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첫 날, 야매 바텐더의 데뷔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edited)

엉망진창인 수면 습관이 20세기의 여름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평소 나는 5~6시는 넘기고 자기 일쑤인데 몸이 피곤하니 3~4시, 빠르면 2시에도 잠을 잔다. 고단한 몸을 뜨거운 물로 녹이고 노곤노곤해진 채 침대에 누우면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또 깊게 잠에 든다. 꿈에서도 20세기의 여름 안에 있다는 춘자와 달리 나는 매일매일 꾸는 꿈조차 줄어들었다.

6월 30일, 드디어 20세기의 여름이 활짝 문을 열었다. 12시 반 정도에 도착해서 바의 한구석에 노트북을 켜고 자리를 잡았다. 카페의 시간 동안에 20세기의 여름은 느긋한 편이라 자리를 잡고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카페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짙은 커피향이 풍기며 다섯이 일제히 노트북을 켜고 도독도독 글을 쓰는 모습은 20세기의 여름의 가장 핵심적인 풍경이다. 아마 가장, 그리워하게 될 순간이기도 하다. 오픈 첫 날까지 일을 봐주기로 한 매니저님은 우리를 위해 깜짝 선물로 노티드 도넛을 준비했다. 먹어 본 도넛이라곤 던킨과 크리스피 밖에 없는 옛날 사람들은 신선하고 달지않은 크림이 빵 안에 가득 찬 노티드 도넛을 먹고 돌고래 표호를 돌아가면서 했다. 원래 도넛을 좋아하는 춘자는 물론, 도넛을 좋아하지 않는다 했던 고물님과 젠젠도 끊임없이 초음파를 쏘며 노티스 도넛을 찬양했다. 오레오 맛도 체리 맛도 맛있었지만 만장일치 우리 셋의 원픽은 얼그레이! 2달 중 아마 한번쯤 배달을 시켜먹지 않을까? 여러분, 노티드 안드셨으면 꼭 드셔보세요. 노세권이 아니라고요? 20세기 소년에서 시키시면 된답니다, 소곤소곤.

이 날은 신기하게도 우리의 컨셉이나 프로그램을 궁금해 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작은 호기심들이 커져 이 안을 더 채우고 우리 프로그램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광희 작가님이 파스타를 만들어 주셨다. 처음 20세기 소년을 시작할 때 심야식당 마스터처럼 손님이 원하면 뚝따리 뚝딱 요리를 만들어줄 꿈에 부풀었던 광희 작가님은 영업을 하며 현실의 벽을 깨닫고 메뉴에서 파스타를 뺐지만 우리에게는 종종 특식처럼 만들어주곤 한다. 3번 정도 그의 특제 파스타를 먹었는데 이 날이 가장 맛좋았다. 가게의 한구석에 모여 끼니를 같이하며 우리는 더 진한 식구로 거듭나고 있다.

낮까지 일을 봐준 매니저님은 오픈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지하 자리를 차지했다. 커피의 커자도 coffee의 c자도 모르는 우리를 숙련된 조교의 입장으로 하나하나 돌봐준 무뚝뚝한듯 다정한 매니저님과의 이별에 다들 사뭇 아쉬움 마음에 선물을 전했다. 춘자는 춘자 기프트세트, 고물님은 < Mi Cubano > 책, 나는 무알콜 칵테일을 한 잔 드렸다. 그녀는 손님으로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20세기의 여름에는 다른 가게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특이한 메뉴들이 존재한다. <개새끼소년> 저자 마법사 멀린이 직관에 따라 만드는 아메리카노와 책 세트인 마메리카노와 < Mi Cubano > 저자 고물이 직접 내린 존맛탱 스페셜 라떼와 책 세트인 Mi Cubano 라떼, 그리고 오흐리드의 노을과 코팡안의 바다와 젠젠카세. 젠젠카세는 젠젠의 칵테일 오마카세로 내가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3가지 칵테일 코스를 내놓는 그야말로 20세기 여름의 별미이다. 광희 작가님의 말을 시작으로 장난 삼아 하던 말이 정식 메뉴가 되어 버렸다. 늘 분주하게 유인물?을 만드는 마법사님이 젠젠카세 알림판을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비공개 메뉴로 아는 사람이나 단골을 위주로 판매를 하겠다는 나의 신비 전략은 저 너머로,,,,

