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와 창조성] 들어가며 (부제: 운명학에 대한 견해/운명은 宿命일뿐인가? 改運인가?)

in #kr-newbie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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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카르마

기억은 말이 되어
귀 안쪽으로 달려왔다.
말의 얼굴은 무서운데
무서운 얼굴이 훌쩍훌쩍 울어서
더 무서워졌다.
너의 기억은 뼈가 없어
살을 발라낼 수 없어.
말을 죽이고 싶은데
말은 죽고 싶은데
이미 죽은 말이고
나의 기억은 말이 되어 달려갈
너의 귀가 없다.
@levoyant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따른 결과를 보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흔히들 업(業/Karma)때문이야라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하면된다고 무지하게 떠밀기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팔자(八字)려니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운명학이라는 전문분야가 생겨나서 사람들을 겁주기도 하고 희망을 주기도하면서 하나의 인문학분야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한자적 의미인 운명(運命)을 쪼개서 이해해보자. 명(命)은 合과 符節, 즉, 하늘에서 내린 명령이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운(運)흐름(flow),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린 명령이 흘러간다라고 표현되어질 수 있는데, 그냥 그 명령이 흘러간다는 소리야? 아니면 그 명령이 변화된다는 소리야?라는 두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늘의 명령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숙명(宿命)/결정론적 세계관)과 변화된다는 관점(혁명(革命)/바꿈의 의지)과의 싸움이다. 운명학에도 이러한 접근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그래서 개운(改運/開運)한다고들 표현한다. 운명을 새로 열것(開)인가? 아니면 고칠것(改)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의도를 말한다. (참고도서: 요범사훈) 곰곰히 생각해보면 운명은 그냥 삶의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영적 전승의 개운에 대한 공통 견해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습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은 하루 아침과 하루 저녁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유래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역(周易)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십시오.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십니다. - 법구경 183게송


제가 여러분들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저를 사랑하십시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마태오/요한복음


문제제기와 답변


문제제기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구태여 선을 행할 필요가 왜 있습니까? 그리고 선을 행해도 결과가 안좋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착하게 살면 모합니까? 열심히 살아봐야 안되는 사람은 안되고 나쁜짓 많이해도 잘사는 사람은 잘살더라구요. 그리고 부모잘 만나서 방탕해도 죽을때까지 잘사는 사람들 많잖아요. 있잖아요. 인생은 불공평해요!



답한다. 먼저 믿어야할 두가지 전제가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우리는 윤회(輪廻/samsara)합니다. 죽어도 또다시 살아납니다.
生生之謂易(생생지위역) 낳고 낳는 것을 일러 역(변화)이라고 말합니다.

첫번째 원칙, 우리가 살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두번째 원칙인 윤회한다는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첫번째 원칙을 확실히 믿는다면 윤회는 간단히 증명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죽는다는 것이 참이라면 죽음도 또한 항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변하면 태어남이 되지 또다시 죽음으로 변화되지 않기때문이다. 죽음의 죽음은 곧 태어남이다. 따라서 윤회는 증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윤회를 믿지 않으려면 제 1법칙인 무상, 즉 변화를 부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아직까지 변화지 않는것은 없다는 증거를 못찾았다.

그렇다면 왜? 인과응보가 진리인지를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선을 쌓아야 앞으로 선한 과보를 받기때문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위 주역 구절에 여경(餘慶/남은 경사)과 여앙(餘殃/남은 재앙)이란 표현이 있음을, 왜 하필 남을 여(餘)자를 썼을까? 그리고 필(必), 반드시란 표현도 있음을 기억하자. 이에대한 설명은 불교의 철학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윤회에 근거한 인과응보 대원칙을 크게 네가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것도 전제가 있다. 현재의 삶에서의 인과응보이다. 즉, 나에게 나타나는 과보는 모두 전생(前生: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 및 그 이전 태어나기 전의 나고 죽고해왔던 모든 생애들의 총집합)의 業(카르마)의 쌓임으로인한 부채탕감이기때문이다.

