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44. 남아있는 나날 by 가즈오 이시구로 - 인생은, 박수칠 때 떠날 수 없기에

in #kr-book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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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길을 떠난 걸까?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주말의 명화를 해주는 걸 본 적이 있다. 제목은 <남아있는 나날>. 제목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검은 옷을 입고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다지 내 흥미를 끌지 못했기에 영화는 보다가 말았고, 그렇게 그 영화는 "뭔가 고급스러우며 작품성이 뛰어난 것 같지만 재미는 없는" 영화로 내 기억에 자리잡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영화에 원작이 있으며, 원작소설은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썼고, 그 책으로 맨부커상(한국의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받은 바로 그 상)도 수상하게 됐다는 걸 알게 됐다. 일본계 영국 작가가 쓴 20세기 초반의 집사에 대한 이야기. 뭔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묘하게 날 이끌었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국의 거부 달링턴 가의 집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스티븐스. 그는 모두가 쳐주는 최고의 집사였지만, 시간이 흘러 달링턴 경은 나치에 영합했다는 이유로 내쳐지고, 그 집마저 미국인 패러데이에게 팔린다. 한때 수많은 하인들과 하녀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 모두 내보내고, 나이가 들어가는 황혼의 스티븐스만 새 주인을 맞게 된다. 그때 그에게 날아온 편지 한 통. 예전 달링턴 가의 전성기 시절 함께 하녀들을 관리했었던, 하지만 이제는 결혼을 해서 멀리 떠나버린 하녀장 켄튼에게서 온 편지다. 마침 새주인은 패러디스는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울 테니 그동안 스티븐스도 휴가를 가지라고 말해준다. 스티븐스는 편지의 주소지를 찾아 켄튼을 만나는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켄튼을 만나러 가는 길,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집사장으로서 늘 최선을 다하고 헌신했던 자신의 모습, 켄튼과 함께 일했던 시간들. 책에 명시적으로 나와있지는 않지만, 스티븐스가 한때 그녀를 사랑했음을 (그리고 켄튼도 그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왜 그녀를 찾아가는 걸까? 단순히 그녀에게 새 일자리를 제안하기 위해서?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그녀를 찾으려고? 자신의 지난 삶을 돌려놓기 위해서?


회한과 후회는 우리의 몫


이 책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가득 묻어 있다. 어떤 이들은 멸시할 수도 있는 '집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스티븐스. 집사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가정을 갖는 것도 포기하면서 매진했고, 남들에게 훌륭한 집사라는 칭송도 받았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만약 그가 가정을 꾸렸다면, 그는 덜 훌륭한 집사가 됐을까? 그가 가정을 꾸렸다면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삶을 살게 됐을까? 그랬다 하더라도 그의 삶에는 역시 후회가 생겼을까?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는데도, 뭔가 그 삶의 끝에서는 허전함과 후회가 남는다는 점에서 예전에 읽었던 <스토너>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인생을 살더라도 우리는 회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출처: 교보문고


인생은, 박수칠 때 떠날 수 없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늙는다. 피부는 탄력을 잃고, 손은 느려지고, 눈은 침침해진다. 왕년의 솜씨를 발휘해보고 싶지만 노장들의 실력은 예전만 못하다. 날고 뛰던 국가대표도 은퇴를 하고, 배우들도 주연 자리를 내어준다. 실력과 인기와 명성이 사그라든다 싶으면 자신의 분야에서 명예롭게 퇴장한다.

그런데 인생은 그럴 수가 없다. 박수칠 때 떠나고 싶지만, 우리는 박수갈채가 끝난 후에도, 막이 내린 후에도, 우리의 삶을 이어가며 자신의 실력이 녹스는 걸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예전의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자신이 수십년간 노력했던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간다. 노년에 이르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의 영광을 혹은, 지난날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제목의 오역 논란에 대하여


지루할 것 같다는 편견을 깨고,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해준 고마운 책인데,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책에 오역 논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남아있는 나날>이라고 하면 remaining days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건 원제인 The remains of the day와 확연히 다르다는 거다. 넷플릭스에서 예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남아있는 나날>을 <그날의 잔영>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서비스하고 있다는 기사도 봤다.

