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황혼과 해풍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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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난리 통이 되었을 때, 순천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내내 기회가 없었다. 순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작가 김승옥이 자란 곳이며 그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되어준 곳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고 나서는 김승옥의 고향이자 해태의 고향인 곳이 되었지만.

순천 생각을 하고 며칠 뒤, 소설가 김승옥에 관한 다큐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순천행 열차에 올라탄 어떤 노인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작가는 오래전 말을 잃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셌고,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다. 제작진과 필담을 주고받는 그의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젊은 김승옥의 사진 속 모습과 아주 달랐지만, 예의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해 보였다. 다큐를 끝까지 보고 나니 "아, 순천 가야겠다."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온 들에 황혼이 내리고 있었다. 들이 아스라하니 끝나는 곳에는 바다가 장식처럼 붙어 보였다. 그 바다가 황혼녘엔 좀 높아 보였다. 들을 건너서 해풍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해풍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짠 냄새뿐. 말하자면 감각만이 우리에게 자신을 떠맡기고 지나갈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리들은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던 것일까. 설화가 없어서 우리는 좀 우둔했고 판단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을 느끼고만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이 항상 종말엔 패배를 느끼고 말듯이 우리도 그러했다. 들과 바다 - 아름다운 황혼과 설화가 실려 있지 않은 해풍 속에서 사람들은 영원의 토대를 장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갔다. 그리고 더러는 뿌리를 가지게 됐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시들어져갔다는 소식이었다. 차라리 이 황혼과 해풍을 그리워하며 그러나 이 고장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차게 빛나는 푸른색의 아스팔트 위에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눕혀버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한낱 자연의 현상에 불과한 저 황혼과 해풍이 그리하여 내게는 얼마나 깊고 쓰라린 의미를 가졌던가! 숱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동시에 보다 깊은 패배감을 안겨주고 무심히 지나가버리는 저것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김승옥



자전거를 타고 동천변을 달렸다. 자전거를 탈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배속으로 흐른다. 순천만까지 금방 닿았다. 동천도, 갈대도, 바다도, 지는 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도 말을 걸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는 이야기도, 의미도 없다. 예상하지 못한 일로 서울에서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던 나는 순천에 다녀와 알게 되었다. 이야기와 의미를 찾아 바다 건너 세상을 떠도느라 황혼과 해풍만이 머무는 곳조차 이 땅에 마련해두지 못했다는 것을. 아무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아서, 무엇도 말을 걸어오지 않아서, 오로지 느끼고만 있어서 좋은 곳 말이다. 새삼스럽지만 이 땅 곳곳에 나의 황혼과 해풍이 머무는 곳을 만들어 두기로 했다. 그럼 아침마다 심장을 내리누르는 무거운 추 때문에 답답할 일은 없을 것이다. 스산한 바람에 가슴 철렁할 일도 없을 것이다. 가까이 있다면 가까이 있어 정답고, 멀리 있다면 멀리 있어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순천은 순천만이 아니라 동천이다. 동천이 달려 바다까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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