1)선인선과(善因善果): 선한행동은 선한 결과를 불러온다(흑자/부의 선순환)
2)선인악과(善因惡果): 선한행동을 했더라도 악한 결과를 불러온다(흑자감소)
3)악인선과(惡因善果): 악한 행동을 했는데도 선한 결과를 불러온다(적자감소)
4)악인악과(惡因惡果): 악한 행동은 악한 결과를 불러온다(적자증가/빈곤의 악순환)

따라서, 선한 행동을 했더라도 과거생의 악습에 의한 영향력이 지금생에 미치기 때문에 악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고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더라고 하더라도 전생의 선습에 의해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수행자들은이생에서 째지게 가난하고 힘들게 고행을 해서 악습의 과보를 이생에서 빛갚음하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즉 두번째 법칙, 선인악과를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설명이 필요하다. 흑자감소란 전생의 악습에의 한 빛을 적극적으로 탕감시키고 선한 행동으로인한 미래생의 선과(흑자)의 예비비용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예비비용마저 선한행위에 쓰는 것이다. 대단하다. 나는 예비비용만이라도 마련하고 싶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고통의 신비라는 것도 이렇게 해석되어질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적 전승지혜의 외침인 사랑에 기반한 선한 행동과 보상을 바라지 않는 희생이 바로 이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예전에 두타수행자(고행을 수행하는 사람)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애써서 가장 낮은 곳의 비참한 생활을 기꺼이 하는 것인가?라고 의문시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성찰속에서의 삶을 실천했던 것이다. 더 무시무시한 표현도 있다. 지장보살지장경에서 지옥중생이 열반에 들어갈때까지 나는 절대로 해탈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아이고 무셔버라. 나는 그렇게 절대로 못한다. 그렇다고 모두다 그럴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연따라 행동하면 될 것이다. 영적성장이 되면 그렇게 되겠지하고 마음먹으면 면죄부를 받을수 있다. Slow and Steady win the race이니까. 이게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점수(漸修)이다. 나는 돈오(頓悟/담박에 깨달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에게 이번생에대한 運命이 있을테니까..... 그것은 영적 성장을 위한 놀이일 뿐이야. 거리낌 없는 무애(無碍), 함이 없는 무위(無爲), 우주적 삶을 춤추는 무위(舞爲)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개운(開運)하고 개운(改運)한다. 카르마 도하기 창조성으로!!!

도시심신낙처(都是心身樂處)
온통 몸과 마음이 놀이터구나
@peterchung

ps.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돈 때먹고 도망간 놈은 얄밉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날 속일수가 있어! 천벌을 받아야한다 이놈의 자식아! 난 몰해도 안돼! 에이 더러운 세상!
: 이러면 안된다. 이렇게 행동하면 악습이 쌓이는 것이고 이렇기때문에 또 악과의 씨앗이 쌓여가는 것이다. 이놈의

악습(惡習)!

악습(惡習)!

악습(惡習)!

ps. 기독교 전통의 천국에 대한 견해비판: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위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천국에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요즈음 기독교인들(다는 아니지만)의 불신지옥은 말이 안된다.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을 간다는 것은 우선 마음이 가난하다는 깨끗한 마음(청정심/淸淨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들이 믿는 천국과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은 달라도 한참 다른것 같다. 내가 볼때 그들은 천국에 못간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불신지옥 예수천국이라는 믿음이 채워지면 고집이 되고 그러면 그 마음은 절대 비워질수 없기때문이다. 그마음이 어떻게 가난할수 있을까? 천국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차있는 것같다.


서양 철학자의 운명학에 대한 이론 철학서 소개


내가 요즈음 공부하고 있는 Ken wilber라는 재미있는 철학자가 있다. 이 아저씨는 동양과 서양의 전통 수행(티벳불교 밀교수행/선/기독교적 전통수행)을 체험했으며 다독(거의 폭식수준)을 하여 많은 철학관련 서적들을 출판했는데, 이분의 이력은 여기를 보시면 된다. 물론 영어지만, 그리고 좀더 알고 싶다면 켄윌버와 통합사회에 가입하면 된다. (참고자료를 모두 살펴볼수 있습니다) 켄윌버가 특히 나에게 필을 꽂았던 부분은 통합이론의 원리(포괄, 전개, 현성)였다. 모든 것은 옳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옳다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려(싸움꾼형)가 아니면, 둘다 틀려 그래서 난 아무도 안믿어(도피자형) 이런 자세로 대화에 임하게되면 항상 평행선이 되어버린다. 지금은 상호존중하고 이해하면서 포괄하면서 대화를 전개(초월)하고 발전(진화)해야하는 시대인 것이다. 영적 성장의 시대이다.

