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성 편력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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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우리는 동거 중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애써 모른 척 하던 중 일이 터졌다. 그가 우리의 집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데려온 것이다. 나는 그것은 룰을 위반하는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여자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쿨한 척 간단한 옷가지를 챙기면서 생각했다. '제발 말려줘. 제발 못 나가게 붙잡아줘.'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기만 했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나는 익숙한 우리 집 다락방에 칼을 들고 숨어있었다. 그를 죽이기로 했다. 우리 집은 3층인데 그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죽이며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2층에서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그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사람이 그를 먼저 죽인 것이다. 얼른 도망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몸이 굳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연인을 죽인 저 사람이라도 죽여야 하나'. 짧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그가 올라왔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이국에서 이런 꿈을 꾸다니. 문득 이 상황이 하루키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묘한 새벽이었다. 식은땀을 닦고, 대충 씻고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아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적 없이 길을 걸으며 내가 지나온 남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릴 적 나의 모든 불행과 슬픔은 외부에 있었고, 유일한 행복은 사랑에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누군가를 좋아했다. 그 사랑의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사랑할 사람이 필요했다. 사소한 친절이 계기가 된 적도 있었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도 있다.

나는 '거세'된 남자를 좋아했다. 키가 작거나 비쩍 마른, 체구가 왜소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쩌다 보니, 그들은 대개 예술가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 돈을 벌지 못하는(돈을 벌 의지가 없는) 남자에게 병적으로 끌렸다. 오래전부터 나는 예술을 팔아 장사를 하는 장사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예술을 팔아 돈을 벌어오면, 그 돈으로 우리의 방에서 진짜 예술을 하는 남자. 이것이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자 이상향이었다.

나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기에 위험한 사랑을 참 많이도 했다. 사랑만 있으면 인생은 저절로 행복해질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기도 했다. 내가 그때 어떤 사랑에 성공했다면 낡아 버린 손으로 어렸던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사랑은 실패했고, 그래서 나는 아직도 대책없는 낙관을 한다. 사랑만 있으면 인생은 언제든, 어디서든 행복할 것이라고.


발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왜 신혼여행지로 유명한지 와보고야 알게 되었다. 이곳은 누구와 있든 함께만 한다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내가 사랑했던 많은 남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그들의 인생을 더듬어본다. 그들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까. 다행히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고도 떠나올 수 있었다. 한없이 진지했던 그 사람들. 밥은 벌어 먹고사는지 궁금하다. 어떻게든 빌린 돈 때문에는 죽질 않길. 예술을 하든 말든, 그들 삶이 좀 더 편해지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지나온 사랑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 제 1회 PEN 클럽 공모전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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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에 브라보! 사랑이 짱입니다! :-)

브라보! 저도 마지막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ㅎㅎ

꿈의 내용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소설로 확장시켜도 될만큼... 멋진 글 잘보고 갑니다.
자주 놀러올께요 ㅎ

저도 간만에 다이나믹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어요. 소설로 확장시킨다면 마지막에서 맥이 턱하고 풀리는 건 아니겠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숩니다. 순위권 예상^^ 돈 못버는 예술가에게 끌리신다니 일단 조건에 충족하는 예술가 표본은 지구에 차고 넘치겠네요 ㅎㅎ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렇겠네요ㅎㅎ 그 대신 다른 것들을 엄청 깐깐하게 본답니다ㅋㅋ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시쓰는 백수와 결혼한 제 아내는 친구들이 남편의 직업을 물을 때마다 시인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러면 친구들이 진심어린 걱정과 위로의 시선을 보여주었다는데, 그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고 말하곤 했어요. 이 글을 그냥 지날 수 없는 이유랍니다. ^^ 좋은 시간 보내고 오셔요^^

퍽 재밌으셨다고 하니 아내분도 대단하시네요. 저는 그럴 때마다 말을 얼버무리곤 했어요. 이런 취향도 일종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 아내분도 왠지 저와 비슷할 것 같은 생각이 얼풋 듭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성편력 있으시군요. 마음에 듭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

하늘님? 언니야 맞나요?
오빠야 아닌가 ㅎㅎ

오빠야가 맞습니다. 물론 아주 가끔 애교스럽게 언니야가 되기도 합니다만... 상대방도 제가 오빠야인거 알고 있는 상황에서만 그렇습니다.

