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39. 축복받은 집 by 줌파 라히리 -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book5 years ago

291.jpg


이 책은 오헨리 문학상, 펜/헤밍웨이 문학상, 퓰리처상 등을 수상한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이다. 단편집은 레이먼드 카버와 앨리스 먼로에 이어 세번째로 읽게 됐는데, 개인적으로는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이 가장 좋았다. 등장인물들에 감정을 이입하는 게 쉬웠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총 9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인도계 미국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저자가 인도출신의 미국인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훌륭한 책이라면 다 그렇듯, 주인공의 인종이나 사는 곳이 다르다고 해서 이야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읽다 보면 주인공의 마음에 감화가 돼서 나는 어떤가 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람에 따라 책에서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언어로 얘기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의 진심이 가닿지 못하고, 서로의 주변을 헛돌기만 한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인 ‘낯선 땅에 적응하는 이방인’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진실로 마음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먼 타향이라도 잘 적응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자기 집 안에서 가족과 함께 있어도 고독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첫번째 단편인 ‘일시적인 문제’에서는 서로 사랑했으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점차 마음에서 멀어지게 된 부부가 나온다. 이들은 한 집에 살고 있지만 서로의 감정을 터놓고 나누지 못하고 외로운 섬처럼 겉돌다가, 결국 모든 것이 다 끝날 때에서야 숨겨진 진실을 말한다.

영어 원서의 표제작이기도 한 ‘질병의 통역사’는 좀더 직설적으로 이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주말에는 관광객을 안내하는 택시 운전사로 일하지만, 주중에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카파시 씨. 그가 누군가의 아픈 곳을 다른 언어로 잘 설명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택시를 탔던 다스 부인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카파시 씨가 마치 병원에서 통역하듯 자신의 아픔도 잘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과연 카파시 씨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아줄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을 통역해줄 통역사가 있다면 그는 내 아픔과 고민과 슬픔을 다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한국 번역판 "축복받은 집"


한글 번역판의 표제작인 ‘축복받은 집’에서는 새 집을 사서 집들이를 하려는 신혼부부가 나온다. 이들이 새로 이사간 집에는 전 주인이 남기고 간 기독교와 관련된 성물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아내인 트윙클은 그런 성물들을 보며 이 집이 축복받은 집이라고 기뻐하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남편 산지브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태도, 서로 부딪히는 두 개의 다른 시선이 이야기 내내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데, 앞으로 둘이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가장 마지막에 실린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이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다. 인도 출신인 주인공이 영국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 그가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낯설고 어렵기만 한 타향에서 그와 아내가 세 들어 살던 주인집 할머니의 “splendid”라는 단 한 단어로 정을 붙이고 마음을 열게 되는 장면은 말이 통함으로써 마음까지 통하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영어 원서 표지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이런 단편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한국인 이민 1세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소설로 풀어보면 어떨까 하고. 사실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나 Suki Kim의 “The interpreter”를 보고 나도 이민자로서 내 안의 생각을 풀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긴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 긴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축복받은 집>을 읽고 나니 이렇게 짤막한 단편들이라면, 어쩌면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발표하지는 못 할지라도, 단편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영어도 어렵지 않다. 독해 실력이 중상급이라면 원서 읽기로 도전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마디



1.

They wept together, for the things they now knew. (p. 22)

그들은 이제야 알게 된 서로의 이야기들 때문에 함께 울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말하지 못하고 터놓지 못했던. 이제야 함께 운다. 이제서야. 모든 게 다 끝난 후에야.

2.
미국에 와서 살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인도에 남아 있는 센 부인.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운전을 못하니, 남편이 없으면 집안에서 나올 수도 없는 신세다. 하지만 과연 운전면허증을 딴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달라질까? 그녀의 마음은 아직 인도에 남아 있는데.

