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기차는 8시에 떠나네

in #kr-musik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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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나보다 몇 살 많은, 진보적이고 페미니스트인 여성과 술을 마시는데, 느닷없이 “패티 페이지,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다.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 여자 노래 좋아했는데, 수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젠 그 여자 노래 안들을 거야”라고 말한다.

패티 페이지가 수구인지 아닌지, 난 아는 게 전혀 없다.
(그가 수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렇다 치자.
그런데 궁금하다. 가수의 세계관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까지 잘 듣고 있던 그의 노래까지 갑자기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게 되는 것일까?

프랭크 시내트라의 멋진 노래를 들으면서, 그가 마피아와 연관돼 있다는 루머가 사실인지 아닌지 생각하면서 들어야 할까?

내가 들어본 패티 페이지의 노래는 감미롭고 밝다는 느낌만 있다. 그래서 들으면 편안하고 좋다. 나도 수구가 싫다. 그렇지만, 나는 패티 페이지나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끝까지 듣는다. 패티 페이지는 음반도 있다. 나는 세계관이 없는 사람일까?

사실, 내가 이런 ‘한가한’ 의문을 가진 지는 상당히 오래된다.

나는 음치에다, 피아노도 칠 줄 모르지만, 음악이 좋다. 노래잘하는 사람, 겁나게 좋아한다.
학교다닐 때, 미팅 요청이 오면, “음대생 있어?”라고 묻곤 했다. 이상하게 한번도 음대생과 사귀어 본 적은 없다.

왜 그렇게 음악을, 노래를, 음악하는 사람을,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좋아했는 지 모르겠다.

사실 (클래식)음악을 안들은 지 꽤 오래 된다. 예전엔 음악을 LP판으로 들었다.
LP판은 먼지가 있기 때문에, 알코올을 약간 묻힌 거즈로 닦은 뒤 턴테이블에 올린다. 판이 살짝 튀기도 한다. 그래도 따뜻하달까, 인간적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 났었다.

독일 예술가곡을 많이 들은 것 같다. 자취방에 전축이 있었다. 친구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놀리곤 했다.
학교 다닐 때 독일어를 꽤 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노래 가사를 읽으려는 이유가 아주 컸다. 지금도 슈만의 가곡 한두개는 독일어로 쓸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한 놈이다. 가상화폐 같은 걸 만들어서 누구처럼 1조는 못 벌더라도, 누구처럼 몇십만원으로 10억은 벌어야지, 이 나이에 무슨 슈만이냐....
가상화폐도 좀 이해하고 싶은데, 그쪽 방향으로는 정말 머리가 안돌아간다. ㅠㅠ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며칠전 jamieinthedark님 포스팅에서 말러, 바그너 등의 이름이 거론된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예전의 나로 잠시 돌아간 탓이다.
그런 음악을 안 들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이름을 보면 반사적으로, 아, 나 옛날에 그런 음악 좋아 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이런 글까지 쓰게 만든다.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악기중에는 관악기를 좋아했다. 베토벤 <운명> 3악장에 나오는 혼(호른)으로 변주하는 부분이 너무 좋았다. <운명>은 그래서 주로 3악장을 들은 것 같다.

처음에는 음악을 들었는데, 나중에는 음악을 ‘읽은 것 같다’.

음악가와 음악을 분리할 수 있을까?
노래에서 노랫말(가사)을 빼면, 무엇으로 그 곡의 (정치적)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을까?
이런 '돈 안되는' 종류의 물음에 관심이 많았다.

푸르트뱅글러는 20세기를 풍미한 마에스트로로 평가받는 지휘자다. 그런데 그는 나치에 협력한 사람이다. 학교다닐 때 푸르트뱅글러의 나치 협력 사실을 알고 난 뒤, 그의 음반은 듣지 않았다. 음악 자체로만 본다면,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하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히틀러와 나치는 바그너를 매우 좋아했고, 베토벤을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적극 선전했다.

그런데, 푸르트뱅글러가 히틀러 앞에서 지휘한 베토벤과, 그가 다른 곳에서 지휘한 베토벤이 다를까? 그가 녹음한 베를린 필의 베토멘 음악에서, 히틀러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웃기는 건, 아니 한심한 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런 ‘돈 안되는’ 종류의 물음이 궁금하다는 거다. 왜냐하면, 그 때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도 대학생에게 한권의 책을 권하라고 하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4권으로 엮어져 있어, 다 읽으려면 아마 한달은 걸릴 거다. 방대한 문예사회사를 다루는데, 음악에 관한 부문은 거의 없다. 주로 문학과 미술이다. 그게 아쉬웠다.

좌파 진영의 문예이론을 집대성한 루카치도 음악에 관한 기술은 거의 없다. 음악에서 리얼리즘은 어떻게 구현되는지 등에 관한 짦은 기술이 있긴 한데,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학교를 좋업한 뒤에는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슴 한켠엔, 젊은 시절의 그 궁금증이 계속 남아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한가한’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직도 난 세상을 덜 살았나 보다. 세상이치 알만한 나이가 됐는데도, 이상하게 유독 음악 분야에서는 아직도 젊은이고, 학생이고, 궁금증이 많다.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다.

한가지만 덧붙이자.

