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41. 워터 포 엘리펀트 by 새러 그루언 - 추억은 힘이 없다. 그러나 역사는 힘이 세다.

in #kr-book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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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없고, 과거는 잊혀진 사람.


여기에 한 할아버지가 있다. 나이는 아마도 아흔, 아니면 아흔 셋. 초기 치매 증상이 있는지 자꾸 깜빡거린다. 다리에도 힘이 없어서 휠체어나 노인용 보행기가 없으면 걷기도 힘들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매일 아침 요양원 침대에서 눈을 뜨는 일, 힘겹게 식당으로 걸아가 할머니들의 수다를 들으며 밥을 먹는 일 뿐.

오해는 마시라. 그에게도 그를 사랑하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 가끔 떼로 몰려와 그에게 안부도 전해주고 인사를 하고 간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다 기억해낼 재간이 없다. 기껏 얼굴과 이름을 연결해볼라 치면 몇 달 후에는 또 다른 자식의 가족이 와서 인사를 한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그가 자신의 자녀들을 몰라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와서 인사하는 사람들 속에는 그의 자녀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자녀의 자녀들. 그리고 그 자녀들의 자녀들. 어쩌면 그 자녀들의 자녀들.

그의 현재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과거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 그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조차 그는 그저 늙은 사람일 뿐이다. 주름진 거죽과 고집만 남은. 혹은 의무감에 돌봐야 할 짐. 혹은 초기 치매 환자.



한국판 책 표지. 2007년에는 "코끼리에게 물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었는데(이 포스팅 제목에 있는 표지),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 후에는 영화 제목 "워터 포 엘리펀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표지도 영화 포스터 그대로다. 직역한 원래 책 제목도 그다지 맘에 들진 않았지만 영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건 더 별로다. 아예 다른 식으로 의역했으면 어떨까 아쉬움이 남는다.


추억은 힘이 없다고?


어느 날 요양원에서 밥을 먹던 그는 주변 할머니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던 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게 된다. "I used to carry water for the elephants. 내가 한때는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들한테 물 주는 일을 했었다구."

대단하다며 추켜세우는 주변 할머니들과 달리 그 말을 듣고 네가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며 노발대발하는 주인공. 저 놈은 서커스의 '서'자도 모르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화를 내면서. 결국 그는 간호사들에게 이끌려 방으로 옮겨진다. 또다시 식당에서 난리를 피우게 되면 앞으로는 식사도 방에서만 해야 할 거라는 경고와 함께.

하지만 이 일로 그는 아득히 저 먼 기억 너머에 숨어 있던 자신의 추억을 꺼내 먼지를 턴다. 그가 진짜로 서커스 단에 들어갔었던 그 일들을.

원래 그는 코넬 대학에서 공부하던 수재였다. 수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수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학년이 끝나기 전에 그만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게 된다. 학비로 인해 저당잡혔던 집도 넘어가고, 순식간에 무일푼 고아가 된 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한 기차에 무단으로 올라타게 되는데, 알고보니 그 기차는 다음 행선지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각종 동물들과 공연자들, 일꾼들을 태우고 가던 서커스단의 기차였다. 학위는 못 땄지만 동물에 대해 일꾼들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던 그는 얼결에 이 서커스단에 취직해서 동물들을 돌보게 되는데...



영어 원서 표지. 난 이 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역사는 힘이 세다.


이 책은 요양원에 있는 할아버지의 현재와 서커스단에서 모험을 겪는 이십 대 초반의 과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원서에서는) 두 개의 시대를 모두 현재형 시제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두 세대가 넘는 과거의 일이지만 마치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는 듯 생생하다. 사람들이나 동물들, 서커스 공연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거기에 힘을 불어넣어 준다. 흔들의자에 앉아 과거를 추억하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지금 그 순간을 다시 사는(re-live) 느낌이다. 추억이 아니라 역사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고, 우정과 모험이 있고, 스릴이 있다.

이 책은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서커스단의 이야기만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서커스단을 어떻게 관리하고 운영했는지,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 친목하고 반목하고 배신했는지를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현재의 주인공 제이콥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책의 깊이를 한 단계 더 풍부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책 한 권은 나올 만한 역사가 담겨져 있다는 평범한 진실. 그저 힘이 없는 추억이라고, 늙은이가 주책맞게 또 옛날 얘기나 꺼낸다고 무시하지 마라. 삶의 기록은 모두 역사가 되고, 역사는 힘이 세다.

책에는 서커스단에서 사용하던 그들만의 슬랭이나 언어가 나온다. 저자가 그 시대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인터넷 사이트 중에는 그 단어들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곳도 있다. 혹시 나처럼 원서로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것이다.

https://filmwaterforelephants.wordpress.com/bigtop/circus-lingo/



나를 깨우는 말들



1.

I am ninety. Or ninety-three. One or the other. (p. 1)

난 아흔살이다. 어쩌면 아흔 셋. 둘 중 하나

언젠가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온다.

2.