“Mr. Sen says that once I receive my license, everything will improve. What do you think, Eliot? Will things improve?”
“You could go places,” Eliot suggested. “You could go anywhere.”
“Could I drive all the way to Calcutta? How long would that take, Eliot? Ten thousand miles, at fifty miles per hour?” (p. 119)

“우리 남편은 내가 운전면허증을 따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거래. 어떻게 생각하니, 엘리엇? 모든 게 다 좋아질까?”
“여기저기 다닐 수 있을 거에요.” 엘리엇이 말했다.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캘커타까지 운전해서 갈 수 있을까? 그건 얼마나 걸릴까, 엘리엇? 만 마일, 시속 50마일로?”

3.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이. 너무나 당연한 것까지 다 말을 해줘야 알아듣는 사이. 아내에게서 점점 벽이 느껴진다.

“We’re not Christian,” Sanjeev said. Lately he had begun noticing the need to state the obvious to Twinkle. The day before he had to tell her that if she dragged her end of the bureau instead of lifting it, the parquet floor would scratch. (p. 137)

“우리는 기독교를 안 믿잖아.” 산지브가 말했다. 최근 들어 그는 트윙클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을 말해줘야 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 전날에는 책상을 옮길 때 만일 그녀가 들고 있는 쪽을 들지 않고 끌게 되면 나무 마룻바닥이 긁힐 거라는 걸 말해줘야 했다.

4.

In my son’s eyes I see the ambition that had first hurled me across the world. In a few years he will graduate and pave his way, alone and unprotected. But I remind myself that he has a father who is still living, a mother who is happy and strong. Whenever he is discouraged, I tell him that if I can survive on three continents, then there is no obstacle he cannot conquer. While the astronauts, heroes forever, spent mere hours on the moon, I have remained in this new world for nearly thirty years. I know that my achievement is quite ordinary. I am not the only man to seek his fortune far from home, and certainly I am not the first. Still, there are times I am bewildered by each mile I have traveled, each meal I have eaten, each person I have known, each room in which I have slept. As ordinary as it all appears, there are times when it is beyond my imagination. (p. 197)

내 아들의 눈에서, 나는 나를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했던 그 야망을 본다. 몇 년 지나면 아들은 졸업을 하고, 홀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자신의 길을 닦아 나갈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아직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가 있고, 행복하고 강한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아들이 기운이 꺾일 때 마다 나는 아들에게 내가 세 개의 대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네가 정복하지 못할 장애는 없을 거라고 말해준다. 영원히 영웅으로 남은 우주비행사들이 단지 몇 시간만 달에 머물렀을 뿐이지만, 나는 이 새로운 세상에서 거의 30년 동안 살아남았다. 내가 이룬 것이 별 것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안다. 집을 떠나 먼 곳에서 돈을 벌려 했던 사람이 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첫번째였던 것도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여행했던 그 긴 거리, 내가 먹었던 끼니들,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 내가 잤던 방들을 떠올리면 나는 놀라곤 한다. 이 모든 게 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지만, 때로는 그것들이 내가 상상도 못할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제목: 축복받은 집
원서 제목: The Interpreter of Maladies
저자: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특이사항: 퓰리처 상 수상작



Disclaimer) 본문에 실린 인용은 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책은 영어 원서로 읽었기 때문에 한국 출간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독후감] 지난 독후감들 최근 5개 링크입니다.
@bree1042를 팔로우하시면 더 많은 독후감들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34.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by 정희재 - 목이 타는 한 여름에 미지근한 물

35. 1984 by 조지 오웰 - 소름 끼치도록 현재를 그리고 있는

36. 마션 by 앤디 위어 - '지구인'을 그리고 있는 '화성인'

37. 책도둑 by 마커스 주삭 - 모든 것은 책 속에 있다. 희망도, 길도, 구원도.

38. 알고리즘 행성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 by 제바스티안 슈틸러 - 게으름의 미학, 알고리즘.

Sort:  

영화제목은 (미국영화)생각이 안나는데요 부인이 죽고나서 전혀 슬프지 않는 남자가 부인이 생전에 적는 쪽지를 보며 그때부터 부인이 살아생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걸 느꼈는지 그제서야 눈물이 나고 같이 살았다고해서 부부라고 칭할 수는 없는걸 너무 슬프게 보았네요..ㅠㅠ
"소통" 이 가장 중요한거같아요
정희재 작가 좋아하는데 놀러가야겠어요!