내가 지금 소개하고 앞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Karma & Creativity (초고 A, B, C, D, G, 통합기호학)는 비출판 초고이다. 이 책은 삶에대한 철학서이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들을 비교하면서 Ken Wilber가 정리한 수행철학서이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우주는 얽혀간다. 이 순간의 우주와 직전 순간의 우주는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즉, 현재의 순간이 직전의 순간과 닮았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다르다는 점은 지금 순간이 현저하게 새롭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 수록, 모든 것이 더 불가사의해진다. 과거의 전통은 모든 영역의 인간 탐구에서 중요한 열쇠임이 입증되고 있기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논하게 될 핵심 주제들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마도 영성의 전 영역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에도 관계되어 있다. - 카르마와 창조성 초고 A 개요


카르마와 창조성을 공부해 나가면서 동양에서 보는역학유불도사상을 함께 살펴보면서 켄윌버의 통합이론과 대화를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건조하고 어렵게 쓰여진 삶에 대한 철학서이긴 하지만 저의 공부이기도 하고 또한 차분한 정리로써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관심이 있는 스티미안 동지들을 낚아내는 시도와 목적도 있구요.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溫이면 不亦君子乎아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배우고 꾸준히 익히면 이또한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같은 관심을 갖은 도반들이 있어 멀리서도 와서 함께 참여하면 또한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왜이리 몰라줄까?' 화내지 않으면 이게 바로 군자가 아니겠습니까? -논어 학이편(論語 學而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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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대되네요~ 윌버 책중에 카르마와 창조성 이외에 또 재미있게 읽은 책은 무엇이세요?

켄윌버의 일기와 grace and grit이요. 번역제목이생각안나내요. 근데 제 포스팅이 한자가 많고 좀 읽기 힘드시죠?

정말 운명이 있는건지 ...
윤회가 있는건지..
궁금했습니다!!

나름 쉽게쓰려고 했는데 어렵게 설명한것 같습니다. 한자도 많이 남발했구요

삶의목적은?
영혼의 성숙이라고 보면 될까요?

그렇지요. 님처럼 계속 수행하시면 영적성장의 ktx

어렵다. 그래도 다 읽었어요.^^

🍎 할께요. 그리고 💙(따스한 블루하트) 뿅뿅!^^

카르마는 결국 내가 한 선택들이 모여서 빚어진 작품이죠. 앞으로 올려주실 글 기다려집니다^^

뽀얀님의 詩象이 너무 좋습니다. 자꾸 음미하게 됩니다.

님의 글들을보면 호기심많은 요정이 인간세상에 놀러온 느낌이랄까요?

켄 윌버는 참 열일 하시는 군요.. 정말 모두 통합해 내실듯.. 스티밋에서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

내용이 너무 딱딱하지요? 마법사님처럼 흡인력있는 필력이 못되서 관심갖아주는 스티미안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정리해보려구요. 캔 윌버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이분도 어느정도 '자뻑'기질이 있으신거 같습니다. 하기야 워낙 상근기라서 그렇겠지만요. 통합의 본질은 조화인데, 통합이론 하는 사람들(켄윌버및 그의 추종자들)이 자꾸 '기존 사상들을 사상한(AQAL틀)안에 구분'짖는데만 열내다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반-통합기미도 많이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가 돌맞겠지만..., 아니라고 끝가지들 얘기하는데 사실은 기인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통합이 요원한듯~, 이건 제 생각이긴 합니다. 제가 그분들이 말하는 통합적인 사고방식이 부족해서일수도 있겠지요.)

간편해서 사분면 구분을 많이들 쓰는데.. 세상이 그렇게 딱 구분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다른 것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하는 지 역동에 대한 관심이 더 중요할 텐데 말이죠 ^^

카르마와 창조성
엄청난 주제네요.

앞으로 연재가 기대됩니다.