나도 처음에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이 오역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자, 제목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오역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느끼기엔 The remains of the day는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는데 그 후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제목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앞으로의 남은 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제목이기도 하다. 물론 <남아있는 나날>이라고 하면 후자의 느낌만 강하게 들기는 하지만, 어쨌건 완전히 오역이라고 보긴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그날의 잔영>이라고 하면 그 인생 중 어느 특정한 한 날에 대한 느낌과 영향만을 얘기하는 것 같아서 책의 주제와 약간 안 맞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책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특정한 날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고 서술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아, 모르겠다. 여러분. 번역이라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 출처: 다음 영화


나를 깨우는 말들



1.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예전에 함께 일했던 하녀장 켄튼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집사장 스티븐스. 그녀의 편지 곳곳에는 삶의 공허함을 토로하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She begins one sentence: ‘Although I have no idea how I shall usefully fill the remainder of my life…’ And again, elsewhere, she writes: ‘The rest of my life stretches out as an emptiness before me.’ (p. 38)

한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비록 내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쓸모있게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썼다. "내 남은 인생이 내 앞에 공허처럼 펼쳐져 있어요."

2.
부하직원을 해고했던 일로 맘고생했던 하녀장 켄튼. 그녀는 뒤늦게서야 집사장 스티븐스도 그 일로 마음아파했다는 걸 알고 원망한다. 왜 조금 더 일찍 감정을 토로하지 않았냐고.

“Do you realize, Mr. Stevens, how much it would have meant to me if you had thought to share your feelings last year? You knew how upset I was when my girls were dismissed. Do you realize how much it would have helped me? Why, Mr. Stevens, why, why, why do you always have to pretend?”

“I suffered so much over Ruth and Sarah leaving us. And I suffered all the more because I believed I was alone. (p. 110)

"스티븐스 씨, 만약 작년에 이런 감정들을 제게 토로하셨다면 그게 저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됐을지 정녕 모르시겠어요? 부하 직원들을 해고할 때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잖아요. 그때 말씀해주셨다면 그게 정말 제게 큰 도움이 됐을 거라는 걸 모르세요? 도대체 왜, 왜, 왜, 항상 모든 걸 숨기시는 거죠?"
...
"루쓰와 사라를 해고해야 해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저 혼자인 것만 같아서 더 힘들었어요.

결과를 바꿀 수 없을지라도, 때로는 서로의 마음을 공감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3.
우연히 부둣가에서 만난 남자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게 된 스티븐스. 그는 스티븐스에게 인생이건 하루건, 황혼기가 제일 좋다는 얘기를 해준다. 저녁이라 부둣가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마침 가로등에 불이 일제히 들어오자 모두들 환호를 한다.

His claim was that for a great many people, the evening was the best part of the day, the part they most looked forward to. And as I say, there would appear to be some truth in this assertion, for why else would all these people give a spontaneous cheer simply because the pier lights have come on? (p. 169)

그 사람 말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저녁이 하루 중에서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거였다. 모두가 기다리고 고대하는 시간. 그 말이 일견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 많은 사람들이 단지 부둣가에 불이 켜졌다는 이유만으로 동시에 환호를 하겠는가?

4.

Now, look, mate, I’m not sure I follow everything you’re saying. But if you ask me, your attitude’s all wrong, see? Don’t keep looking back all the time, you’re bound to get depressed. And all right, you can’t do your job as well as you used to. But it’s the same for all of us, see? We’ve all got to put our feet up at some point. Look at me. Been happy as a lark since the day I retired. (p. 172)

이거보세요. 내가 댁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기엔 댁의 태도가 잘못된 거 같아요. 계속 과거만 뒤돌아보지 말아요. 그러면 우울해지는 건 당연하니까. 뭐, 댁이 예전만큼 자기 일을 잘하지 못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누구나 다 그래요. 어느 순간이 오면 좀 느긋해질 필요가 있다고요. 나 좀 봐요. 은퇴한 그날부터 이렇게 행복하다니까.