첫번째 이야기에서의 부부는 처음에는 서로를 위한 배려 때문에 말을 아껴요. 그게 상대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말을 안 하죠. 하지만 말을 안 하니 거기에서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로 인해 혼자 괴로워하고. 그러다 둘 사이가 더이상 붙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돼요. 상대를 위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게 아니었음을. 참 슬퍼요.

마음을 통역해 주는 통역사... 너무 뼈때릴 것 같아서 저는 좀 피할 것 같네요.ㅎㅎ

좀 그렇긴 하죠. ㅎㅎ 그렇지만 가끔은 진짜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할 때 그런 통역사가 있으면 좋을 거 같기도 해요. ^^

Congratulations @bree1042!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made more than 22000 upvotes. Your next target is to reach 23000 upvotes.

Click here to view your Board of Honor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To support your work, I also upvoted your post!

Support SteemitBoard's project! Vote for its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자신을 돌아볼수 있는 그런 책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만에 정독!!+_+
브리님 단편소설 쓰시는거 응원합니다! ㅎㅎ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ㅎㅎㅎ
응원에 힘입어(?) 조만간 써보도록 할게요. :)

오늘 포스팅을 보고 불이님이 이민자 1세인걸 알았네요.
'splendid' 단어 뜻을 몰라 검색해보니 '아주 좋고, 훌륭한' 단어네요!

이민 1세(?)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하네요. ^^; 여기서 나고 자란 이민 2세가 아니란 의미였어요.
단어의 어감(?)과는 달리 전 그다지 늙은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네요. ㅋㅋㅋ

주인 할머니와 이민온 인도 신혼 부부 사이는 꽤 어색했을 거예요. 그런데 깐깐할 줄 알았던 주인 할머니가 새댁을 보고 splendid!라고 외치자 서로 묘한 호감을 느끼게 되지요. 제가 그 부분 설명을 제대로 못했네요. ^^;

설명이 부족하신건 없었습니다.
제가 splendid 단어 뜻을 몰랐을 뿐입니다.
뜻이 '아주 좋은', '훌륭한' 이라고 나오네요^^

줌파라히리의 책은 읽을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편 하나 읽고 다시 책장에서 잠자고 있네요. 브리님 감상을 들으니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버와 먼로 모두 애정하는데 줌파라히리를 더 좋게 읽으셨다니 기대가 됩니다.^^

사람마다 애정하는 작가와 스타일은 다르기 마련이라서 쏠메님께는 어떨지 살짝 긴장되긴 하네요. ^^;
어쩌면 제가 내용에 더 많이 공감을 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줌파 라히리의 단편은 대부분 인도계 미국인, 혹은 인도 이민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미국에 살다보니 거기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다 말이 통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죠.


@bree1042님 곰돌이가 최대 두배로 보팅해드리고 가요~! 영차~

고맙습니다! :)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책이 읽고 싶어지는. Mr. Sen says that once I receive my license, everything will improve. 드라이브하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점차 나아질 거라는 의미로 이야기한거 아니었을런지. AI 시대지만 여전히 통역사는 필요해보입니다.

맞아요. 남편은 그런 의미로 말해준 거죠. 하지만 센 부인의 마음은 여전히 인도에 남아 있기 때문에 혼자 운전을 하게 된다고 해도 계속 힘들어 할 거예요. 어딜 가든, 무얼 보든 계속 인도를 그리워할 테니까요.

아마 기술 번역 분야나 간단한 관광 분야는 AI로 대체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문학 쪽은 조금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하고요.

드라이빙의 매력에 빠져서 인도를 잊게될지도 모르죠. 카레이서~. ㅎㅎ. 경험상 기술 번역도 한참 걸릴듯 싶습니다. 기술분야는 정확도가 상당히 요구되기 때문에 점수를 후하게 줘도 현재는 정확도 50% 정도밖에 줄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좋은 책소개 감사합니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참 재미있게, 공감하며 읽었답니다. ^^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1
JST 0.033
BTC 64271.38
ETH 3157.43
USDT 1.00
SBD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