾸로 흐른다.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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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왜 시간의 나열을 거꾸로 돌리고 있을까. 영화 중간에 삽입된 장면에서 기차마저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기찻길 옆 차로 자동차들의 방향성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우리는 기차의 시선대로 똑바로 간다고 착각하며 시간 여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꺼내든 필름을 되돌리려면 끝에서 처음으로 다시 되돌려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되감기 버튼에 끝에서 처음으로 단번에 돌아가는 DVD와 달리 필름은 그 사이의 시간을 곱씹으며 예전에 봤던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반추하게 한다.

영호는 죽으려 하고 있고 순임은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다. 영호는 타락한 가해자이며, 순수함을 빼앗긴 피해자이다. 영화가 시간의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우리는 영호의 타락만을 기억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영호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딱함을 말해주려 하는 것 같다.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멈출 줄 모르며 달려오는 기차와 대적하려는 영호. 그를 걱정하며 바라봐 주는 사람은 시끌벅적한 야유회의 사람들 속에서 단 한 사람 뿐이 없다. 예전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던 영호는 기차와 맞닥뜨린 순간 이제부터 타임머신이 될 테니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소리치는 것 같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딱 한 놈 죽이고 가겠다는 영호는 그 딱 한 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영화 '26년'은 그 딱 한 놈을 짚어냈는데 왜 영호는 그 한 놈을 제대로 짚어내지를 못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망친 별의별 놈들을 다 떠올려도 그 놈 석자 이름이 없다. 모든 것의 원인은 한 곳에 있는데 치명적인 그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를 걷어내었다.

자신이 기거하던 누추한 비닐하우스에서 순임의 남편을 마주한 영호의 손에는 두 손이 모자라는 열쇠 꾸러미들이 한가득이다. 시간을 돌려 바라본 말끔했던 영호의 손에서는 한 손안에 열쇠가 가득하지만 충분했다. 열리지 않을, 열리지 않던 시간의 문 앞에서 영호는 얼마나 좌절을 겪었을까. 자신의 손에 열쇠가 있어도 열지 못하는 문, 문을 열어줄 열쇠를 찾아 줄 이 어디에 있을까.

시간의 역순으로 바라보는 영호 물 항아리의 수면에 비치는 어둠의 빛은 점점 맑아져야 하는데 타락의 탁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걷어내지 못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수면에 떨어진 잉크 방울이 수면부터 어둠의 빛을 드리우고, 맑았던 그 항아리 바닥까지 번지는 장면의 반대를 떠올려보자. 영호의 마음속 수면부터 떨어져, 타락한 어둠의 바닥으로 몰고 간 그 잉크를 걷어 내려면 그 번짐의 속도를 역행해 따라가야 한다. 어둠은 서서히 영호의 마음속을 까맣게 드리우고 있었다, 영호도 모르게.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표정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사람의 감정은 얼굴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군인에서 경찰로 돌아온, 자신에게는 숨기려하는 영호의 어색한 손짓을 순임은 잡아낸다. 순임이 영호의 조금이나마 어두운 잉크의 번짐을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기도는 몽매한 어리숙한자들을 속이고, 군가는 다 큰 닭도 병아리로 만들만큼 충성을 외치게 만든다. 몽매하지 않다면 기도는 그 사명을 다하고, 강요하지 않는다면 충성은 알아서 외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오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서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잘못한 일을 우리가 용서하여 주듯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남아의 끓는 피 조국에 바쳐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했노라
눈보라 몰아치는 참호속에서 한목숨 바칠것을 다짐했노라
전우여 이제는 승리만이 우리의 사명이요 갈 길이다.<용사의 다짐>

군 생활 가장 힘들고 끔찍했던 그 순간, '파스트 페이스(Fast pace)'가 현실이 아닌 훈련이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 영화 속에서 겹쳐 흐르며 나오는 주문 같던 기도와 군가가 왜 이리도 비슷하게 들리며 밀어내고 싶을까.