'설마 시킬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첫 날,,,,,,믿기지 않지만 누가 시켰다. 광희 작가님의 지인들 3분이 바에 쪼로록 앉아계셨는데 3분이 한 잔씩 드시겠다고 시킨 것. 오마카세인 만큼 하나하나 천천히 내놓는 게 컨셉인데 3잔을 동시에 얼음이 놓지 않은 상태로 내놓을 생각을 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끊어지려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칵테일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세팅하고 하나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그날 마침 광희 작가님이 사놓은 수박이 있어 수박으로 칵테일 연습을 했던 터라, 수박 칵테일 한 잔, 코팡안의 바다라는 별칭을 가진 블루 진토닉, 파인애플, 망고, 오렌지등 열대 음료를 섞고 럼을 첨가한 칵테일을 내놓았다. 진토닉 빼고는 내 멋대로 휘뚜루마뚜루 만든 칵테일이다. 술은 좋아하지만 칵테일은 조금 배워봤을 뿐 경험치가 현격하게 적은 내가 그것도 레시피가 아닌 창작 칵테일을 내놓아서 판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또 부담되는 일인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손을 바들바들 떨며 칵테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커플이 놀러와 오흐리드의 노을 논알콜과 알콜을 한잔 씩 시키면서 나의 멘붕은 계속 이어졌다. 원래 오흐리드의 노을은 시브리즈로 프렌치 키스의 맥라이언이 좋아하고 데드풀 2의 주인공의 최애 칵테일이라 영화 속 칵테일로 소개하려는 의도해서 처음 시작했다. 20세기 소년의 얼굴, 영화평론가 광희 작가님의 정체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생각해보니 술을 만드는 주체는 내가 아니던가. 그래서 나의 여행과 매치시켜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소환해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살면서 시브리즈라는 칵테일을 한번도 먹어본 적 없으면서 정한 것. 몇 번의 실습 끝에 코스모폴리탄이 맛도 컬러도 좋아 결국 코스모폴리탄으로 바꾸게 되었다. 근데 코스모폴리탄은 도저히 논알콜로 만들기는 애매한 구석이 있는 아이라 수박즙을 활용해 휘뚜루마뚜루 또 2잔을 만들어 버렸다. 완성된 칵테일을 먹어보는데 정말이지 정성을 들여 지은 독을 가차없이 깨버리는 장인의 마음을 단숨에 이해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는 칵테일을 내놓기가 끔찍히도 싫었지만 맛있다는 주변인들의 응원에, 논알콜만 다시 만들어 서빙했다. 노을을 닮은 칵테일이라고 말하며 내놓자

"짙은 노을이라고 생각할게요"

라고 남자가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맛에 있어서 염려스러움을 표현했더니 그 또한 굉장히 기분좋게 반응해서 춘자가 말하던 장충동 사람들의 매너 있음을 실감했다. 첫 날 5잔의 칵테일을 만드느라 얼마나 진을 뺐던지, 바로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춘자와 고물님이 카페 개시 첫 날 느꼈을 그 긴장감과 피로였다. 연남동에서 북한 식당을 한다는 광희 작가님 지인분이 만두와 탕수육을 나누어 주셔서 안주가 생기기도 했고 춘자가 스달을 만원에 판 기념으로 기네스를 한 잔씩 사줬다. 매일 우리가 돈 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원하게 기네스를 들이키니 첫 날의 하루가 촤르륵 돌아간다. 야매 바텐더 젠젠의 첫 데뷔, 이,,,,정도면 성공?....... 이 공간,,,,재미난 일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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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님 심정이 이러셨구낭. 혹독한 바젠 신고식!! 짝짝짝

"짙은 노을이라고 생각할게요"

하 진따 여기 손님들 뭐냐고요 ㅠㅠ 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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