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끄끄|| #8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in #kr-book7 years ago (edited)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jpg


가게 안은 허름한 외관과는 사뭇 달랐다. 아담하고, 청결하고, 정연했다. 올록볼록 무늬가 도드라진 하얀 벽지는 막 빨아 다림질하기 전의 시트처럼 뽀얗고, 진한 갈색 바닥은 아이스링크로 사용해도 될 만큼 반짝거렸다. 라벨의 방향이 가지런하게 진열된 각종 약제는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무대 위에서 정확하게 자기 위치에 선 배우처럼 보였다.

가게 주인은 손님용 의자 옆에 마치 무슨 부속품마냥 서 있었다. 예약 시간을 확인하면서 내가 오기 전부터 줄곧 그렇게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머리 스타일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그냥 짧기만 한 머리는 염색도 하지 않아 흰머리가 눈에 띄었다. 나이는 많아도 등은 꼿꼿하다.

의자에 안자마자 하얀 기운이 내 몸 전체에 씌워졌다. 타인이, 그것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 공손하게 소맷자락에 팔을 넣어주다니, 작은 어린애가 된 기분에 민망해서 한쪽 팔은 내가 밀어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 쪽 움직임이 더 빨랐다. 장소는 금방 아시겠던가요? 그렇게 물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더니 불쑥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다. 이곳으로 가게를 옮긴 지 15년이 되는군요, 그렇게. _본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서

_오기와라 히로시,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표지와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게 된 책이다. 각기 다른 6개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책의 제목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도 그중 하나다.
책은 각자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책은 시종일관 담담히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큰 굴곡도 없고 눈에 띄는 문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하며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모든 사연들이 내게 혹은 누군가가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라 그렇다.

불행은 화려하지 않다. 이 책처럼 조용히 그리고 불현듯 다가와 삶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불행한지 조차 모르고 넘어가고는 한다. 차후 삶을 돌아봤을 때야 생각한다. 아, 그때 참으로 불행했어,라고.
책에 나온 모든 상처가 결말에 이르러 모두 치유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대로 두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치유일 수도 있으니까.

일본 소설답게 감정표현이나 주변 묘사가 정밀하고 꼼꼼하다. 상처에 대한 치유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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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의 방향이 가지런하게 진열된 각종 약제는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무대 위에서 정확하게 자기 위치에 선 배우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단번에 그려지는 묘사입니다. ㅎㅎ
글이 참 좋네요.ㅎㅎ

그죠? 아무래 일본 문학이 갖는 특성중 하나인 거 같아요. 아, 물론 한국문학도 이 못지 않게 세세하고 좋은 묘사를 하는 작가분들도 많지만요. 뭐랄까 일본 특유의 감성이 있다고 할까요? 일본문학을 읽을 때면 그런 걸 느끼곤 합니다. :)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_^
왠지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가 상상이 가네요. 눈에 보일 것 같아요.ㅎㅎ

이발소 안에 큰 거울을 설치해서 손님이 바다를 볼 수 있게 했다네요. :)

글이 참 좋네요. 저도 언젠가부터 단편소설의 매력에 빠졌어요. 기회가 된다면 단편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단편소설 쓰기가 오히려 장편소설보다 어려운 거 같아요. 내용을 잘 함축하기도 해야해서 그런가.

생각해보니 저도 요즘 장편보다 단편을 더 많이 읽은 거 같아요. 일부로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됐네요.
그리고 다음 책은 아마도 구덩이가 될 것 같습니다! :)
지금 제 손에 따끈따끈한 새 책으로다 딱! ^-^

마침 날씨도 책읽기 딱! 좋네요. 즐겁게 읽으세요~! ^0^

네. 읽고 리뷰도 올리겠습니다. :)

일본 소설의 매력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작은 것에도 그냥 지나치치 않는 세밀한 표현력... ^^

그러니까요.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섬세함이 있어요. 아니면 일본인은 꼼꼼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지. :)

아 재밌겠어요 일본소설좋아하는데 책소개부터 바람이 솔솔불어오는 따뜻한바람이 불고있는것같은이느낌~! 좋은데요??

읽기도 쉽고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인 거 같아요. :) 일본 소설 좋아하신다면 추천입니다. ^-^

지금 소크라테스 변론을 읽고 있는데(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습니다...ㅠㅠ)
다 읽고 나면 가볍게 저 책을 읽어야겠어요
캡쳐 했습니다 초콜렛님 :-)

소크라테스 변론... 감히 전 엄두도 못 내는 책입니다. ㅠ 무거운 책을 읽고 나면 역시 가벼운 책을 읽어 주는 게 좋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목이 꽤 서정적이네요.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서 머리 하면 머리가 시~~원 할 듯 해요~^^. 잔잔하게 와서 흔드는 흔들림이 무서운듯 하더라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제목은 서정적인데 막상 내용은 음. 좀 현실적이라고 해야하나? 암튼 이발소도 나름의 사연이 있답니다. :) 해피님도 좋은 주말 보내셔요. :)

불행은 화려하지 않게, 불현듯 다가와 삶을 흔들어 놓는다는 말이 무척이나 공감가네요.. 그래도 다행인게 말씀해주신것 처럼 불행한지도 조차 모르고 넘어가기도 하고요... 모든 병을 완벽히 치료할 수 없는 것 처럼, 마음의 상처도 그런 것 같아요 비만 오면 시린 무릎 처럼, 괜찮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면 내가 그래 이런 상처가 있었었구나 생각하고 그냥 덤덤하게 받아드리게 되는...ㅎㅎ

맞아요. 마음의 상처는 정말이지 치료하기 힘든 거 같아요. 제가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 번 겪은 적이 있는데 지금 시절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기억상실 같은 건 아니지만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그때의 기억을 잊은 게 아닌가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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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님이 이발소 하셔서 더 정감이 가는 책 제목이네요 ^^

아, 그러셨군요. :) 근데 책에서 이발소는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아요. ㅠ 단편 중 하나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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