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100] Wisdom Heart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고원의 차갑고 마른 바람이 묻은 북소리와 피리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요동친다. 머릿속에 재현된 고원의 바람을 타고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허공에 나부낀다. 그리고 내 몸은 하나의 송신기가 된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에너지가 목덜미와 귀, 관자놀이에서 사방으로 뿜어져 나온다. 우주로 송출하는 전기 신호를 통해 좌표를 찍는 것이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 하고. 마침내 코끝에서 고원의 냄새까지 느껴지면 몸이 사르르 떨리고 팔뚝과 뺨에 닭살이 돋는다.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에서, 내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전생에 품었던 바람을 기억해냈고, 이를 통해 여전히 히말라야 고원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으니 이번 생의 중요한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냈다는 성취감이 든다. 전생, 이라니 참 유별나고 거창하다. 그러나 이 강렬한 느낌을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좋았던 여행지야 열 개도 스무 개도 갖다 댈 수 있지만, 감히 전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든 곳은 아직 라다크 말고 세상 어디에도 없다. 볼리비아에서 만난 안데스의 인디오 케추아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케추아처럼 생겼다며 친근감을 표현하길래 어쩌면 내 안에 고산인의 무엇이 흐르고 있나 보다 생각한 적은 있다.

그 바람을 기억해낸 이후로는 15년째 라다크 꿈을 반복해서 꾼다. 꿈에 나오는 라다크의 지형지물은 실제와 조금 다른데, 공항에서 시내까지 오는 길과 매일 같이 드나들던 스피툭 곰파, 여행자들이 모이는 창스파 로드의 모습만큼은 여전히 같다. 하도 많이 꾸어서 꿈 버전의 라다크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다. 꿈에서 만난 라다크 친구들은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하나같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얼굴을 마주하면 이내 섭섭한 마음이 들고, 깨어나서는 꿈이었구나, 하고 서글퍼진다. 한동안은 그리움에 질식할 것 같다.

마치 살아서는 닿지 못할 고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써놨지만 사실 라다크가 그렇게 애가 닲게 그리울 만큼 가기 어려운 곳은 아니다. 인천에서 델리까지는 직항으로 여덟 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델리에서 레까지는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이다. 시차도 세 시간 반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로를 선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점과 점을 잇고 보면 분명 짧은 거리인데 육로로 가면 중간중간 눈만 붙이며 이동한다고 해도 2박 3일은 꼬박 걸린다. 그마저도 도로 사정이 좋을 때의 이야기이다. 물론 요즘에는 마날리 - 레 구간에 아탈 터널(무려 세계에서 가장 긴 산악 고속도로 터널!)이 뚫려서 이동 시간이 꽤 단축되었고, 길도 많이 좋아져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쉬운 길은 아니다. 라다크로 향하는 배낭여행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대신 그 험하고 고된 길을 기꺼이 선택한다.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고원의 바람을 품고 싶었던 나는 쓰고 남는 것이 패기와 시간뿐인 배낭여행자였을 때도 대체로 비행기를 타곤 했다. 레로 향하는 비행기는 대부분 이른 아침에 출발하고 첫 비행기는 새벽 다섯 시부터 있는데, 하얗게 밤을 지새운 뒤 숨죽인 새벽 공기를 가르며 델리의 텅 빈 도로를 내지르는 시간은 몇 번이고 재생하고 싶은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는데도 각성한 몸과 정신은 긴장, 설렘, 흥분으로 휩싸여 한숨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벽 3시의 델리 기온은 이미 33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전날 오토릭샤를 타고 다니며 한낮의 델리 날씨에 푹 익혀졌던 탓인지 새벽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인체의 적응력이란 실로 대단하다. 레에 도착하면 기온은 20도 가까이 떨어져 영상 5도 안팎을 가리킬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꺼내 입을 가을 외투를 배낭에 구겨 넣었다. 호출한 우버 차량이 거의 도착했는데 호텔 정책상 투숙객이 탑승하지 않은 외부 차량은 로비 앞으로 올 수 없게 되어 있어 메인 게이트까지 한참을 걸어 나가야 했다. 델리에서 고생하지 말고 편히 지내다 가자고 나름 좋은 호텔을 예약했지만, 체크인부터 애를 먹더니 수영장은커녕 외롭게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하다가 '좋은' 호텔의 쓸데없이 깐깐한 보안 정책 덕분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떠나게 된 셈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발걸음을 옮기며 남은 고생은 부디 델리에서 탈탈 털고 가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미 인천에서 한 차례 지독한 상황을 겪었던 터라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생각해서 충분히 일찍 출발했는데도 국내선 공항 티켓 카운터 앞 대기 줄이 어마어마했다. 예약할 때 보니 운임이 전에 없이 비싸길래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라다크는 원래 인도인보다는 외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였는데 분위기를 살펴보니 90%가 가족 단위의 인도인 관광객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에 사계절이 전부 있었다. 민소매에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두꺼운 패딩 점퍼까지 챙겨 입었다.

예상대로 체크인 수하물 무게가 15kg을 훨씬 넘어 추가 요금을 내야 했다. 책을 잔뜩 들고 오는 바람에 무게가 많이 늘었다. 젠젠의 캐리어 안에 들어 있을 빙수 기계와 호떡 믹스와 3kg의 팥을 떠올리니 그 짐을 지고 오느라 고생할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가방 안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좀 우스워서 웃고 말았다. 카페 두레를 시작하던 해에도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의 가방에 온갖 주방 살림을 다 넣어 와서 꽤 큰 돈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둘의 짐은 무척 단출하다. 줄어든 짐의 크기만큼 마음도 가볍다. 가벼워서인지 가라앉아 머무르지 않고 자꾸만 울렁거려서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예전에는 뭐랄까, 라다크로 향하는 매 순간 사활을 거는 기분이었다. 라다크에서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이제는, 다만, 보고 싶기만 하다. 그리운 마음뿐이다.

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리고 잠이 쏟아졌다. 눈을 감고 비행기에서 들으려고 준비해둔 음악을 재생했다. 북소리와 피리소리를 들으며 고원의 바람을 떠올렸다. 금세 잠이 들었는데 얼마 후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눈을 떠보니 승객들이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창밖의 풍경을 담아내느라 바빴다. 고원의 주름진 살결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비행기는 지금 히말라야 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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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ears ago 

라다크에서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이제는, 다만, 보고 싶기만 하다. 그리운 마음뿐이다.

라라님 글을 좋아하지만 라다크에 관한 라라님글은 정말이지 반칙이에요

 4 years ago 

마음이 너무 커서 글 쓰기가 너모너모 힘겨워요. 흙흙. 스텔라님 힘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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