다만 첫 글치고는 좀 어렵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첫글에는 원글님의 연재 의도만 간략히 다루면서
독자들한테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게 어떨까 싶긴 해요.

카르마, 창조성만해도 어마어마한 개념인데
켄윌버의 통합이론은 더 엄청나게(부담으로^^) 느껴지거든요.

저같으면 하나하나 한 꼭지로 다루면 더 좋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운명이 있다고 여기면 운명은 자신한테 오고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면 바뀐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글쓰기 교실은 참여 인원이 많지를 않지만
형편껏 나누어 갈까 합니다.

관련 포스팅을 하나 했으니 참고바랍니다.

지장경에서 쓰인(written) 지옥중생, 열반, 해탈이 각각 뭐예요?

지장경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지장경 내용은 지옥을 묘사하고 있는데 끔찍하지요. 일반적으로 열반과 해탈을 같은 의미로 봅니다. 열반을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천국이라고 볼수 있는데 물리적으로 떨어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만든 세계이고 마음이 열반이면 거기가 천국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요? 그것을 해탈의 마음이라고 표현하지요. 해탈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의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입니다. 마음속 깊이 뿌리밖힌 잠재적인 번뇌들도 모조리 없어진 경계를 말합니다. 불가능할것 같지만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물론 저도 번뇌에 오염된 사람일 뿐이고요.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사라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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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에 대하여 믿느냐 안믿느냐의 문제인거 같습니다. 무상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면 죽어도 번뇌인 탐,진,치가 남아있으니 새로 태어나는 윤회의 삶을 반복한다는 것이지요. 해탈은 번뇌의 소멸인데 이것은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지요. 생사를 초월했다는 뜻은 생사에 매어있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적절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음 또한 항상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죽음이 변하면 죽음의 죽음이라고요?

죽음의 죽음이 태어남이라고요?

포스팅에서 서술했듯이 전제가 있습니다. 무상(無常) 즉,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명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확신이 전제하지요. 저는 아직까지 변화라는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못찾았습니다. 단, 변화한다는 사실은 예외이긴 합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 사실이 어긋나지 않다면 모든 것에 포함되는 죽음 조차도 영원할수 없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변화한다면 그 죽음은 죽음의 죽음이지요. 그렇다하면 태어남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다시 태어남이란 것이 지금의 몸과 정신이 그대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저 피터가 죽으면 피터의 죽음은 과거로 끝나는 것이고, 피터가 아닌 새로운 몸과 마음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도 영원한 태어남도 불멸한 존재도 없는 것이지요.

물질, 암흑물질, 반물질 이런 것들은 무상하겠지만 개념 자체는 어떻게 표현이 되든 항상성이 있다고 보는데요. 죽음의 상이 없어지니 삶이라는? 피터님이 죽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육신(영혼, 정신, 혼백 등 표현 여하를 불문하고 그런 것들은 모르겠고요.)이 사라진다는 것일진대 그것은 무상인 것이고 죽음 그 자체는 불변하는 것이 아닌가요? 무상은 만물, 만상, 만형에 적용되는 원리라고 봐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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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이 아마도 인도의 논리학에서 논쟁주제였던거 같습니다. 우리가 현상계를 논할때 물질과 정신을 함께 포함시키죠. 영혼이든 정신이든 마음이든 비물질적인 그 무엇도 현상계의 범주에 속하지요. 그렇다면 비물질인 이름질수 없는 그 무엇도 무상의 원칙에서 벗아나지 못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근거는 정신작용이 인식한다는 것인데 변하지 않으면 인식이라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인식하는 주체도 인식한다는 것이 작용하는 것인데 그 작용도 무상이라는 변화가 없는 고정된 그 무엇이라면 인식작용도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소멸이라는 것이 불변이라면 태어남은 일어날수 없습니다. 소멸만 있다는 것이 되거든요. 이 논증은 용수보살의 중론과 인도 논리학에서 거론되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인정합니다.

ps. 개념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지만 현상계, 세속과 동떨어져있는 비실재입니다. 하느님, 영혼, 사람 등 이러한 단어는 현상계의 존재가 아닌 단어로서 개념일 뿐이지요. 그러나 마음과 물질은 분명히 작용을 하니까 무상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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