하늘 오빠야의 언니야 애교 보고 싶네요.ㅋㅋ

@asinayo 님이 SRT(Steemit Reply Talk)를 개발할 수 있도록 의뢰했던 제 댓글입니다.

원하신다면 종종... 애교 부리도록 하겠습니다. ^^

어머 하늘님... 지금까지 여자분인줄 알고 있었어요! (몹시 혼란) ㅠㅠ 제가 또 한 번 결례를... ㅠㅠ

편하게 생각하세요. 성별이 뭐가 중요한가요? 모두 공개가 되는 장소에서 이모(언니,여동생)라고 이런 이야기 하고, 삼촌(오빠, 남동생)이라고 못할 말 있나요? 똑같지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키 작고,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아저씨입니다. ^^

ㅠㅠ 물론 그렇습니다만... 실제로도 이런 좋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플시님을 대했기 때문에 약간의 충격이... 이왕 이렇게 된거 앞으로도 편하고 좋은 언니라 생각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실제로도 이런 좋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플시님을 대했기 때문에

제가 @ab7b13 님의 언니가 되겠습니다. 앞으로 스티밋 내에서 언니가 될테니 호칭도 편하실대로 언니라고 하셔도 되고, 마음껏 언니를 즐기십시오. 그러고보니 저는 @ab7b13님이 작성하신 대댓글을 기억하고 있어서 더욱 울컥합니다.

오래 알고지낸 언니같은, 자상한 멘트에 갑자기 왈칵하게 되네요. 제 주변엔 베풀며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론 그 나눔을 저도 받았고요. 그 마음을 어떻게 값지게 나눌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늘 하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면 얼마든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참 어렵네요. 정말 마음 깊이 위로가되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중요한 건 세상을 향한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겠죠. 감사합니다.

전 기억하고 있답니다. ^^

언니들의 대화를 보는 것 같은... 더욱 정진해보겠습니다 ㅎㅎ

ㅎㅎ
언냐들 ㅋ

어.... 초반 도입부가 충격적이어서 버버버.. 했는데 꿈이었군요... 휴...

본의 아니게 낚시 글이 되었군요.. 꿈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ㅎㅎ

아.. 사랑은 참 어려운듯 하네요..
인연은 어디 있는 건지.. 참~~
하루키스럽다라는 말~~ 어울리는 듯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랑이지요. @mssy1004님도 얼른 인연을 찾을 수 있길 바랄게요:)

캬 숨죽이고 읽어내렸는데요 ㅋ
생각이 유연 자유스럽고 예술가보다 더 예술가적 성향을 지니신분 같어요
담편이 기대되어요 ^^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다음편은 없지만... 어떻게 한 번 써보도록 노력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도입부만 읽고 무서워서 뒤로가기를 누르려 했으나 ㅎㅎㅎ 아름다운 반전이!

반전은 있지만, 실은 악몽같은 꿈이었지요. 식은땀도 삐질 나고, 마음도 심란할 정도로 ㅎㅎ 어찌됐든 결말이 좋아서 기분 좋은 꿈이 되었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다행히 사랑은 실패했고, 그래서 나는 아직도 대책없는 낙관을 한다. 사랑만 있으면 인생은 언제든, 어디서든 행복할 것이라고.

저는 응원합니다. 현실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저는 때로는 이상주의자이기에 응원할 수 밖에 없네요. ^^

저도 요즘은 현실주의자가 되어가는 듯해요. 과거의 대책없는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 절레절레. 그럼에도 이상을 쫓는 것이 맞겠죠? ㅎㅎ

그럼요. 현실에 적응하며 잘 살아가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을 쫓고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적어도 연애만큼은 항상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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