할 수밖에 없던 입대에, 할 수밖에 없던 출동. 영호가 쏜 총에 맞은 이름 모를 소녀와 영호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일까. 시간을 돌려 바라 본 영호는 타락한 가해자가 아닌 순수함을 빼았겨버린 피해자였다. 영호를 타락하게 만든 가해자는 이 영화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아니면 지금까지 김영호의 타임머신을 같이 타며, 되감기의 버튼을 누르며 찾으려던 그 시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김영호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지 고뇌해야 한다.


몇 일 전 천년 고도 경주에서,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터파기를 하던 공사현장에서 신라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는 그 현장이 다른 곳과는 남다른 곳이라면 굴삭기의 바가지가 아닌 삽으로 조심스레 파야 할 것이다.

그것을 지키는 이가 있을까? 내 땅이 경주인데, 내가 산 땅이 하필 경주여서 내돈을 들여가며 굴삭기 바가지로 파야 할 땅을 유물이 발견 될지도 모르니 조심스레 삽으로 파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삽이던 굴삭기의 바가지던 유물이 나온다면 신고할 이가 얼마나 될까. 신고 이후엔 나라가 개입하며 공사가 중지되고 땅주인은 나라를 생각하려다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개인의 삶이 우선일까 개인이 속한 국가가 우선일까. '용사의 다짐'을 부르길 강요하며 억지스런 충성을 이끌어내는 시대는 끝이났다. 땅을 파다 유물을 발견한 땅주인 또는 공사관계자가 자발적인 신고를 할 수 있도록 국가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영호가 들고는 있었지만 찾지 못했던, 시간의 문을 열어줄 열쇠꾸러미를 정리하는 것도 국가가 해야할 일이어야 한다. 그 시대의 비밀의 어둠을 바닥으로 묻으려던 ,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신고를 할 수 있도록 국가는 나서야 한다.

국가만이 할 일이 있을까. 우리 주위에는 1980년 5월 18일 끔찍했던 역사의 현장을 폄하하고, 짓밟는 악의 무리들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간 일이라고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입에 문 박하사탕을 그대로 녹여 먹어 향긋한 박하의 맛과 향만 남길 것인가. 박하사탕의 양 끝은 뽀족하다. 그 아픔을 같이 느껴 찔리지 않고 먹는 방법을 알고난 후에야 우리는 이 다음에 아픔 없이 향긋한 박하사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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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모트 같은 그자의 이름을 끝내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뇌리에 더 강렬히 각인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 '26년'은 아쉬운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 박하사탕은 5.18을 다룬 그 어떤 영화보다 뇌리에 남을 것 같아요.

역으로 돌아가는 필름이 참 인상깊었던 영화죠. 이 영화보고 기차여행도 많이 갔지요 ㅋㅋㅋ 기차 꽁무니에 매달러 기찻길보기 ㅋㅋㅋ

기차 맨 앞에서 찍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꽁무니였어요. ㅎㅎㅎ이제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춘천가는기차타고 닭갈비 먹으러 가고싶네요. 예전 그 기차들 이제 다 사라졌겠죠?ㅎ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글이 남음으로써 잊혀지지 않는 거겠죠.
잊지 말아야할 일들이 너무 많은 나라에 스팀잇이 참 요긴하게 쓰이는 거 같기도 하고.ㅎㅎ
박하사탕은 넘 오래되서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나네요..영화가..보면서도 넘 무거워서 잊자잊자 하면서 봤던 거 같아요. 사실은 잊으면 안되겠지만.

정말 잊어서는 안될일 인 것 같아요. 지금 집에서 온전하게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감방에 있어야 할 사람이 버젓이 이 사회에 있다는게 안타깝습니다.

나 정작 이 영화 본적 없음....그냥 저 장면만 암;;;
(헛 가즈아의 연속;;; 양해를;;;)

저도 이번에 5.18을 맞이해서 처음으로 봤습니다. ㅎㅎㅎ
저 장면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박하사탕 예전에 보면서 설경구 쟤 누구야 했었는데요.. 넘 잘해서..
영화적 연출을 떠나 이제는 현대사의 질곡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죠..

설경구가 박하사탕을 통해 데뷔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배우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영화로 암만 주목받고 해도 단기적인 주목만 받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박하사탕의 ost도 좋았지요

윤도현밴드의 곡 말씀하시는거죠? CD사서 그때 참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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