5.

Perhaps, then, there is something to his advice that I should cease looking back so much, that I should adopt a more positive outlook and try to make the best of what remains of my day. After all, what can we ever gain in forever looking back and blaming ourselves if our lives have not turned out quite as we might have wished? (p. 173)

그렇지만, 아마도 과거만 뒤돌아보지 말고 좀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내 남은 날들을 더 좋게 만들어보라는 그의 조언에도 일리가 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자책하면 얻는 게 뭐가 있겠는가?



제목: 남아있는 나날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
원서 제목: The Remains of the day
특이사항: 맨부커상 수상작. 엠마 톰슨과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아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었음.





[독후감] 지난 독후감들 최근 5개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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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축복받은 집 by 줌파 라히리 -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40. 사극으로 읽는 한국사 by 이성주 - 골라먹는 디저트 한국사

41. 워터 포 엘리펀트 by 새러 그루언 - 추억은 힘이 없다. 그러나 역사는 힘이 세다.

42. 섬에 있는 서점 by 개브리얼 제빈 - 책, 서점, 그리고 사람들

43.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by 콜슨 화이트헤드 - 당신이 몰랐던 흑인 노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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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앤서니 홉킨스가 집사장으로 연기했군요. 넷플릭스에서 볼 영화로 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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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앤서니 홉킨스가 집사장이었어요. 전 워낙 예전에 봐서 영화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도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됐었다니, 영화도 꽤 좋았나봐요.

노년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다룬 소설이네요. 이 책과 스토너 모두 관심이 생깁니다.

스토너는 중간에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읽으면 참 감동적인 책이고요. 남아있는 나날은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20세기 초, 영국, 집사라는 신분. 모두 낯선 공간과 시간인데도, 그의 고민과 감정들이 잘 느껴지더라고요. 두 책 모두 추천드립니다. :)

주말의 명화

허허~ 이걸 알면 옛날 사람인데.... 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가득 묻어 있다.

이래서 한번뿐인 인생 후회없도록 사랑도, 일도, 하고싶은 일도 열심히 해봐야 되나봐요~

네.. 저 옛날 사람.. ㅋㅋㅋㅋ

후회하지 않도록 매 순간 신중하게 선택해야겠죠? ^^;

묵은 감정을 나누고 후회하는 과정을 보면 참 아련해집니다. 잘보고 갑니다.

어릴 때 이 책을 봤더라면 스티븐스와 하녀장 켄튼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더 중점을 뒀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랑보다도 삶에 대한 전반적인 자조와 후회에 더 공감이 갑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만간 저 영화나 한번 봐야겠네요~
브리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봐서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지금 보면 많이 다르겠죠? ^^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

독후감 넘 잘 읽었습니다. ^^ 엄지 척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독님께 칭찬을 들으니 더 기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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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영화가 사라지고나서는 '성우들은 그럼 뭐먹고 살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었죠..
생각해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화채널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는데도 말이죠. +.+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를 원래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게 너무나 당연시되었지만, 한때 레전드 성우들의 활약도 있었죠. 특히 맥가이버, X 파일, 형사 콜롬보 등은 성우의 목소리가 더 귀에 익고 더 좋아보여요. ^^

"계속 과거만 뒤돌아보지 말아요. 그러면 우울해지는 건 당연하니까. "

과거에 살며, 현재를 무겁게 사는 삶이라니...

직업에 너무 충실해, 지난 시간에 자신의 삶을 잃어 버린...
스티븐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거 같습니다.

젊은 날에 이 책을 안 읽고 이제 읽었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읽었으면 잘 이해하지 못했을 거 같기도 하거든요.

나이 먹어가며 후회되는 일들이 하나씩 생기지만 후회는 그만 하자며 다독이며 살아가죠.
이미 지니간 일 돌이킬 수 도 없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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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가 안 생기도록 더 노력하며 살아야겠죠. 매순간..
알면서도 실천하는 건 참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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