예전에 매우 매우 매우 보수적인 칼럼을 쓰는 사람이 <카트리나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라는 노래를 멋진 노래로 표현한 것을 읽고는 쓴 웃음이 나왔다.
이 노래는 우리로 치면, <임을 위한 행진곡> 정도에 해당하는 노래다.
작곡가는 그리스 군사독재에 항거한, 우리도 치면, 대표적 민주인사다.
그 노래의 가사는 싸우러 가는, 그래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남자친구를 전송하면서, (돌아오지 않겠지만) 기다리겠다는 내용이다. 그 사람의 평소 칼럼 성향을 보면, 그 노래를 거세게 비난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안된다고 하면서, <카트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멋지다고 하는 것은 좀 웃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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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님은... 정말 유식하십니다

무슨 말씀, 정말 돈 안되는 이야기 입니다. ^^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저 역시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귀한 영상을...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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컼,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 군요. 감사합니다

음. 저는 솔직히 '기차는...'노래에 대해서 (한국 기준으로) 보수인 사람이 반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음악은 음악으로 본다는 얘긴 이미 드렸지만...그걸 떠나서도, 한반도라는 맥락은 좀 특이하긴 한데다가,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생명의 희생 (가능성)이라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주제에서까지 (그것도 타국이라는 맥락에서) 정파성에 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거든요. 싸우러 간다는 그 노래 속의 군인도 역사의 희생자일 뿐이고, 그리스의 군사독재를 좋게 보는 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군인 개개인에 대해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충분히 안타깝게 볼 수 있죠.

만약 그런 노래 배경을 모르고 그냥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도, 뭐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만일 나중에 그 배경을 알게 되어서 싫다고 한다면 그 후배 분의 패티 페이지 거부 이유와 비슷한 것 아닐까요.

정말 다양한 주제에 깊은 통찰을 갖고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놀랍습니다.언제 그 정도의 독서를 하셨는지...

하하 감사합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문학으로 시작해서 철학 등의 이론서로 옮겨갔는데, 남들보다 글을 조금 일찍 깨우쳤고 밖에 나가서 놀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을 거의 하지 않아서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잃은 것들이 있겠죠!)

20살 이후로는 문학은 거의 못 읽고 이론서나 논문, 영화를 주로 봤는데, 어릴 적에 읽은 것들을 기억 잘 하는 편이죠. 대신 기억을 잘 못 하는 다른 것들이 있겠지만요.

짱입니다 !!!

그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노래가 가수의 이미지에 덧칠해서 들려지니깐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수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고 노래 가사가 그동안 들었던 분의 느끼는 감정의 진정성이 사라져 버리니깐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노래만 정말 좋은 노래들인데...

노래라는게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야 힘과 몰입감이 더 생기니깐요ㅋㅋ 가수는 노랫말따라간다는 말도 있고 ^^ ㅋ 사실 잘 모르는 분들이라 딱히 드릴말씀이 없어용^^~

맞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보팅완료. 좋은 주말 보내세요!
시험 끝나구 자주 소통하러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어려운 주제네요. ... 저도 몇가지 개인적인 소신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는게 있긴 한데...
사실 그것에 대한 반론은 마음속으로 몇번씩 .. 재기되고 있습니다. .. 그렇지만 마음이 그쪽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게라도 노력은 해야 할 것 같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호하게 보이는 호/불호도 있지만.. 아예 몰라서 생긴 불호 같은건 또 어떻게 할지 모르겠네요.. 비슷한 고민으로 바그너는 무슨 죄가 있기에.. 기피 해야 할지.. 그런 고민을 해본적은 있어요.. ....

일본제품도 마찬가지지요.. 지금의 일본은 전범국가 일본과는 다르고 그 개개인은 또 다르고... 그렇지만.. 좋아하긴 싫고..... 어렵네요.. 다 아는 것도 어렵고.. 몰라도 어렵고...
.. 그저 마음가는 길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길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며..

뉴비 지원 보팅이 늦었습니다..
주말 마무리 잘 하세요.

마음가는 길을 따라갈 뿐...참 지키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마음가는 길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길을 가잖아요. 고맙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공감합니다.
세상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앎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앎에 대한 열정! 우리를 춤추게 하는 그 무언가! 저도 스팀잇을 하면서 문뜩 문뜩 그 불꽃이 가슴 속에서 스파크처럼 튀기는 것을 느낍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리스팀까지...너무 고맙습니다.

패티 페이지가 수구꼴통인지 아닌지, 난 아는 게 전혀 없다.
(그가 수구꼴통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렇다 치자.
그런데 궁금하다. 가수의 세계관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까지 잘 듣고 있던 그의 노래까지 갑자기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게 되는 것일까?

이 부분 정말 공감되네요.. 한국인들의 흔한 착각이자 오류중 하나가 아닌가 싶네요!

프레임을 씌우고 이미지를 입히고, 지금 이 글을 정치적인 내용으로 끌고 가는것도

제가 프레임을 씌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너무 공감되어서 언급하고 가네요!

나는 음치에다, 피아노도 칠 줄 모르지만, 음악이 좋다. 노래잘하는 사람, 겁나게 좋아한다.
학교다닐 때, 미팅 요청이 오면, “음대생 있어?”라고 묻곤 했다. 이상하게 한번도 음대생과 사귀어 본 적은 없다.

저도 음악하는 친구들에 관심이 많아서 공연 하는 친구랑 만나봤었는데요.

케이스바이 케이스겠지만 저랑 다소 맞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이상형은 아이유! ㅋㅋ

글 잘 읽고 갑니다~~ 글을 상당히 잘 쓰시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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