I glance down, check that my brakes are on, and rise carefully, steadying myself on the wheelchair’s arm while making the perilous transfer to the walker. Once I’m squared away, I clutch the gray rubber pads on the arms and shove it forward until my elbows are extended, which turns out to be exactly one floor tile. I drag my left foot forward, make sure it’s steady, and then pull the other up beside it. Shove, drag, wait, drag. Shove, drag, wait, drag. (p. 2)

나는 휠체어에 브레이크가 걸려 있는지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휠체어의 팔에 기대다가 중심을 옮겨 위태롭게 보행기를 붙잡았다. 중심을 잘 잡은 후에는 팔 손잡이에 있는 회색 고무를 꽉 움켜쥐고 내 팔이 앞으로 나란히 될 때까지 보행기를 쭉 밀었는데, 그러면 보행기는 바닥에 있는 타일 한 칸만큼 앞으로 나갔다. 나는 왼발을 끌어 앞으로 내민후, 그 발에 중심을 잘 잡고 이번에는 다른 쪽 발을 왼발 옆에 끌어다 놓았다. 밀고, 끌어 내밀고, 기다렸다가 끌어 오고. 밀고, 끌어 내밀고, 기다렸다가 끌어 오고.

천천히 보행기를 밀고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히 묘사하고 있어서 옮겨봤다.

3.

My real stories are all out of date. So what if I can speak firsthand about the Spanish flu, the advent of the automobile, world wars, cold wars, guerrilla wars, and Sputnik – that’s all ancient history now. But what else do I have to offer? Nothing happens to me anymore. That’s the reality of getting old, and I guess that’s really the crux of the matter. I’m not ready to be old yet. (p. 106)

내가 해줄 수 있는 진짜 이야기들은 모두 예전 것들밖에 없다. 스페인 독감이나 자동차의 도래, 세계 대전, 냉전, 게릴라 전, 소련의 인공위성에 대해서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들은 모두 흘러간 일일 뿐인데. 하지만 그것 말고 내가 얘기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늙는다는 건 그런 거다. 그리고 아마도 그게 진짜 핵심일 거다. 난 아직 늙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아흔이지만, 어쩌면 아흔 셋이지만, 아직 늙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직은 자신의 삶에 뭔가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무슨 일이든.

4.
뭔가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

A warm glow tingles through me and I snort back a giggle. I may be in my nineties, but who says I’m helpless? (p. 318)

온몸이 따뜻하게 간질거렸고 난 키득거리는 웃음을 참았다. 내가 90살이 넘었을진 몰라도 누가 나보고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5.

It was something, all right. I remember it like yesterday. Hell, I remember it better than yesterday. (p. 320)

정말 대단했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 옘병, 어제 일보다 더 잘 기억난다구.

(한글 번역은 제가 한 것이어서 한국에서 출간된 번역본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제목: 워터 포 엘리펀트
저자: 새러 그루언
특이사항: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로버트 패틴슨과 리즈 위더스푼 주연.





[독후감] 지난 독후감들 최근 5개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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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마션 by 앤디 위어 - '지구인'을 그리고 있는 '화성인'

37. 책도둑 by 마커스 주삭 - 모든 것은 책 속에 있다. 희망도, 길도, 구원도.

38. 알고리즘 행성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 by 제바스티안 슈틸러 - 게으름의 미학, 알고리즘.

39. 축복받은 집 by 줌파 라히리 -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40. 사극으로 읽는 한국사 by 이성주 - 골라먹는 디저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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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90세가 된다면 뭘 추억하고 있을까요? ㅋㅋㅋㅋ

내가 말이야~ 젊었을적엔 스팀잇이라는걸 했는데 말이야~

저도 그때 추억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으려면 지금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말이죠. ^^

저 연령대가 오긴 할까요? 온다면, 전 어떤 모습으로 있을싸요. 걱정으로 다가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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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운동을!

저도 원서 포스터가 훨씬 좋은거 같아요 :)
한글로 그대로 가져온거는 좀 많이 아쉽네요 ㅠ-ㅠ
지금도 나이는 별로 안중요하다고 생각이 갑자기 드는데요! ㅎㅎㅎ

원서 포스터가 서커스 느낌도 나고, 무슨 일이 막 벌어질 거 같아서 좋아요.
한국판은 예전 책 표지는 동화책 같고, 영화 포스터는... 홍보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좀 별로더라고요. -_-

불이님의 서평을 보고 어느 누가 '이 책을 보고싶다' 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끄러워서 앞으로 서평 못올릴거 같아요 ㅋㅋㅋ
다음 책 구입은 이것으로 정했습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
제가 읽고 특히나 좋았던 책이었던지라 이 책 읽으신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영업 성공! ㅎㅎㅎ
과거 서커스단 시절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고, 현재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짠하고.
읽고 후회는 안 하실 거예요. :)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큰일입니다 ㅎㅎ
이럴 때 분신술을 쓰고 싶네요^^;;

아무리 나이들어도 마음은 역시 청춘이네요.
책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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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이라도 청춘이었으면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괜찮은 책이네요. 한번 사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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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기회 되신다면 읽어보세요. ^^

위더스푼 예쁘답 +_+

영화는 못봤지만 저 역할에 잘 어울렸을 거 같아요.

언젠가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온다.
어흑~ 서글퍼지는군요...;;

아흑.. 그런가요? ㅠ.ㅠ

젊은 지금 좀 더 재미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도 이십대를 추억할 때가 많은데, 나이가 켜켜이 쌓인 시기가 오면 또 얼마나 많은 추억에 사로잡힐까요.ㅎ

맞아요. 지금 재미나게 열심히 살아야죠.
주인공 할아버지는 그래도 내놓을 만한 추억이라도 있었는데... (무려 서커스단이라니!!)

아핫,,, 이 책 재밌어 보여요. 나중에라도 꼭 읽어볼게요. ㅎㅎㅎ

네, 진짜 재미있어요. 서커스단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현재의 할아버지 얘기가 더해져서 감동이 배가 돼요. 나하님이 읽으시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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