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숨겨진 세상 스테이지 파이브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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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전시를 열겠다는 나의 계획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다섯 권의 책을 출간한 한국의 작은 출판사가 아직 외국어로 번역도 되지 않은 책을 프랑스에 가져가서 어떤 모양의 전시를 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했으리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마주 보고 앉아 석고 덩어리 같은 막막한 희망을 손끝으로 더듬을 때마다 우리는 곧잘 울 듯한 표정이 되곤 했다. 확실한 것은 그 덩어리 안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거두어내면 미켈란젤로에 의해 대리석 안에서 꺼내어진 다비드처럼 우리들의 숨겨진 세상이 발견될 것이다. 하기 싫은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하나씩 지웠다. 하고 싶은 걸 모두 떠올려 구현하기에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으니 효율의 측면에서도 조각의 방식이 옳았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걸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로 돈과 시간의 문제였다.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우리에겐 대안이 있고, 수많은 다음 기회가 저 멀리에서 앞다투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기꺼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첫 번째로 포기한 것은 번역서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책 없이 책을 전시한다는 게 맞나 싶긴 했는데,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전체를 대신할 부분들을 공들여 고르고, 골라낸 단어와 문장을 사람들이 읽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전시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내 친구 핀터레스트가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책과 저자를 소개하는 글, 저자의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 문장들을 번역하여 한글과 함께 카드 형식으로 제작하기로 했다. 전문 번역가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나 AI 번역기의 능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AI 번역기로 초벌 번역을 하고, 구멍을 찾아내고, 앞으로 뒤로 돌려보고, GPT에 어휘나 톤 수정도 맡겼다. 글맛과 분위기까지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메시지는 오해 없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문장 카드와 함께 책의 표지와 메인 이미지, 책의 실물도 함께 전시하기로 했다. 한국 단행본의 만듦새와 한글의 모양은 그 자체로 낯설고 특별한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춘자에서 출간한 책이 모두 여행 에세이인만큼 다섯 저자의 여정을 커다란 지도에 표시하고 세계 곳곳의 도시들에 대해 저자들이 언급한 문장들도 카드 형식으로 제작했다.

디자이너 우툰, 포토그래퍼 산책, 일러스트레이터 그린의 작업물은 완전히 시각적인 메시지이니 전시물을 보기 좋게 인쇄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작가들은 벽면의 사이즈를 고려하여 작품을 고르고 규격을 정했다. 스팀펑크에서 진행한 우툰의 첫 번째 NFT 프로젝트 ‘Mixed Animals’, <어쩌다, 크루즈>에 수록된 산책의 삽화, 원본 스케치들과 사진 작업물들, <개새끼소년>에 수록된 그린의 삽화와 영화 포스터 일러스트까지 모든 전시물이 확정되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현지에는 언제나 수많은 변수가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모든 전시물은 한국에서 인쇄하기로 했다.

우툰은 전시장 도면을 축소해서 시뮬레이션을 위한 벽면을 만들었다. 현장 답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모든 전시물을 사전에 배치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도화지를 하나씩 채우고 나니 어느덧 전시장 모든 가상 벽면이 꽉 찼다. 그때 즈음엔 막막함이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두 번째로 포기한 것은 전시장 근처에 숙소를 구하는 일이었다. 가져가야 할 짐은 대부분 종이였는데 부피가 작아서 생각 없이 하나씩 늘리다 보니 어느덧 그 무게가 100kg을 훌쩍 넘겨버렸고, 사이즈가 큰 인쇄물은 손상 없이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팀 춘자 4인이 이 짐을 나누어 갖고, 파리까지 무사히 가져가는 것은 출국 전부터 최고 난제가 된 상황이었다. 효율적인 동선을 위해 우리의 집은 전시장 근처에 있어야 했다. 생활 공간을 무작정 뒤섞어 버리기에는 4인의 관계가 애매했고, 각자의 사적 영역, 적어도 1인 1침대는 보장할 수 있는 집이어야 했다. 거기에 하나 더. 짐을 모두 펼쳐 해체하고 다시 쌓고, 뜯고 다시 포장하는 등 전시 준비를 위한 가내 수공업 공간까지 필요했다. 그런데 전시장이 있는 동네는 마레 지구가 아닌가.

사실 마레에서 전시회를 열겠다는 결정을 내린 순간부터 마음에 담아둔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전시장 바로 다음 블록에 있었고, 여섯 명도 충분히 지낼 수 있을만큼 넓고 쾌적해 보였다. 무엇보다 사진 속 그 집 책장에 융의 <레드북>이 꽂혀 있는 걸 보고 이번엔 여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집에 지내려면 예산의 다섯 배는 더 필요했다. 마지막까지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보다가 결국 포기.

포기 후에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적화된 공간을 찾아야 했다. 여기부터는 인내와 끈기, 감과 운 같은 검색 능력에 달려 있었다. 집을 찾는 동안에는 유럽 안에 테러리즘과 베드벅 이슈가 난리였다. 이 이슈들은 이미 난이도 극악인 이 검색 과정을 더 지독하게 만들었고... 그렇지 않아도 베드벅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로 검색에 매달렸다. 전시장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수많은 조건을 만족하는 집을 찾고, 집부터 전시장까지 동선을 파악하고, 이동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계산해야 했다. 인공지능, 네가 정말 인류를 위한 기술이라면 부디 이것부터 해결해주겠니...

인내와 끈기, 감과 운을 총동원하여 결국 전시장에서 RER을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동네에 베이스캠프가 될 집을 찾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집을 예약하기까지는 다시 몇 날 며칠이 걸렸다. 빈털터리 상태로 여행을 계속해 나가던 2019년, 에어비앤비 복수 계정으로 할인 쿠폰을 이용했던 이력 때문에 다른 기기로 로그인함과 동시에 계정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비양심에 대한 댓가를 이 중요한 순간에 치르게 되는구나. 나는 이 인과응보의 우주 법칙에 순순히 항복했고, 다시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법칙에는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내 대신 예약을 시도하려는 우툰의 계정까지 차단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우툰은 에어비앤비의 계정을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실 우툰의 계정이 차단당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차단 계정으로 예약을 시도하려던 집을 연이어 예약하려는 계정을 에어비앤비의 알고리즘은 차단 계정의 또 다른 계정으로 간주했을 거라는 게 나의 추론이다. 결국 젠젠의 계정으로 가까스로 예약에 성공했다. 이제 다 된건가...?

그리고 막판에 예상치 못했던 챌린지가 등장했다. 외삼촌의 소개로 새로운 창작자가 숨겨진 세상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반가운 소식이 어째서 팀 춘자에게 챌린지였냐고? 영화를 만드는 그 창작자의 작품이 공포영화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무려 한국형 물귀신이 등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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